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217화 (217/257)

제217화

루카스 플로리안.

그는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작위가 없다.

왜냐하면 이 남자는 플로리안 공작 가문의 후계자이기 때문이다.

장남이 아니라면 자수성가해서 작위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는 아버지가 은퇴하면 플로리안 공작가를 물려받아야 할 몸이다.

그러니 아직 작위가 없었다.

사실 아들이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렀다면 슬슬 작위를 물려줘도 좋겠지만 그의 경우는 얘기가 조금 다르다.

그의 아버지인 도미닉 플로리안 공작 역시 마스터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냥 마스터가 아니라 제국의 최강자 크리스챤 슈바이커 공작 다음가는 2인자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강자였다.

정치적인 수완도 제법 있어서 제국의 군부의 장악력은 슈바이커 공작 이상이었다.

제국의 군부 중에 30퍼센트 정도가 지지하는 무장의 가문.

그게 플로리안 공작가인 것이다.

그런 플로리안 공작가의 소공자이며 스스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루카스를 누가 무시하겠는가?

제국의 젊은 호랑이라 불리며 사교계의 모든 여성들이 1등 신랑감으로 뽑는 인물이다.

단, 그렇게 귀하게 자라다 보니 필연적으로 오만함이 꽤 강한 성격이었다.

그런 그가 안트라스에게 말했다.

“유격 부대를 지휘하고자 한다면 나 혼자서도 충분하오. 어째서 우리 마스터를 둘씩 묶어 두는 것이오?”

루카스의 말에 안트라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흐음…. 고담 후작의 존재가 도움이 되지 않는단 말이오?”

“그런 것은 절대 아니오.”

안트라스의 말을 루카스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리고 고담 후작을 보면서도 말했다.

“고담 후작님, 내 의도를 오해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오해하지 않네. 심려하지 말게. 루카스 경.”

대답을 한 인물은 팔짱을 끼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중년의 남자였다.

베이커 고담 후작.

다른 말로는 심안의 마스터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놀랍게도 타고난 맹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기인이었다.

평소 보통 사람과 다름없는 행동을 하는 그를 보면 맹인이라고 믿을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는 틀림없이 맹인이었다.

성격이 겸손하고 품위가 있어서 무관뿐만 아니라 문관들 사이에서도 인격자로 존경 받는 인물이었다.

제국의 젊은 호랑이라고 불리는 루카스 역시 고담 후작에게 섣불리 무례를 범하지 못하는 것은 그의 인품과 실력을 존중해서 그런 것이다.

그리고 고담 후작은 존중해도 안트라스라는 인물은 아직 인정하지 못하는 루카스였기에 그를 지그시 바라보며 대답을 촉구했다.

“두 사람을 한 조로 섞은 것은 전력의 강화를 위해서 내가 내린 판단이오.”

“나 혼자서도 충분하오.”

“둘이면 더 쉽겠지. 남대륙에는 백지장도 둘이 들면 더 낫다는 말이 있다오.”

“으음…. 그렇다면 차라리 나와 아버님을 한 조로 섞은 것이 좋지 않겠소?”

루카스는 자신의 아버지인 도미닉 플로리안 공작과 한 조가 되면 보다 큰 공을 세울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고담 후작과 함께하기 싫다는 것도 군사를 독자적으로 운용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루카스의 그런 심정은 안트라스가 보기에는 속이 뻔히 보이는 행위였다.

‘젊은 용장이 공적에 목말라하는 것이야 흔한 일이지.’

제나라 시절에도 실력과 젊음을 겸비한 장수가 무모한 짓을 하는 것을 몇 번이고 봐왔다.

그게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잘못하면 큰 피해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니 안트라스는 루카스에게 고담 후작이라는 고삐를 단단히 채워 놓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젊은이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이런….”

안트라스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하고 부채질을 몇 번 하다가 말했다.

“미처 몰랐군. 아무래도 루카스 공자는 아직 아버님의 도움이 필요하신 것을 배려하지 못했소.”

안트라스의 말이 끝나자 루카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지금 나를 모독하는 것인가?!”

얼굴이 붉어진 루카스는 크게 화를 냈다.

아직 작위는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안트라스 경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지금 안트라스는 굳이 공자라는 호칭을 써서 자신을 도발한 것이다.

호칭 자체는 틀린 게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서 공자라는 말은 마치 그를 어린애 취급하는 듯 느껴졌다.

그리고 루카스의 아버지인 플로리안 공작 역시 썩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는 플로리안 공작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전 세상에 자랑하고 싶은 자신의 아들을 대놓고 철부지 취급하고 있으니 어찌 화가 나지 않으랴?

하지만 안트라스는 마스터 두 명의 적의를 눈앞에 두고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준엄한 표정을 하고 루카스를 꾸짖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전쟁터에서 사감을 드러내며 부친과 함께하고자 하는가? 그대 정도의 기량을 지닌 사내라면 어떤 환경 속에 있어도 자기 실력으로 공적을 세울 수 있을 터. 그렇지 않은가?”

자존심을 건드려 화를 내게 한 후에 꾸짖음.

하지만 그 꾸짖음의 내용을 자세히 들어보면 ‘너 정도 실력이면 할 수 있잖아?’라는 식의 칭찬이었다.

그러자 루카스는 할 말이 궁색해 졌다.

상대가 자신을 알아주고 오히려 자신이 스스로를 믿지 못했다는 상황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계속 화를 내기도 뭐해져 버렸다.

그리고 안트라스는 분위기를 바꿔서 부드럽게 말했다.

“루카스 경. 나는 그대를 믿고 있네. 그대는 이전에 실패했던 버켈 후작이나 모론 후작과 달라. 그렇지 않은가?”

“…·물론이오.”

마티아스 버켈 후작, 헤일리 모론 후작.

둘 다 루카스와 동세대의 인물이었고 제국 안에서 평가도 비등한 라이벌들이었다.

그 둘이 이전의 전쟁에서 먼저 죽어 버리고 자연스럽게 루카스만 남았지만 죽은 자들이라고 해서 호승심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안트라스가 그 둘을 예시로 들며 루카스에게 말했다.

“그 둘은 공적에 눈이 멀어 군을 무리하게 이끌다 제국에 큰 피해를 끼치고 전사했네. 하지만 자네는 달라. 눈앞의 공적에 연연하지 않고 제국의 충실한 검으로서 자신이 맡은 바를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는 그런 남자이지. 그렇지 않은가?”

안트라스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결국 루카스도 억지를 부릴 수 없게 되었다.

“알겠소. 최선을 다해서 맡은 바 임무를 달성하겠소.”

결국 순순히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말하는 루카스였다.

그런 루카스를 보며 아버지인 플로리안 공작은 혀를 내둘렀다.

‘내 아들의 고집도 보통이 아닌데…. 나 이외의 인물에게 설득당하는 걸 보는 건 오랜만이군.’

플로리안 공작의 기억에 따르면 아주 어린 시절 유모에게 설득 당한 이후 처음이었다.

[공자님. 깨끗하게 씻지 않으면 영애들한테 인기가 없어진답니다.]

이 말에 납득한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자, 그럼 모두에게 작전을 설명하겠소. 잘 듣고 충실하게 이행해 주시기 바라오.”

그리고 안트라스는 네 명의 마스터들에게 상세한 작전 지시를 내렸다.

“대단하군. 나도 어떻게 하는지 좀 가르쳐 주게.”

작전 회의를 마치고 세바스티안 공작이 안트라스에게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뭘 말인가?”

“루카스의 고집이야 제국 안에서도 유명하지. 황제의 명이라고 해도 잘 따르지 않기로 유명한데 자네는 마치 어린애 어르듯이 하더군.”

“실제 어린애지. 우리하고의 나이 차이를 생각하면 안 그런가?”

안트라스의 말에 세바스티안 공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도 이전의 전쟁에서 자네처럼 할 수 있었다면 아까운 전력을 셋이나 잃지 않았을 텐데….”

세바스티안 공작은 아직도 2차 이념 대립 전쟁에서의 패배에 진한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헤일리 모론 후작과 마티아스 버켈 후작의 대립을 무마하기 위해서 군을 셋으로 나눈다는 선택을 해 버린 자신은….

‘지금 생각해도 멍청하기 짝이 없었지.’

쉽게, 아니 당연하게 이길 수 있는 전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지시를 내렸던 것이었지만, 그것은 변명이 되지 않는다.

당연하게 이길 수 있다는 마음으로 전쟁에 임했던 총사령관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지는 게 당연했군.’

자괴감에 빠져 있는 세바스티안 공작은 누군가 자신의 등을 툭 두드리는 것을 느꼈다.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지난 일을 어찌하겠는가?”

친우인 안트라스가 그를 위로한 것이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

여전히 힘이 빠져 있는 친우를 보고 안트라스는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자네는 인생에 큰 유산을 남기지 않나?”

“유산이라니?”

“인간이 태어나서 자신을 뛰어넘는 제자를 남겼다면 충분히 성공한 것이지. 그렇지 않나?”

그런 안트라스의 말에 세바스티안 공작은 웃어버렸다.

“그건 그렇군. 내 제자지만 참 괴물 같은 놈이야.”

“그러게 말이야. 정말 괴물이더군.”

크리스챤 슈바이커 공작.

좀 전에 벌어진 군사 회의에 참전하지 않은 그는 중앙의 본진에 남아 있기로 되어 있었다.

이 전쟁에 투입된 제국의 마스터는 총 다섯 명.

그중에 네 명을 공격에 집중시킬 수 있었던 것은 슈바이커 공작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안트라스는 그의 실력을 확인했을 때 깜짝 놀랐다.

그 넓은 남대륙의 난세를 평정하는 과정에 수많은 무장을 봐 왔던 안트라스였다.

그가 보기에 슈바이커 공작의 무력은 보통의 마스터들과는 격이 달랐다.

‘일반 마스터의 무력을 확실하게 초월했지. 그런 경지의 무인을 또 보게 될 줄은 몰랐어.’

안트라스는 슈바이커 공작의 경지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경지에 이른 남자와 오랫동안 알고 지내왔기 때문이다.

‘설마하니, 이 대륙에서 아버님과 비슷한 경지의 인물을 보게 될 줄이야.’

안트라스를 양자로 들였던 제나라의 대장군 이명.

슈바이커 공작의 경지는 거기에 필적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감도 있었다.

‘저 정도 경지에 이른 남자가…. 과연 언제까지 싸울 수 있을까?’

안트라스는 무인이 극에 달하면 어떤 약점을 지니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긴, 나 역시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끼어든 판이다.

예정에는 없었지만 안트라스는 자신의 인생에 마지막 전쟁을 반드시 승리로 이끄리라 다짐했다.

안트라스가 전장에 합류한 효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안 걸리는군.”

“제국군의 행동이 이전보다 소극적으로 변했습니다.”

“아니, 소극적으로 변한 게 아니야. 돌출되는 빈틈이 싹 사라진 것이다.”

지크프리트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전략 지도를 노려봤다.

이제까지 몇 번이고 아군의 진형에 허술한 진지를 만들고 제국군을 유인했지만 제국군은 걸리지 않았다.

덕분에 더 이상 지크프리트가 이끌던 정예 군단이 제국군을 상대로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시기는 제국군의 후속 부대가 합류한 이후부터의 일이었다.

‘이제 확실해졌다. 지금 제국군의 수뇌부에 뛰어난 참모가 있는 거야.’

안트라스의 존재를 모르는 지크프리트였지만 이제 제국군의 참모진에 터무니없는 괴물이 있다는 것은 확신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제국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확실하게 이용해서 우리 공화국을 공격하고 있어.’

물량의 우위를 앞장세워서 전선을 넓게 활용한 제국군의 공격.

공화국의 입장에서 이건 눈뜨고 뻔히 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설령 소모도가 같다고 해도 먼저 한계에 도달하는 것은 공화국일 것이다.

지크프리트는 이걸 알았지만 딱히 대응책이 없었다.

“어쩔 수 없군. 일단 전투가 장기화되는 것을 상정하에 전략을 수정하는….”

지크프리트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대총통 각하! 급보입니다.”

전령이 급하게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게오르크 성이 무너졌습니다.”

“뭐라고?”

“그리고 테오른 성도 무너졌다고 합니다.”

뿌득….

지크프리트는 이를 갈았다.

이제 막 전투를 장기전으로 바꿔서 그림을 다시 그리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요 거점 두 개가 함락 당했다니?

“성을 공격한 병력은 누구냐? 병력 규모는?”

“게오르크 성을 공격한 것은 세바스티안 공작과 플로리안 공작이 이끄는 10만의 병력입니다.”

“테오른 성은?”

“병력 규모는 마찬가지로 10만, 이끌고 있는 사령관은 루카스 플로리안과 베이커 고담 후작이라고 합니다.”

“제국은 제국이란 말인가?”

지크프리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공화국의 남부 국경 전체를 압박할 수 있는 병력을 운용하면서 주력 공격 수단으로 10만 단위의 군단을 두 개나 만들었다.

심지어 그 두 개의 군단에 마스터를 네 명이나 배치했고 말이다.

제국이 아니면 이런 병력 운용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되면 장기전으로 몰아갈 수도 없어. 어떻게든 적의 주력을…. 아니, 그건 적이 바라는 바다.’

지크프리트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전쟁터에 항상 필요한 답을 척척 내놨던 지크프리트였지만 이번만큼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상대방의 공격은 너무 꼼꼼하고, 빈틈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되지? 어떻게….’

전략 전술이라면 누구보다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 지크프리트였다.

설마 그 자신 있는 분야에서 이렇게까지 압도당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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