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1화
정치적 감각이 떨어지는 바이올렛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보는 아니었다.
밀턴이나 레이라 여왕이 매일매일 전쟁을 대비해서 국정을 운영하는 것을 보고 있는데 어찌 모르겠는가?
그녀는 생각했다.
레이라 여왕은 말 그대로 훌륭한 여왕이다.
밀턴에게 대공이라는 직위를 주고 자신과 같은 위치를 허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교묘한 정치적 감각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훌륭하게 국정을 운영했다.
그녀의 존재가 있기에 밀턴은 안심하고 군사적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소피아 역시 대단했다.
대공비라는 직책과는 별개로 그녀는 건축 토목에 관해서 대단한 재능을 보유하고 있었다.
레스터 왕국의 국토가 넓어지고 새로운 유통망과 거점 도시가 필요해졌을 때마다 소피아는 최소한의 예산으로 최대한의 결과를 내놓았다.
대공비의 업무가 원래 이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녀의 재능은 뛰어났다.
또, 그 뛰어난 재능은 레스터 왕국과 밀턴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바이올렛은 생각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지?’
바이올렛은 정치적 감각이 전무하다.
밀턴의 능력치에 보면 그녀의 지력은 30이고 정치는 20이다.
내정 쪽으로 도움을 주는 건 글렀다는 말이다.
결국 그녀에게 남은 길은 하나뿐이었다.
검(劍).
플로렌스 공국 시절에는 형제들의 악의로 인해서 의도치 않게 쥐었던 검이었다.
그 후에는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지켜내기 위해서 반강제로 토벌과 전쟁터에 내몰아지며 휘둘러야 했던 검이었다.
스스로에게 자문했다.
검을 좋아하는가?
‘아니야. 그렇지 않아.’
검에 천재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는 그녀였지만 자질과 별개로 그녀의 마음은 검을 꺼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검을 시작한 계기부터 검을 쥐고 활동해온 활동 전부가 그녀의 개인적인 의지를 철저하게 배제하고 강제적인 환경 속에서 행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이중인격이라는 정신적 장애까지 겪어야 했다.
그녀는 검이 싫었다.
전쟁도 싫었고, 적이라고 해도 상대를 죽이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결국 검밖에 없어.’
좋고 싫고를 떠나서 그녀가 밀턴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검이 필요했다.
결국 밀턴이 없는 사이 그녀는 다시 검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예전과는 마음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검을 잡았던 공주 시절과 달리 지금은 스스로 검을 잡았다.
그 마음가짐의 차이가 결과로 나타났다.
그녀는 밀턴이 없는 사이에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지금 아이를 가지면 전쟁터에 나갈 수 없어요. 언제 또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나만 행복해질 수는 없어요.”
바이올렛의 말을 들으며 밀턴은 착잡한 기분이었다.
국가에 마스터라는 전력이 더해졌다.
이것 자체는 기쁜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아내가 여자로서의 행복을 포기하고 대신 전쟁터에서 도움이 되겠다는 의도로 다시 검을 잡았다는 것이 너무 미안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검을 놓으라고 할 수도 없었다.
아직 이 세상에 전란은 끝나지 않았고, 전쟁은 반드시 또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국가에 유효한 전략적 인재를 자신의 아내라는 이유로 제외시킬 수는 없었다.
개인과 공무의 엇갈림 속에서 괴로워하는 밀턴의 심정을 알고 바이올렛은 은은하게 웃으며 말했다.
“난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괜찮아요.”
“바이올렛.”
“당신이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고 언젠가 전쟁이 없는 세상이 온다면…. 그때는 나도 당신의 아이를 낳게 해 주세요.”
“반드시, 당신이 내 아이를 낳는 날이 올 거야.”
바이올렛의 마음에 밀턴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을 했다.
그리고 반드시 이 약속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전쟁을 끝내고 돌아온 밀턴은 내정 활동에 여념이 없었다.
사실, 대부분의 국가 내정은 레이라 여왕이 도맡아서 하고 있었지만 밀턴이 직접 해야 할 일도 있었다.
레스터 왕국의 주요 경제 활동인 해양 무역부터 시작해서 대공령의 관리까지 할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은 밀턴이 벌인 일의 뒷수습이었다.
북부의 민란을 잠재우는 과정 속에서 밀턴은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폭탄을 뿌렸다.
덕분에 북부의 폭동은 막을 수 있었지만 반대로 이제는 귀족들이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도대체 뭘까요?”
“기본 이념은 신분에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하고 누구에게나 국정에 참여할 권리를 준다. 라고 되어 있더군요.”
“허허…. 그거 혹시 공화주의하고….”
“어허. 말을 조심합시다.”
“크흠….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귀족들은 민주주의라는 사상에 관해서 상당한 불편함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대놓고 왕실에 항의를 한다거나 하는 미친 인간은 없었다.
지금 레스터 왕국은 그 어느 때보다 왕가의 힘이 강한 시기다.
밀턴이 군사력과 경제력을 장악하고 있고, 레이라 여왕은 중앙 정치계를 완전히 장악해서 국가의 사법권을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거기다 백성들의 지지도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그 어떤 귀족도 감히 왕실을 거스른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오히려 왕실에서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이라고 해야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불안감은 점점 커져갔고 이제는 왕실에서도 미리미리 진화를 해두지 않으면 이 불씨가 어찌 될지 모를 정도였다.
그래서 레이라 여왕은 신년 회의에서 승부를 보기로 했다.
새해가 시작하는 신년 회의에는 레스터 왕국의 모든 귀족들이 모여서 국왕에게 인사를 한다.
거기서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발표하고 본격적으로 국가에 도입할 것을 선포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하는 김에 귀족들의 불만도 잠재우고 말이다.
“괜찮겠어? 아무리 지금 귀족들이 죽어지낸다고 해도 이걸 그냥 넘어갈 것 같지는 않은데?”
밀턴은 레이라와 함께 티타임을 가지며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괜찮아요. 왕권이 지금같이 강력한 시기라면 귀족들한테 내일부터 손에 장갑 대신 신발을 끼고 다니라고 해도 군말 없이 동의할 거예요.”
“그거야…. 그렇겠지.”
밀턴도 그 점에 관해서는 동의했다.
레스터 왕국의 역사에서 왕가의 권력이 이렇게 강했던 시기는 또 없었다.
레스터 왕국의 시조왕이 나라를 건설했던 건국 초기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권력, 군사력, 자금력, 명성까지….
지금 레스터 왕국에서 귀족들이 왕가보다 앞서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정치적으로 왕실을 견제할 수단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레이라 여왕은 그런 상황을 이용해서 밀턴이 주장했던 민주주의를 실행할 생각이었다.
‘뭐, 그대로 시행하는 건 무리겠지만 말이야.’
레이라는 민주주의를 자기 취향대로 어느 정도 뜯어 고쳐둔 상태였다.
그건 밀턴도 몰랐지만 말이다.
왕실에서 준비한 신년회가 시작되었다.
“호오…. 올해도 무척 호화롭군요.”
“그렇게 말입니다. 과거와 비교하면 연회의 규모가 정말 커졌어요.”
“그만큼 나라가 부강해졌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그렇습니다.”
레스터 왕국이 약소국일 때부터 있었던 귀족들은 신년회의 규모가 커진 것을 보고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연회장은 황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고 은은하게 흐르는 음악은 100명이 넘는 오케스트라의 연주였다.
술은 대륙 각지의 명주를 모아 놓았고 음식 역시 귀족들이라고 해도 평소 먹어보기 힘든 진귀한 음식들이 산재했다.
“어머? 이 검은색의 케이크는 뭐죠?”
한 귀족 영애가 검은색 케이크를 보고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옆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젊은 귀족 한 명이 끼어들었다.
“호오…. 이건 진귀한 것이군요.”
“롱드란 백작님. 이걸 아시나요?”
“예. 이 향기는 초콜릿을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남대륙에 난다고 하는 카카오라는 열매를 가공해서 만든다고 하더군요.”
“어머? 남대륙의 과실을 가공한 건가요?”
“예. 이 열매는 정신을 각성시키고 피로를 덜어준다고 해서 귀한 취급을 받고 있지요.”
“백작님은 정말 박식하시군요.”
“하하…. 아름다운 레이디 앞에서는 항상 혀가 매끄러워지는 법이죠.”
이런 식으로 남들이 모르는 지식을 교양처럼 뽐내며 여자 꼬시기에 여념이 없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연회의 분위기는 부드럽고 온화하게 흘러갔다.
“레스터 왕국의 지배자. 레이라 폰 레스터 여왕님께서 납십니다.”
그런 와중에 레이라가 등장했다.
평소 과한 장식을 꺼리는 그녀였지만 이 연회에는 제대로 꾸민 차림을 하고 나타났다.
하얀 드레스에 진주 가루로 장식을 하고 요소요소에 붉은 루비로 포인트를 주었다.
머리는 부드럽게 틀어 올리고 화려한 장식품을 걸치고 등장했다.
그녀의 몸을 치장하고 있는 보석의 숫자가 백을 넘어갈 정도였고 그 보석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귀족 가문에서도 구입하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대단한 물건들이었다.
이렇게 화려한 치장을 하면 과해서 천박하거나 촌스럽다는 느낌을 줄 수 있지만 레이라 여왕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아무리 화려하게 꾸민다고 해도 그녀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아름다움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이라 여왕이 등장한 다음….
“왕국의 보물이자 위대한 영웅. 포레스트 대공 전하께서 납십니다.”
시종의 소개와 함께 밀턴 역시 등장했다.
밀턴은 흰색 셔츠에 검은색 슈트를 입고 등장했다.
“어머? 대공 전하의 저 옷은 뭐죠?”
“처음 보는 거지만…. 멋있네요. 깔끔하고 매력적이에요.”
“체형이 말끔하게 정돈되는 느낌이네요.”
여인들은 밀턴이 입고 온 슈트를 보고 수근거렸다.
그리고 남자들 역시 밀턴의 모습을 보고 은근히 감탄하는 모습을 보였다.
“괜찮아 보이는군요.”
“어디 디자이너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저도 주문해야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밀턴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통했어.’
사실 밀턴은 전부터 이 세계의 남자들이 입는 옷을 불편해 했다.
다리에 착 달라붙은 레깅스도 싫었고, 과하게 어깨를 부풀리는 장식도 싫었다.
거기다 깃털 달린 모자를 쓰고 멋지게 수염을 기르면 그게 귀족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멋쟁이었다.
현대인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밀턴에게 있어서는 참 받아들이기 힘든 센스였다.
그래서 공적인 자리에서는 대부분 귀족의 복장보다는 기사 정복을 입고 기사의 복장을 했었다.
그게 레깅스보다는 좀 나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사 복장을 할 수 없는 자리였기 때문에 아예 슈트를 만들어 버렸다.
특이한 옷을 입었다고 비웃음을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지금 밀턴의 인지도나 위치를 생각하면 몸빼바지를 입어도 유행할 것이다.
그렇게 밀턴과 레이라가 등장하고 그 뒤를 따라서 다른 왕가의 가족들도 모두 등장했다.
소피아가 어린 월리엄을 안고 등장했고 바이올렛이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 등장했다.
엘리자베스는 연한 분홍색의 드레스를 입었는데 연회장의 한가운데를 아장아장 걷는 모습은 너무 사랑스러웠다.
“어머, 귀엽기도 하셔라.”
“어쩜 저렇게 귀여우실까요? 마치 천사가 내려온 것 같아요.”
“여왕 전하를 닮았으니 크면 틀림없이 대륙을 들었다 놨다 하는 미인이 되시겠죠?”
그런 부인들의 칭찬에 밀턴은 뿌듯했다.
‘내 딸이 귀엽긴 귀엽지.’
왕가의 일행이 모두 자리에 착석하자 신년회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우선 레이라가 왕가를 대표해서 신년사를 발표했다.
“항상 나라를 잘 지탱해준 그대들에게 감사를 표하오. 올해도 모두 맡은 바 최선을 다해서 백성들을 잘 보살피고 국가의 발전에 최선을 다하기 바라오.”
그렇게 가벼운 발표가 끝나고 귀족들의 박수가 나왔다.
엘리자베스는 박수에 살짝 놀랐다가 분위기상 자기도 따라해야 할 것 같은지 엄마한테 박수를 쳤다.
‘귀여워!’
‘너무 귀여워! 인형 같아!’
‘집에 데려가고 싶어.’
그런 엘리자베스의 귀여움이 또 귀부인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