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9화
“다행인 것은 현자님의 말대로 우리가 적을 추격하지 않았다는 것이군요.”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서 입을 연 것은 고담 후작이었다.
“그렇군요. 이대로 적의 후퇴에 어울려서 추격을 했다가는 보급에 차질이 생길 뻔했습니다.”
“그랬다면 크게 위험했겠지요.”
“천만 다행이 은의 현자님의 혜안 덕분에 위기를 피했군요.”
지휘관들은 하나둘씩 희망적인 관측을 내놨다.
“적이 기반 시설을 모두 부쉈다면 지금 당장 추격하기는 무리요. 보급 라인을 확실하게 확보하며 천천히 나아가는 수밖에….”
안트라스가 이렇게 말하자 지휘관들도 동의했다.
“제국의 본토에 알려서 물자를 확보하겠습니다.”
“물자의 확보와 더불어서 진격로에 있는 거점을 재건시켜야 하오.”
“그렇다면 군인 이외의 인력이 필요하겠군. 남부에 있는 여유분의 농노를 모두 동원하는 게 좋겠소.”
“좋은 생각이오.”
제국군의 참모들은 착착 말을 맞춰가며 군의 진격에 필요한 행동을 진행했다.
다만 안트라스는 바쁜 참모들 사이에서 홀로 생각에 잠겼다.
‘보급선을 만들어가며 전진해야 한다면 시간이 좀 걸리겠군. 결국 지크프리트는 국토의 반을 잃어가며 시간을 벌었어. 놈이 이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 걸까?’
깊이 생각에 잠겼던 안트라스는 순간 안색이 나빠졌다.
“크흠….”
얕게 헛기침을 하는 안트라스를 보고 세바스티안 공작이 다가와서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이미 밤이 깊었어.”
“알겠네. 보급선의 확보는 여러분들에게 맡기겠소. 최종안이 정해지면 나에게 알려 주시오.”
그리고 안트라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그리고 안트라스와 함께 막사로 돌아간 세바스티안 공작은 걱정되는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은가?”
“허허허…. 안 괜찮을 게 뭔가? 내 나이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닌데?”
“…….”
안트라스를 침대에 눕힌 세바스티안 공작은 찹찹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영지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친구의 건강이 확실하게 나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전쟁이라는 긴장된 상황 속에서 전략을 지위하는 참모는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다고 해도 막대한 기력과 심력을 소모한다.
아무리 익숙하다고 해도 고령인 안트라스에게 건강의 적신호가 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마스터인 세바스티안 공작과 달리 안트라스는 그저 평범한 노인일 뿐이었으니 말이다.
세바스티안 공작으로서는 자신의 부탁으로 목숨을 깎아가며 지혜를 빌려주는 친구가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었다.
“당분간은 쉬도록 하게. 보급선의 확보 정도는 다른 이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으음…. 알겠네. 하지만 공화국의 움직임에 항상 귀를 기울여 주게. 놈들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바로 알려주고.”
“그렇게 하겠네.”
그렇게 안트라스는 잠시 작전 회의에서 물러나서 요양하게 되었다.
국토의 반을 포기한 대가로 지크프리트는 무엇을 얻었을까?
제국군이 무리한 진격을 했다면 보급선에 타격을 줘서 전쟁을 뒤집을 결정수가 되었겠지만 그건 무리였다.
안트라스는 신중함을 우선시해서 추격하지 않았고, 지크프리트 역시 그런 결과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 대신 지크프리트가 번 것은 시간이다.
제국군에서 동원한 병력은 무려 50만이다.
그냥 움직이는 것도 막대한 물자가 들어가는데 기반 시설이 완전히 무너져 있는 폐허를 횡단하는 일이 쉽게 될 리가 없었다.
좋든 싫든 제국군은 물자를 비축하며 태세를 재정비해야 했다.
아무리 빠르게 정돈한다고 해도 두 달, 어쩌면 세 달은 걸릴 것이다.
결국 지크프리트로서는 이렇게 번 시간을 최대한 유용하게 써야 했다.
“그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미지수지만 말이지.”
밀턴은 진중한 표정으로 전략 지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옆에는 레이라 여왕을 비롯해서 제롬과 세비안 백작 등의 국가 중진들이 함께 있었다.
“솔직히 제국이 이렇게까지 압도적일 줄은 몰랐습니다. 여기까지 오면 공화국으로서는 해법이 보이지 않는 군요.”
제롬은 승부의 향방이 제국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그 생각에 동의했다.
“제국은 제국이라는 거군요.”
“제대로 전력을 집중하니 이만한 파괴력을 보일 줄이야….”
설마 그 지크프리트가 이정도로 당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지크프리트가 이끄는 공화국군이 얼마나 강한지는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지크프리트가 이렇게까지 일방적으로 당하다니?
‘이대로 제국이 패권을 잡게 내버려 둬도 될까?’
모두 말은 하지 않았지만 비슷한 불안감을 품게 되었다.
“대공 전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뭘 말인가?”
세비안 백작의 말에 밀턴이 되물었다.
그러자 세비안 백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시지 않습니까?”
“…….”
밀턴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비안 백작의 말대로 알고 있었다.
‘더 망설였다가는 기회조차 사라지겠지.’
지크프리트가 국토의 절반을 파괴하면서까지 시간을 벌었다.
레스터 왕국이 이 판에 끼어들어서 균형의 추를 맞추고자 한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인 것이다.
다만, 공화국과 손을 잡는다는 선택지는 역시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국제 관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다고 한다.
하지만 밀턴은 공화국과는 손을 잡을 수 있어도 지크프리트와는 무리라고 생각했다.
‘너무 어려워. 그놈이 야망을 포기 하지 않을 게 뻔한 이상 호랑이 등에 올라타는 것과 다를 게 없어.’
결국 문제는 밀턴의 안에 있는 지크프리트에 대한 경계심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상황을 지켜만 보자면 제국의 상승세가 너무 무섭고….
결국 밀턴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그때.
세비안 백작이 시종 한 명에게 어떤 말을 들었다.
그러더니….
“대공 전하. 시종장이 급하게 찾고 있습니다.”
“회의 중이니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예. 하지만 굉장히 급한 일이라고 합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왕궁의 시종장이 회의의 방해를 무릅쓰고 방해할 정도면 정말 큰일인 모양이다.
“지금 가보도록 하지.”
그리고 밀턴은 회의장을 나가서 시종장을 불렀다.
“무슨 일인가?”
“대공 전하. 자택에 손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시종장은 평소 침착한 모습과 달리 크게 긴장한 모습이었다.
“어떤 손님이기에 그러지?”
“그것이….”
시종장이 손님의 정체를 밝히자 밀턴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정말인가?”
“예. 틀림없습니다.”
밀턴은 어이가 없었다.
혹시 시종장이 노망이 났거나 지금의 현실이 꿈은 아닐까 싶었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한발 늦게 회의장을 나온 레이라의 물음에 밀턴은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크프리트가 찾아왔다고 하는군.”
“뭐라고요?”
“그것도 혼자서.”
“…….”
천하의 레이라 역시 이번만큼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가 레스터 왕국의 수도인가?’
자신이 직접 함락시키려고 수도 없이 시도했던 장소였지만 결국 실패한 땅.
그렇게 생각하니 지크프리트는 애매한 감상에 잠겼다.
‘애당초, 밀턴 포레스트가 내 발목을 잡지만 않았다면 제국이 상대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니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지크프리트가 그런 감상에 빠져 있는 그때….
“아저씨는 누구야?”
지크프리트는 자신의 아래쪽에서 누군가 말을 거는 것을 느꼈다.
순간 지크프리트는 당황했다.
‘아저씨? 나보고 한 말인가?’
총사령관, 대총통 각하, 주군.
등등의 호칭으로 불려온 지크프리트로서는 거의 들어보지 못한 호칭이었다.
고개를 내려 상대를 확인하니 거기에는 앙증맞은 여자애 한 명과 그 여자애의 동생으로 보이는 어린 아기가 있었다.
둘이 손을 꼭 잡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남매인 듯했다.
‘그렇군. 이 둘이….’
왕궁에 살고 있는 어린애.
거기다 남매라고 하면 누구인지는 뻔했다.
“너희들이 밀턴의 아이들인가?”
지크프리트의 물음에 엘리자베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와아…. 아저씨 우리 아빠 이름으로 불러?”
“응? 아아…. 뭐. 그렇지.”
엘리자베스의 짧은 인생에 자신의 아버지를 이름으로 부르는 어른은 처음 봤다.
심지어 자신에게도 반말을 하고 있었다.
부모를 제외한 모든 어른들은 자신에게 말을 높이는데 말이다.
“우리 아빠 알아?”
“음. 잘 알지.”
잘 아는 것은 맞다.
정말 여러 가지 의미로 서로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정보를 수집했는가?
밀턴과 지크프리트는 서로를 정말 잘 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지크프리트의 대답에 엘리자베스는 천진하게 웃으며 말했다.
“헤에에…. 되게 친한가 보다. 그럼 아저씨는 우리 아빠 친구야?”
“…….”
천하의 지크프리트가 할 말이 없어졌다.
전쟁터에서 서로 못 죽여서 안달이 났던 두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친구라고 하겠나?
어린애가 상대이니 적당하게 거짓으로 말해도 되겠지만 어쩐지 그러기도 꺼려졌다.
그때 곤란에 처한 지크프리트를 구해준 것은….
“베스야 이리 오렴.”
전쟁터에서 수도 없이 서로를 노렸던 숙적 밀턴이었다.
“아빠!”
엘리자베스는 밀턴이 나타나자 달려가서 한 번에 품에 안겼다.
그리고 누나보다 조금 늦었지만 월리엄도 뒤뚱거리며 다가와서 밀턴의 다리에 달라붙었다.
밀턴은 아이들을 안아주고 시녀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노는 건 조금 있다가 하자. 아빠는 저 아저씨하고 얘기를 좀 해야 하거든.”
“아빠 친구하고?”
딸의 한마디에 밀턴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그리고 지크프리트를 바라보며…
‘이거 네가 한 짓이냐?’
라는 눈빛을 보냈다.
지크프리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설마.’라는 의미로 받아쳤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서로 참 잘 통하는 숙적들이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밀턴과 지크프리트는 단둘이 앉았다.
다른 심복들은 물론이고 레이라 마저도 끼어들지 않고 단둘이 회담을 시작한 것이다.
회담의 장소 역시 어두운 밀실 따위가 아니라 야외의 정원에 마련된 티 테이블이었다.
작은 새가 지저귀고 따뜻한 햇살이 싱그러운 신록을 비추는 이 아름다운 정원에서 회담의 자리를 만들고 밀턴이 가장 먼저 한 말은….
“어떻게 죽여줄까? 최후의 정으로 그 정도는 들어주지.”
꽤나 살벌한 말이었다.
“다짜고짜 협박인가?”
“당연하지. 설마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밀턴의 말은 그냥 하는 위협이 아니었다.
설령 국제적으로 오명을 뒤집어쓰는 한이 있더라도 여기서 지크프리트를 죽여서 얻을 수 있는 게 훨씬 더 많았다.
심복인 제이크는 고사하고 정예 병력이 고스트도 거느리지 않고 단신으로 찾아오다니?
입장을 바꿔서 밀턴이 지크프리트라면 절대 이런 미친 짓은 하지 않는다.
인생에 승부수를 띄우다 보면 도박을 해야 할 때도 있기는 있지만 그 판돈이 목숨이라면 별개의 문제다.
그리고 지크프리트라고 해서 이런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다.
알고서도 찾아온 것이다.
“내 목숨을 가져가기 전에 대화를 좀 하고 싶다.”
“유언이라면 들어주지.”
밀턴의 말에 지크프리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유언이 될지 말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일이고….”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자세를 바로 하고 밀턴에게 말했다.
“정식으로 제안하건대 공화국과 레스터 왕국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 싶다.”
“유언은 그게 다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