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3화
2년 후.
2차 이념 대립 전쟁이 끝나고 2년의 시간이 지났다.
결코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여기서 뜻하는 2년이라는 시간은 의미가 있었다.
왜냐하면 밀턴과 지크프리트가 주도했던 휴전 협정의 휴전 기간이 딱 2년이었기 때문이다.
보통 휴전 조약이라고 하면 최소 10년 정도는 잡아야 정상이었지만 밀턴과 지크프리트는 2년으로 만족했다.
사실, 서로가 알고 있었다.
지금 같은 국제 분위기 속에서 휴전 기간을 길게 잡아봤자 끝까지 지켜질 리가 없다.
사상의 부딪힘과 격변하는 국제 정세를 따지면 아무리 길게 잡아봐야 2년이 한계일 것이다.
그래서 둘은 기간을 고작 2년으로 제한한 것이다.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지난 2년이라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통일 공화국의 초대 대총통! 지크프리트 각하의 등장입니다!”
공화국의 국가 고위층의 경배를 한 몸에 받으며 대회의장에 등장하는 지크프리트의 발걸음에는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는 위엄이 드러났다.
지난 2년 동안 공화국의 실권을 하나둘씩 손에 넣어갔던 지크프리트는 마침내 군수권뿐만이 아니라 공화국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손에 넣었다.
이것 자체는 이미 예정된 일이었지만 놀라운 것은 그 과정에 있었다.
공화국은 애당초 코브르크 공화국과 하노버슈 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나라가 공동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두 명의 총통이 동등한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이었다.
지크프리트는 이 두 명의 총통에게서 자연스럽게 권력을 이양 받았다.
마치 당연하게 그런 수순으로 일이 진행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국면을 만들어왔다.
군부를 휘어잡고,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군부에 비해서 등한시되고 있던 행정 관료들의 위상을 이끌어주며 공화국 전체에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해갔다.
두 명의 총통이 서로 견제하며 세력을 갉아 먹어가는 사이에 지크프리트는 착실하게 자기 힘을 키워 간 것이다.
결국 지크프리트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던 페인하임 총통이 먼저 지크프리트에게 총통 직위를 제안했다.
슈하이머 총통은 처음에는 반대했다.
하지만 그가 반대한다는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자 민중과 군부의 시선이 싸늘하게 변하는 것을 보고 현실을 파악했다.
이미 공화국은 지크프리트의 손에 들어온 것이고, 자신의 시대는 끝났던 것이다.
현실을 파악한 그는 거스르는 대신 순응하며 자신의 안위라도 챙기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렇게 해서 두 명의 총통이 지크프리트에게 통일 공화국의 총통 자리를 제안했다.
지크프리트는 이 제안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고사했으며 오히려 공화국군 총사령관의 자리까지 내려놓고 일개 국민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비공식적으로 측근에게 자기 입장을 남겼는데 그 내용이 다음과 같았다.
[내가 공화국의 요직에 올랐던 것은 권력을 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야. 그저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에 동참하고 싶었기 때문일 뿐이지. 총통이라니? 나에게는 너무 주제넘어.]
공식적인 입장 발표가 아니었다.
그저 측근에게 ‘솔직한 심정’을 밝혔을 뿐이고, 그게 ‘우연히’ 세상에 밝혀졌을 뿐이다.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그렇다.
그 결과 민중과 군부는 열성적으로 지크프리트를 지지했다.
“아니, 지크프리트 각하 말고 누가 총통을 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분이 아니면 아무도 못 해!”
“제국과 맞서 싸워서 승리한 분이 어떻게 이렇게 겸손하기까지….”
“우리도 뭐라도 해야 하지 않나?”
“그래. 그래야 하고말고.”
민중들의 사이에 지크프리트를 위해서 뭐라도 해야 한다는 기류가 생겼고, 공화국 곳곳에서 시위가 발생했다.
지크프리트의 총통 취임을 바란다는 내용의 시위였다.
보통 시위라고 하면 부정적인 내용의 시위가 많이 발생하는 법인데 이건 지크프리트를 지지하는 내용의 시위였다.
군부에서는 이 시위를 진압하기는커녕 오히려 은근히 지원하기까지 했다.
공화국 전체에 걸쳐서 지크프리트가 총통 직을 사양하면 대규모 폭동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민중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결국 지크프리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총통의 자리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통일 공화국의 초대 대총통 지크프리트가 탄생한 것이다.
그야말로 완벽한 정치 공작이었다.
기존의 권력자였던 두 명의 총통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고, 세상의 민심을 다 얻은 것이다.
후세의 역사가들조차도 지크프리트가 이 상황을 노렸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단, 지크프리트 스스로는 지금의 그림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예상대로라면, 지금과 공화국 3국의 통일과 함께 북부 지역 전체를 아우르고 있어야 했는데.’
지크프리트의 계획에 먹칠을 한 것은 레스터 왕국의 밀턴 포레스트였다.
밀턴 때문에 힐데스 공화국이 멸망당했고, 무리하게 손을 써서 바하슈텐 총통을 죽여야 했다.
밀턴 때문에 스트라부스 서부 지역을 빼앗겼고 레스터 왕국이라는 강력한 적국과 북부의 세력 구도를 양분해야 했다.
밀턴 때문에 발랑스 왕국을 완전히 집어삼켜서 제국을 공략할 발판으로 만드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모든 것이 예정대로 흘러가는 듯했지만 레스터 왕국의 밀턴 포레스트 때문에 지크프리트의 계획은 크게 틀어진 것이다.
‘제국보다 먼저 처리해야 할 것은, 밀턴 포레스트. 네놈부터다.’
공화국의 대총통의 자리에 오른 지크프리트는 일단 국정의 안정에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준비가 다 되는대로 레스터 왕국을 향한 전면 공세를 펼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대총통 각하! 급보입니다.”
“무슨 일인가?”
갑자기 달려온 전령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서려 있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지크프리트에게 보고했다.
“앤드루스 제국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내용은?”
이 타이밍에 제국의 서신이라면 불길한 예감밖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선전 포고입니다.”
제국이 공화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레스터 왕국과의 휴전 협정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쉽게 안 풀리는군.’
지크프리트의 표정이 굳어지기에는 충분한 일이었다.
제국의 선전 포고.
이것 자체는 어느 정도 예정된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늦었다고 할 수 있었다.
2차 이념 대립 전쟁에서 제국은 큰 패배를 겪었다.
그야말로 제국의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치욕적인 패배가 아닐 수 없었다.
오죽하면 대륙에서는 제국에 대한 위상이 너무 과대평가되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평화에 나태해진 제국보다는 치열한 전쟁을 겪으며 단련된 공화국과 레스터 왕국이 더 강할지도 모른다는 평가였다.
치욕, 오욕, 굴욕.
제국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보다 더한 수치는 없었다.
당연히 제국에서는 공화국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 여론이 생겼다.
제국의 귀족들은 물론이고 일반 평민들까지 공화국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국의 위신에 금이 가면서 당장 제후국의 태도부터가 애매해졌으니 결코 간과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제국의 현 황제인 길버트 테레 앤드루스 황제는 움직이지 않았다.
제국의 역사에 남을 정도로 치욕스런 패배를 겪고도 묵묵부답으로 참는 황제를 보며 제국의 안에서는 현 황제에 대한 실망감을 토로하는 여론도 생겼다.
그러나 2년이 지나자 제국은 바로 공화국에게 선전 포고를 했다.
왜 2년을 기다려야 했을까?
공화국은 물론이고 제국의 내부 인사들 역시 그 점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의미를 가장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던 인물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레스터 왕국의 레이라 여왕이다.
“제국의 공격에 맞춰서 우리 역시 공화국을 공격하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여왕 전하.”
제국의 사신이 레스터 왕국의 대전에서 레이라와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그 내용인즉, 레스터 왕국과 공화국의 휴전 기간이 끝났으니 제국의 공격에 맞춰서 공화국을 공격하라는 내용이었다.
“지금 당장 답을 주기는 어렵군.”
“무엇이 어렵습니까? 레스터 왕국으로서는 공화국의 멸망은 바라는 바가 아닙니까?”
제국의 사신이 대답을 독촉하자 레이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본인이 레스터 왕국의 왕이긴 하나, 이 나라의 군사 통수권은 나의 부군이신 포레스트 대공께서 담당하고 있다. 짐의 독단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다.”
“알겠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일단 기다리도록 하지요.”
레이라가 단호하게 말하며 자기 입장을 밝히자 제국의 사신도 일단 한 발짝 물러났다.
다만 그는 물러나면서도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는 가능하면 빠른 대답을 바라신다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제국의 사신은 물러났다.
그리고 레이라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상황이 복잡해졌군.”
그리고 그녀는 바로 밀턴을 불러서 상황을 설명했다.
“제국과의 합공이라…. 잘만 하면 이번 기회에 공화국을 멸망시켜 버릴 수 있겠군.”
“그렇죠. 당신이 가장 싫어하는 지크프리트도 이번 기회에 죽여 버릴 수 있을 테고요.”
“그래. 그렇겠지.”
위협이 되는 공화국을 멸망시킬 기회가 왔음에도 밀턴과 레이라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이 둘의 표정이 안 좋은 이유는 딱 하나였다.
“제국이 과연 공화국에서 멈출까?”
밀턴의 물음에 레이라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대륙 통일이라는 위업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과연 참을 수 있을까요?”
“그렇겠지.”
밀턴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화국을 멸망시킬 찬스가 찾아왔음에도 망설일 수밖에 없는 것은 제국에 대한 신뢰도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레스터 왕국과 제국이 손을 잡고 공화국을 공격한다면 공화국은 아마 멸망할 것이다.
지크프리트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서쪽의 레스터 왕국과 남쪽의 제국을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다.
틀림없이 공화국은 끝장날 것이다.
다만, 그 후에 제국은 과연 어떻게 할까?
공화국을 멸망시켰으니 이제 거기에 만족하고 물러날까?
그럴 리가 없다.
공화국의 영토를 병합한다면 그 시점에서 제국은 대륙의 7할을 지배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나머지 3할.
즉, 레스터 왕국에 욕심이 안 날 리가 없다.
거기다 공화국의 전쟁에 레스터 왕국의 힘을 소모시킨다면 제국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손쉽게 레스터 왕국을 쓰러트릴 수 있다.
호랑이 한 마리가 있다.
그 호랑이가 사는 산에 표범이 두 마리 사는데 이놈들이 영 거슬린다.
다만, 이 표범을 상대하면 이기기는 이겨도 멀쩡하게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할까?
먼저 표범 한 마리를 포섭해서 다른 한 마리를 먼저 죽이게 한다.
그리고 나머지 한 마리의 상처가 낫기도 전에 공격을 한다면?
아주 쉽게 자기 영역에 홀로 군림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게 지금 제국이 그리는 그림이었다.
밀턴과 레이라가 생각하기에는 최악이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서 두려웠다.
“일단 대답을 미뤄 두기는 했어요. 하지만….”
“언제까지 미룰 수는 없겠지.”
밀턴은 짜증이 난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다 지크프리트 놈이 너무 설쳐서 그래. 제길, 발랑스 왕국이라도 온전하게 남겨 뒀으면 완충 지대이자 삼대 세력의 균형추로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밀턴은 이 상황이 두려웠다.
섣불리 판단을 내리기에는 판이 너무 커져 버렸다.
2차 이념 대립 전쟁이 발랑스 왕국이라는 먹잇감을 두고 서로 한 입이라도 더 먹기 위해서 벌인 먹잇감 쟁탈전이라면….
이번에 벌어지는 전쟁은 그야말로 패권을 다투는 전쟁이다.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고, 끝장을 볼 때까지 계속해서 지속될지도 모른다.
‘지구의 역사를 보면 100년씩 이어진 전쟁도 있지. 여기라고 안 그러리라는 법은 없어.’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지는 밀턴이었다.
그때 레이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