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0화
밀턴은 개소리 한번 잘 들었다고 생각하며 허리에 찬 검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밀턴이 검을 뽑기 전에 지크프리트의 말이 이어졌다.
“만약 내 조건을 들어준다면 공화국과 레스터 왕국의 영구적인 평화 조약을 체결하도록 하지.”
“…….”
검을 뽑으려던 밀턴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 밀턴은 지크프리트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네놈의 목적은 대륙 정복 아니었나?”
“그렇게 말한 적은 없을 텐데?”
“말 안 해도 뻔하지. 네놈 행보를 봐라.”
힐데스 공화국의 일개 장교에서 시작해서 지금에 와서는 통일 공화국의 초대 대총통이라는 절대 군주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 과정은 전쟁과 정복으로 이뤄져 있었고 그게 제국의 심기를 건드려 지금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네놈이라고 다를 바는 없지 않나?”
지크프리트는 밀턴에게 자신과 다를 바 없다는 듯이 말했다.
사실 밀턴 역시 전쟁으로 출세한 영웅이라는 점에서는 똑같았다.
“나는 다르지.”
“뭐가 말인가?”
“나는 네놈 같은 욕심이 없어. 원래 같으면 그냥 시골 영주로 평화롭게 살았어도 충분히 만족했을 인물이라고.”
“하…. 가당치도 않은 농담이군.”
“…….”
지크프리트는 농담이라고 치부했지만 밀턴은 그저 지그시 침묵하며 지크프리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표정을 읽으면서 지크프리트는 처음으로 혼란스런 얼굴을 했다.
“진심인가?”
“당연하지.”
밀턴의 말에 지크프리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단둘이서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었지만 지크프리트는 밀턴을 자신의 숙적으로 여겼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야망을 가슴에 품고 있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밀턴은 아니라고 한다.
자신은 그냥 평온한 삶을 원했을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크프리트가 보기에 그건 진심으로 보였다.
‘생활에 큰 불편함이 없고, 적당한 행복과 적당한 스트레스가 있는 삶. 보통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걸로 만족하지. 하지만….’
“네놈은 보통 사람이 아니지 않나? 밀턴 포레스트.”
“아니, 보통 사람이야.”
“하지만…. 네놈은…. 그렇다면 도대체 왜?”
천하의 지크프리트가 이렇게까지 혼란에 빠진 모습은 드물다 못해 진귀할 정도였다.
몇 번이고 전쟁터에서 자웅을 가리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실패로 돌아갔던 자신의 숙적이 이런 범인이었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지크프리트는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밀턴은 차라리 속이 시원하다는 듯이 자신의 본질을 말했다.
“어쩌라고? 나는 원래 이런 놈이야. 그냥 어쩌다 보니 출세했고, 어쩌다 보니 너 같은 놈하고 엮어서 생고생하고 있을 뿐이지.”
“그저 운명에 희롱 당했을 뿐이라 이거냐?”
“어렵게 꼬아서 말하면 그런 거고, 간단하게 말하면 운이 없는 거지.”
“…….”
지크프리트는 혼란스러웠다.
아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노력했다.
언행 하나하나에 생각을 거듭했고, 하루가 시작할 때나 잠들 때마다 자신의 야망을 되새기며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다.
그런데 밀턴 포레스트는 그런 것은 원하지 않았는데 마치 흐름에 순응하며 적당히 대응하다 보니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고 한다.
“불공평하군.”
“그러니까 어쩌라고?”
밀턴이 다시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이제 밀턴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어차피 타인은 타인, 자신은 자신이다.
그리고 이 자리에 온 것은 밀턴의 본질을 파헤치기 위해서 온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일단, 부정하지는 않겠다. 내 목적은 세상의 정점에 군림하는 것이었다.”
“과거형으로 말하는군. 이제는 아니라는 건가?”
“상황이 많이 변했으니까.”
지크프리트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제국은 강하다.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알고 있다. 네가 일방적으로 쳐 발리고 있는 걸 잘 지켜보고 있으니 말이야.”
밀턴이 도발했지만 지크프리트는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할 말을 이었다.
“그저 병력 규모가 크고 제국의 마스터들이 강력할 뿐이라면 우리 쪽에서도 수가 있을 거다. 하지만…. 제국에 터무니없는 괴물이 잠자고 있을 줄은 몰랐다.”
“…….”
“이걸 봐라.”
지크프리트는 품 안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서 밀턴에게 내밀었다.
밀턴이 그걸 열어보자 거기에는 한 명의 신상 정보가 가득하게 들어 있었다.
“안트라스 이, 은의 현자라고?”
“제국에 잠입해 있던 모든 정보망을 총동원해서 간신히 알아냈다. 많은 것을 알아낸 것은 아니지만 그 남자가 이번 전쟁에서 제국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
“…….”
밀턴은 심각한 표정으로 서류의 내용을 살폈다.
‘안트라스 이라…. 비앙카가 예전에 말했지. 남대륙의 밑으로 내려가면 다른 나라들이 있다고?’
약간의 설명밖에 듣지 못했지만 그 나라들은 밀턴이 알고 있는 동양의 풍속과 많이 닮아 있다고 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 남자의 지략은 나와 대등한 것으로 보인다.”
“대등?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지 않나?”
밀턴의 말에 지크프리트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같은 수준의 전략가기에 손에 쥐고 있는 패의 강력함 차이를 넘지 못한 거지.”
한마디로 제국군이 너무 강력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다.
“다만, 그 은의 현자라는 괴물을 상대로 이 정도라도 버티고 있는 것은 내가 상대이기 때문이다.”
“자기 과신이 상당히 심각하시군.”
“틀린 평가는 아니다. 객관적으로 봐도 이 대륙에서 나보다 전술 전략이 더 뛰어난 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흐음….”
밀턴은 ‘그래. 너 잘났다.’라는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내심 지크프리트의 말에 동의는 했다.
[지크프리트.]
야심가 LV.8
무력 - 93 통솔 - 100
지력 - 99 정치 - 100
충성 - 00
특성 - 간웅의 야심, 군주의 절대복종, 전략, 교섭, 냉철, 언변, 간파, 용맹, 불굴의 투쟁심.
간웅의 야심 LV.7 :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신념을 뛰어넘는 집념을 발휘한다. 모든 일에 강한 원동력을 심어주고 평소에 쉬지 않고 목표를 위해서 노력을 기울인다.
군주의 절대복종 LV.8 : 한 번 자신의 휘하로 들어온 인재를 강하게 구속한다. 배신을 당항 확률이 크게 줄어들며 함께하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신하들의 충성심이 굳건해진다. 최종적으로는 신앙에 준하는 절대적인 믿음을 부여할 수 있다.
전략 LV.9(MAX) : 전쟁의 전체적인 판도를 읽어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작은 전투 하나하나가 전쟁의 전체 판도에 끼치는 영향력을 빠르고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다.
교섭 LV.8 : 거래나 협상시에 자신의 조건을 관철시키기 유리해진다.
냉철 LV.9(MAX) : 전투 중에 전황 전체를 보는 안목이 높아진다. 위기에 몰렸다가도 적의 사소한 실수 하나로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
언변 LV.9(MAX) : 대화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설득, 혹은 굴복시킬 수 있다. 자존심이 강한 상대에게는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간파 LV.8 : 타고난 관찰력으로 대화 상대의 말의 허실을 파악한다.
용맹 LV.9(MAX) : 전투가 벌어지면 전투력이 올라가며 자기 지휘하에 있는 병력의 사기를 크게 상승시킨다. 직접 연설을 하거나 앞서서 전투에 개입하면 그 효과는 더 크게 올라간다.
불굴의 투쟁심 LV.5 : 위기의 순간 발동하며 군주의 그릇을 가진 자가 사용할 경우 자신과 신하들의 능력치를 모두 상승시킨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 닥쳐도 항복하지 않으며 자포자기하지도 않는다. 현재 처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최선의 판단을 끊임없이 모색한다.
‘이 괴물 자식….’
예전에 비교했을 때 무력을 제외한 모든 능력치가 다 올랐다.
특히 통솔 100과 정치 100이라니?
100이라는 숫자는 처음 봤다.
분명 99가 끝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보통 능력치가 90을 넘으면 성장이 크게 더디어지고 수치의 차이가 1만 나도 그 차이가 상당했다.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런 경향은 더 심해졌다.
그 레이라조차 극히 최근에 정치 수치가 99가 되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크프리트는 능력치가 99를 넘어서 100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무슨 괴물이란 말인가?
‘특성도 여전히 짜증날 정도로 괴물이군.’
대륙 제일의 전략가.
다른 놈들이 말하면 허풍이나 오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지크프리트라면 마냥 거짓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괴물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제국군의 무서움도 실감할 수 있었다.
“내가 장담하지. 만약 제국이 우리 공화국을 멸한다면, 그 다음은 틀림없이 레스터 왕국이다.”
“과연 그럴까? 우리나라는 굳이 제국과 상대할 이유가 없는데?”
만약 제국이 레스터 왕국에 제후국이 되기를 요청한다면 밀턴은 적절하게 조건을 조율해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이길 수 없는 상대와 힘으로 맞서는 것은 우책 중에 우책.
자존심 보다는 실리를 챙기는 것을 밀턴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레스터 왕국이 앤드루스 제국과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하기에는 레스터 왕국이 너무 강해졌어.”
“…….”
지크프리트의 말은 밀턴이 애써 부정하고 있던 급소를 찔렀다.
굳은 안색을 하고 있는 밀턴을 보고 지크프리트는 담담하게 말했다.
“역시 너도 알고 있었군. 그렇지 않나?”
“후우….”
밀턴은 그저 한숨을 내쉬었다.
지크프리트는 연이어서 최악의 상황에 관해서 설명했다.
“안트라스 이는 상당한 고령이라고 한다. 이제까지 그늘에 숨어 있던 그가 이번 전쟁에 나선 것은 우리 공화국을 쳐서 제국의 위협 요소를 배제하겠다는 거겠지. 그런데 너희 나라를 남겨 둘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에 제국군이 보인 위력을 봤을 때 레스터 왕국이 단독으로 제국을 상대하는 것은 분명 무리다.
하지만 안트라스가 죽은 후에는 어떨까?
2차 이념 대립 전쟁에서 제국은 치욕적인 패배를 겪었다.
안트라스의 존재 하나로 인해서 제국군의 질은 너무나 달라진 것이다.
이미 고령인 안트라스에 비해서 밀턴과 레이라 여왕은 젊다.
지금 당장 밟아 놓지 않으면 자신의 사후에 제국의 위협이 될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기에 충분하다는 말이다.
“내가 제국이라면….”
지크프리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좀 전에 봤던 네 아이들을 인질로 삼을 것이다.”
빠직!
“입 조심해라. 지크프리트.”
밀턴이 진심으로 살기를 드러냈다.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거기에 맞서 기세를 올리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담담하게 말했다.
“가장 유효한 전략이다.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
“우선 네 자식들에게 정략결혼을 제안해서 제국에 머물게 하며 공물을 요구한다. 그렇게 제후국으로 만든 다음 서서히 국력을 소진시키겠지.”
“…….”
“그리고 네 손자 대에 가면 제국의 핏줄을 레스터 왕국의 왕좌에 앉힐 것이다. 이미 스트라빈 왕국이나 글로스터 왕국이 겪은 일이다.”
“…….”
그냥 가정이라고 무시하기에는 현실성이 너무 높았다.
결국 밀턴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힘의 균형을 위해서 지금 제국을 견제해야 한다는 말은 일리가 있지.”
사실 레스터 왕국 안에서도 레이라 여왕이나 세비안 백작이 계속 밀턴에게 권했던 일이다.
단, 지크프리트의 위험성을 알고 있는 밀턴은 계속 그 청을 거부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크프리트 스스로가 직접 나서서 설득하고 현실을 들이대자 밀턴도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다.
공화국과의 군사 동맹.
확실히 이것 말고는 제국의 기세를 꺾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네놈을 못 믿어.”
이게 문제였다.
앞뒤를 다 잘라먹고 한 말이었지만 지크프리트는 충분히 알아들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믿음을 줄 수는 없겠지.”
“…….”
맞는 말이었다.
침묵하는 밀턴에게 지크프리트가 진중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그러니 나를 믿지 말고, 상황을 믿어라.”
“이 빌어먹을 상황 말인가?”
“그래. 말 그대로 빌어먹을 상황이지. 우리가 손을 잡지 않으면 미래는 제국의 대륙 통일이다. 나 역시 이런 상황만 아니면 너한테 동맹 제의는 하지 않아.”
“…….”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이 현실을 인정해라.”
“…….”
밀턴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뇌하는 그의 표정만으로도 지크프리트는 확신했다.
밀턴이 동맹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