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4화
“안 돼.”
밀턴은 들어보지도 않고 거부했다. 레이라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했다.
“그 방법밖에 없어요.”
“아니, 그래도 안 돼.”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반대하는 것 아닌가요?”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도 너무 위험해.”
“여기서는 공화국과 동맹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요.”
“지크프리트 그놈은 너무 위험해!”
밀턴이 기를 쓰고 반대하는 것은 이것 때문이었다.
지크프리트와의 동맹이라니?
감정적으로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냉정하게 생각해도 너무 위험했다.
동맹이라면 최소한의 믿음이 있어야 했는데 지크프리트에게는 그게 조금도 가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하죠?”
“몰라.”
밀턴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 시간을 좀 끌어야지. 나는 내일부터 아픈 걸로 할게.”
그럼 적어도 지금 당장 전쟁에 참가하는 것은 피할 수 있다.
단, 공화국이 제국에게 무너지는 것을 그대로 방관해야 하고, 그 후에는 레스터 왕국과 제국의 일대일 구도가 되어 버린다.
“고작 그게 최선이라니….”
천하의 레이라 역시도 이번만큼은 한숨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레스터 왕국의 입장이 곤란해진 것이다.
***
앤드루스 제국의 황궁.
그곳에서 길버트 황제는 누군가를 상대로 체스를 두고 있었다.
“좀 봐주면서 할 수는 없나?”
“충분히 봐주면서 하고 있습니다. 안 그랬으면 세 번은 체크 메이트를 불렀을 겁니다. 체크.”
황제는 꿍한 표정으로 비숍에게 위협 받고 있는 자신의 킹을 봤다.
이걸 피하면 다음에 상대의 룩이 움직여서 체크를 걸어올 테고 뒤로 물러서 퇴로로 움직이면 체크 메이트였다.
“졌군.”
황제가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자 대국 상대는 웃으며 말했다.
“32수. 그래도 이전보다는 조금 더 버티셨습니다.”
“끄응….”
하나도 기쁘지 않다는 표정의 길버트 황제였다.
그의 앞에 있는 대국 상대는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고 피골이 상접했다 싶을 정도로 쇠약한 노인이었다.
하지만 왜소한 몸집과 달리 그의 눈빛은 선명한 현기가 담겨 있었고,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손에는 학의 깃털을 모아서 만들어 놓은 부채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안트라스 이.
원래 제국의 평민이었지만 지금은 제국의 황제에게 은의 현자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
안트라스.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이라는 말 그 자체가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남대륙에서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난 그는 기근으로 부모를 잃었다.
그때 그의 나이가 7세였는데 놀랍게도 그는 스스로를 노예로 팔았다.
7세의 소년이 스스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고 판단을 하고 유일하게 살 수 있는 길을 택한 것이 노예로서의 삶이었다.
고작 일곱 살의 소년이 냉정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실제로 실행한다는 것부터가 비범함의 싹이 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노예가 된 안트라스 소년은 남대륙으로 팔려가고 만다.
남대륙.
그것은 미지와 야만이 판을 치는 땅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쪽 대륙에는 없는 다양한 특산품이 있기 때문에 교류를 하는 일부 상인들이 있었다.
그들에 의해서 안트라스는 남대륙에 팔려간 것이다.
처음에 안트라스를 산 것은 남대륙의 상인이었다.
그는 소년인 안트라스를 잡일 담당을 시키기 위해서 샀는데 남다른 총명함으로 금방 두각을 드러냈다.
셈하는 법과 상행위를 배운 안트라스는 즉시 상단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되었고 그는 자신이 속한 상단을 크게 일으켰다.
그의 주인은 안트라스에게 자유를 주기로 약속했지만 그 약속이 이뤄지기 전에 주인이 죽어 버리고 말았다.
평범한 노사(老死)였다.
새로운 주인이 된 것은 전 주인의 아들이었지만 그는 안트라스를 꺼려했다.
노예임에도 불구하고 유능함으로 상단을 휘어잡고 있는 안트라스가 부담스러워서 그를 팔아버리고 말았다.
팔면서 다시는 보지 않도록 최대한 멀리 팔았다.
그렇게 안트라스는 남대륙에서도 가장 멀리 있는 최남단 지역으로 팔려갔다.
그곳은 제나라라고 불리는 남대륙의 왕국이 있는 나라였다.
안트라스는 이때 알게 되었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 남대륙이라고 부르던 것은 북부의 약소국가와 미개척 지역이 전부였다.
실제로 남대륙은 자신이 살던 대륙보다 훨씬 더 크고 다양한 종족과 발전한 문화가 있었다.
최남단으로 오니 검은 머리에 연한 갈색의 피부를 가진 자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들은 일곱 개의 나라로 나눠져서 1,000년 가까이 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안트라스가 팔려간 곳은 그 일곱 나라 중에 하나였던 제나라였다.
운이 좋았던 것일까? 나빴던 것일까?
그 제나라 안에서도 안트라스가 팔려간 곳은 제나라 제일의 대장군인 이명의 집안이었다.
그때 안트라스의 나이는 18세였다.
그리고 안트라스의 총명함은 그곳에서도 바로 두각을 드러냈고 그를 눈여겨 본 이명은 안트라스에게 교육을 시켰다.
군략, 정치, 예법, 문화 등등….
안트라스를 가르치기 위해서 초빙된 교사들은 그의 총명함에 혀를 내둘렀다.
가르치는 족족 빠르게 흡수하는 그의 재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이명은 안트라스를 노예에서 해방 시키고 자신의 양자로 입적했다.
그렇게 해서 안트라스는 이 안트라스가 된 것이다.
그때의 나이가 25세였다.
정식으로 이명 대장군의 자제가 된 안트라스는 군략가로 아버지의 전쟁을 보조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안트라스의 눈부신 활약이 펼쳐졌다.
이명 장군이 이끌고 있는 군대는 패배를 몰랐고 이윽고 3년도 되지 않아서 이웃에 있던 위나라를 멸망시켰다.
1,000년이 넘게 유지되던 남대륙의 패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우연하게 흘러온 노예 소년 한 명에 의해서 말이다.
그 후에도 안트라스는 전쟁터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었고 제나라는 수나라, 초나라, 하나라를 무너트렸다.
제나라는 왕국을 넘어 제국이 되었고 제나라의 왕은 황제가 되었다.
제나라의 황제는 황위에 오르자 안트라스에게 승상의 직위를 주었다.
아무런 힘이 없던 노예 소년이 제국의 정점까지 부상한 것이다.
그야말로 눈부신 입신양명이었다.
그때 안트라스의 나이는 53세였다.
안트라스의 나이가 60이 되었을 때.
제나라는 남대륙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굳혔고 안트라스 역시 일가를 이루었다.
황제의 딸과 결혼하여 자식을 남겼으며 어느새 손자까지 봤다.
모든 것을 다 이룬 인생.
고난을 넘어서 성공을 이룬 인생.
그런 인생의 황혼기에 안트라스는 한 가지 바람을 가지게 되었다.
[고향이 그립구나.]
고향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었다.
그저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고, 항상 배가 고팠던 기억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황혼기가 되자 고향이 그리워졌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정리하고 가문의 후손들에게 뜻을 밝히고 제나라를 떠났다.
당연히 후손들은 그를 막으려고 했지만 그의 완강한 뜻을 막지는 못했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의 마지막을 고향에서 맞이하고 싶다는 노인의 의지는 생각보다 훨씬 완강한 것이었다.
결국 안트라스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를 따르는 심복들과 가솔들까지 모두 버려두고 최소한의 인솔 인원들만 고용해서 고향 길에 오른 것이다.
솔직히 위험한 길이었지만 그는 이제 와서 남은 생에 집착하지 않았다.
생에 미련을 가지기에는 그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이룬 남자였기 때문이다.
다행이 여행길에 큰 위험은 없었고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세바스티안 공작을 만났다.
그의 고향 자체가 세바스티안 공작의 영지였던 것이다.
둘의 만남은 우연하게 이뤄졌지만 서로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그리고 연령이 비슷한 두 사람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세바스티안 공작은 안트라스와 얘기를 하며 그의 뛰어남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성으로 초빙했다.
안트라스 역시 그걸 순순히 받아들였다.
인생의 말년에 고향에 도착해서 생을 마감하려고 했던 안트라스로서는 말년에 좋은 친구까지 얻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는 세바스티안 공작에서 손님으로 머물며 그와 말벗을 하며 유유하게 남은 인생을 보내고 있었다.
그의 나이가 70을 바라보던 시기의 일이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세바스티안 공작은 몇 번이고 안트라스에게 제국의 작위를 받고 국정에 나서 보라고 권했지만 안트라스는 웃으며 사양했다.
이미 제나라의 승상의 자리까지 올랐던 그였다.
권력, 명예, 부.
그 모든 것이 이제는 의미 없어져 버렸다.
이제 와서 제국의 작위를 준다고 해서 받을 리가 없었다.
세바스티안 공작 역시 그런 친구의 마음을 알고 크게 강권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세바스티안 공작이 전쟁터로 나가게 되었다.
“북부의 발랑스 왕국으로 원정을 나가게 되었네.”
“허허…. 자네 같은 노인네가 직접 나가야 할 정도로 제국에 인물이 없단 말인가?”
안트라스의 말에 세바스티안 공작은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나 같은 노인네도 충분할 정도로 제국의 힘이 넘치는 것뿐일세.”
“그럼 수고하게. 한동안 혼자서 대국이나 하고 있어야겠구만.”
그렇게 웃으며 떠나는 벗을 보며 안트라스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 대륙에 오고 나서 대륙의 정세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고 하루하루 유유하게 보내던 그였기 때문에 이 전쟁이 어떤 그림으로 끝날지는 생각도 못 했다.
그저 친구인 세바스티안 공작이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보이기에 어려운 전쟁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원정군 괴멸.
헤일리 모론 후작 사망.
마티아스 버켈 후작 사망.
라이언 카텔 후작 실종.
제국의 역사에 있어서 길이 남을 정도로 충격적인 패배였다.
세바스티안 공작이 제국에 돌아왔을 때 황제의 진노는 실로 대단했다.
만약 사령관이 세바스티안 공작이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죽음으로 그 죄를 물었을 것이다.
황제는 근신을 명했고 세바스티안 공작은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신의 영지를 반 이상 처분해서 전쟁에서 사망한 유가족에게 보상금을 지불했다.
그리고 자신의 영지로 돌아온 세바스티안 공작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부디 제국을 도와주게. 염치가 없다는 것은 알지만 부탁이네.”
자신의 친우인 안트라스에게 무릎을 꿇고 간청하는 것이었다.
안트라스는 착잡한 표정으로 세바스티안 공작을 바라봤다.
인생의 마지막에 마음이 잘 맞는 친구를 얻었다고 생각하며 하늘에 감사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에게 이런 부탁을 받으니 심히 곤란했다.
이 전에도 종종 출사(出仕)를 권유 받기는 했지만 지금 만큼 간절하지는 않았다.
“하아아…. 일어나게. 세바스티안.”
“안트라스, 나는… 나는….”
“일단 일어나게. 그리고 원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하게 말해 주게. 그래야 내가 지혜를 빌려줄 수 있을 듯싶군.”
“아아…. 미안하네 안트라스.”
세바스티안 공작의 늙은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흘렀다.
지금 안트라스는 지혜를 빌려주겠다고 했다.
그의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말한 것이다.
안트라스의 지난 인생을 알고 그가 앞으로 원하는 것이 안온한 평온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기에 세바스티안 공작은 친구에게 미안함을 감출수가 없었다.
“내가 자네한테 큰 빚을 졌네.”
“우리 사이에 뭘 그러는가? 나는 자네와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나눴다고 생각하는 몸일세. 내 남은 인생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빌려줌세.”
결국 안트라스는 이 세상의 난세에 끼어들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지크프리트도 밀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누가 알았겠는가?
제국에 이런 인물이 있다는 것을 어찌 예상이나 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