제221화
“후우우…. 생각해 보지.”
그렇게 말하며 밀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지크프리트가 따라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런 지크프리트를 막으며 말했다.
“앉아 있어. 다음 차례가 있으니까.”
“다음 차례?”
“저를 말하는 거랍니다.”
밀턴 다음으로 나타난 것은 레이라 여왕이었다.
그녀의 등장에 지크프리트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왜 안 나오는가 했더니?”
“저도 당신과 단둘이서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요.”
“미인과의 대화가 이렇게 안 내키는 건 처음이군.”
지크프리트는 반쯤 일으켰던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붙였고 레이라 여왕이 그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는 밀턴을 흘깃 보면서 말했다.
“자리를 비켜 주세요.”
“위험해.”
마스터인 밀턴과 달리 레이라는 그냥 연약한 여성일 뿐이다.
지크프리트의 무력에 대항할 수단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레이라 여왕은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지크프리트의 목적이 군사 동맹인 이상 레이라에게 무력을 사용하는 미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자리를 지켜 주려던 것이다.
“여보, 저하고 약속했잖아요?”
하지만 레이라 여왕의 한마디에 결국 밀턴은 자리를 비켜야 했다.
지크프리트와 회담을 원하는 자는 세 명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너무 달랐고 비밀적인 부분이 강했기 때문에 일대일 면담을 하기로 했었다.
“어쩔 수 없지.”
밀턴은 그렇게 말하며 정원을 떠났다.
지크프리트와 단둘이 남은 레이라 여왕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조건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무조건 들어줘야겠어요.”
“꽤 파격적으로 말하는군요.”
“클라우디아 바모스를 넘겨요.”
레이라 여왕의 말에 지크프리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누군지 모르겠군요.”
“저는 무조건 들어줘야 한다고 말했어요.”
“누군지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넘기겠습니까? 불가능한 요구를 하시는군요.”
“잔말 말고 넘겨요.”
“거듭 말하지만 불가능합니다.”
“…….”
“…….”
요물과 괴물이 치열하게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숨 막히는 상황 속에서 레이라 여왕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당신 입장에서 봤을 때 클라우디아는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지. 그런데 이렇게 안 주고 버티고 있다는 것은…. 클라우디아를 최대한 비싸게 팔아넘기려고 하는 것이야. 내 말이 틀린가?”
레이라 여왕의 말에 지크프리트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침묵했다.
무언의 긍정이라는 말이었다.
클라우디아 바모스.
레이라 여왕에게는 가족의 원수이지만 지크프리트에게는 그저 유용한 여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의 미모를 활용해서 남자들을 치마폭에 감싸서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여자.
실제 그렇게 할 수 있는 남자들이 꽤 있었다.
레스터 왕국에서는 스카이트 1왕자를, 그 후에는 스트라부스 왕국의 데릭 브란스 공작을 홀렸다.
그리고 브란스 공작에게 인장을 얻은 후에는 브란스 공작가에 들어가서 브란스 공작의 동생을 홀려서 다시 한번 자기 자리를 찾았다.
그야말로 뻐꾸기 같은 여자였다.
어디를 가도 새로운 이름 새로운 신분으로 금방 자리를 잡았다.
기존에 자리를 잡고 있는 여자의 자리를 빼앗으면서 말이다.
다만, 그렇게 흐르고 흘러서 타깃을 지크프리트로 정한 것이 클라우디아의 실수였다.
아무리 남자 조종하는 것에 도가 튼 클라우디아라고 해도 지크프리트에게는 어림없었다.
그야말로 이빨도 먹히지 않았다.
다만 지크프리트는 그녀를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여자라는 성을 이렇게까지 무기로 잘 활용하는 여자는 드물었다.
그래서 지크프리트는 그녀를 마약에 중독시켜서 자신의 장기말로 만들었다.
실제 지크프리트가 장교 시절에 공화국 고위 장교들 중 상당수가 클라우디아의 유혹에 걸려들어서 지크프리트의 정치적 뒷공작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그렇게 몇 번을 써 먹은 후에 마지막 가치로 스트라부스 왕국의 맥카시 오브라이언 공작을 꼬여 내는 것까지 성공했다.
그 후에는 딱히 이용해 먹지 않고 정기적으로 망가지지 않을 정도의 약을 지급하며 방치하고 있을 뿐이었다.
맥카시라는 마스터에게 달아 놓은 목줄.
지크프리트에게 있어서 클라우디아는 그 이상의 가치는 없었다.
레이라 여왕이 그 이상의 대가를 지불한다면 적당한 시기에 그녀를 내주는 것도 가능은 했다.
단, 그녀의 말대로 이왕 파는 물건이라면 최대한 비싸게 팔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지크프리트도 조금 잘못 파악한 게 있었다.
레이라 여왕은 그렇게 만만한 요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클라우디아를 넘긴다면 내가 제시할 대가는 하나뿐입니다.”
“여전히 그런 여자는 모르지만 일단 들어는 보죠.”
“레스터 왕국과 공화국의 군사 동맹을 반대하지 않도록 하지.”
“…….”
순간 지크프리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동맹이 성립하도록 도와준다는 것도 아니고 반대를 하지 않는다. 라는 얼토당토않은 조건이었다.
최대한 비싸게 팔아먹으려는 지크프리트에게 레이라는 정말 싼 가격을 부른 것이다.
문제는….
‘거부할 수가 없군.’
이걸 거부할 수 없는 것이 지크프리트의 입장이었다.
기껏 밀턴을 반쯤 설득시켜 놨는데 여기서 레이라 여왕이 반대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
결국 군사 동맹은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지크프리트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최대한 샅샅이 생각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알겠소.”
순순히 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크프리트에게 있어서 클라우디아는 확실히 큰 가치가 없다.
비록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이용할 기회가 오기는 했지만 레이라 폰 레스터라는 요물을 자극해서까지 이익을 보기에는 위험성이 너무 컸다.
“전쟁이 시작하는 즉시 레스터 왕국에 클라우디아를 보낼 겁니다. 됐습니까?”
“좋아요.”
그리고 레이라 여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크프리트가 말했다.
“문서를 남기거나 담보는 필요 없는 겁니까? 내가 말로만 하고 속일 수도 있는데?”
그러자 레이라 여왕은 지크프리트를 보고 가장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디 한번 해봐요.”
“…….”
그리고 다시 등을 돌려 정원을 떠나는 레이라 여왕의 뒷모습을 보고 지크프리트는 결심했다.
‘그냥 넘기자.’
괜한 수작을 부렸다가는 엄청난 뒤끝이 있을 것 같았다.
통하고 안 통하고를 떠나서 크게 곤란할 것이 분명했다.
“밀턴 포레스트는 용케도 저런 여자와 함께 사는군.”
지크프리트 본인 같으면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사양이었다.
그때 정원에 마지막 한 명이 들어왔다.
“원래 자가 데꼬 살기는 좀 빡시다.”
“당신은?”
“모르는 척하지 마라. 다 안다 아이가?”
“…….”
지크프리트의 앞에 털썩 앉은 것은 비앙카였다.
그녀가 지크프리트에게 개인적인 용무가 있는 마지막 한 명이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서 지크프리트를 보고 말했다
“엘리는 잘 있나?”
“그런 사람 모른다고 하면…. 저주라도 걸 기세군.”
지크프리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엘리제의 신병을 요구하는 건가?”
“요구하면 넘길 기가?”
“아니, 불가능하지.”
레이라가 요구한 클라우디아와는 다르다.
엘리제의 존재는 지크프리트에게 있어서 몹시 중요한 전력이었다.
고스트의 비약을 비롯해서 결정적인 순간 지크프리트가 활용할 수 있는 비장의 카드 중에 하나가 엘리제였다.
그녀를 요구한다고 순순히 넘겨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뭐, 그럴기라 생각했다.”
비앙카는 자기 몫의 찻잔에 알아서 차를 따랐다.
그리고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벌컥벌컥 마셔 버렸다.
향을 음미하지 않고 그냥 냉수 마시듯이 말이다.
“뭐, 어차피 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데이.”
“…….”
“대신 엘리에 관해서 한 가지 말해 줄 게 있어서 찾아왔데이.”
“무슨 말이지?”
“별로 중요한 건 아니고…. 아니 중요하다면 중요하다지만…. 으음, 역시 말 안 해주면 찝찝해서 말이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그 전에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데. 니 엘리하고 한 적 있나?”
“…….”
여성 중에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을 하는 사람은 처음 본 지크프리트였다.
“있나? 없나? 다 큰 어른이 내숭 떨지 말고 그냥 말해라.”
“없다. 그리고 그럴 생각도 없어.”
그러자 비앙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천만다행이데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그게 말이제. 사실…. 에잇, 그냥 말해 줄게. 충격 받지 말그래이.”
“일단 말이나 하시지.”
지크프리트는 무슨 말을 들어도 놀라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엘리는….”
비앙카의 설명이 이어지자 지크프리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니, 표정뿐만이 아니라 전신이 모두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리고 설명이 끝나자 비앙카는 자기 찻잔에 다시 차를 따라서 원샷해 버렸다.
그리고 얼어붙어 있는 지크프리트를 보고 말했다.
“사실, 가가 고향에서 쫓겨난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
“일단 알려는 줘야 할 것 같아서 알려 줬데이. 그럼 내가 가 죽일 때까지 잘 돌봐 주그라.”
그렇게 자기 할 말만 다하고 비앙카는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홀로 자리에 남은 지크프리트는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그런…. 그런 말도 안 되는….”
도대체 무슨 말을 들었던 것일까?
“은의 현자님.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지크프리트의 대대적인 후퇴 작전 때문에 진격이 멈춰 있었던 제국군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급 물자를 충분히 조달했고, 선발대를 보내서 진격로도 확보했다.
50만의 대군이 움직이다 보니 준비 시간이 두 달이나 걸렸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빠르게 된 것이다.
“음, 좋아. 모든 전선에 전진 명령을 내려라.”
“옛!”
안트라스의 명령에 따라서 제국군이 진격을 시작했다.
과거 스트라부스 왕국의 영토였던 땅을 제국이 천천히 점령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마무리만 잘하면 앞으로 300년간은 굳건할 제국의 기반을 다질 수 있겠지.’
안트라스는 여기까지 오면 이제 자신이 할 일은 거의 다 했다고 생각했다.
공화국을 북부에 묶어두고 꾸준하게 공세를 취하며 서쪽에 있는 레스터 왕국을 외교적으로 견제하기만 하면 이 전쟁은 이길 수 있다.
길게 잡아도 3년 안에 공화국은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 공화국이 무너진 후에는 레스터 왕국을 외교적으로 압박해서 제후국으로 만들면 된다.
그 와중에 레스터 왕국을 분열시킬 계책까지 모두 만들어 뒀다.
레스터 왕국의 북부에 남아 있는 왕정에 대한 거부감을 부채질하고 왕가와 대공가의 양분된 권력 구도를 이용해서 이간질을 시키는 것까지 다양하게 말이다.
‘인생의 마지막 마무리치고는 나쁘지 않은 공적이야.’
안트라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차분하게 마차 안에 기대앉았다.
그런데….
“은의 현자님! 현자님 어디에 계십니까?”
전령 한 명이 급하게 말을 달리며 안트라사를 찾았다.
“무슨 일인가?”
안트라스가 마차의 창을 열고 말하자 전령이 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말했다.
“레스터 왕국이 제국군을 공격했다고 합니다.”
“…….”
천하의 안트라스도 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