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9화
밀턴은 즉시 말에서 내려 아내들에게 인사했다.
“돌아왔소. 보다시피 사지 멀쩡하게 말이지.”
밀턴은 레이라 여왕을 시작으로 소피아, 바이올렛을 한 번씩 안아주고 가벼운 키스를 해 주었다.
그리고 부끄러운지 우물쭈물거리고 있는 엘리자베스를 번쩍 들어 안으며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엘리자베스. 아빠 얼굴은 안 잊어 버렸니?”
이번보다 살짝 무거워진 아이를 보니 자신이 없는 동안 많이 자랐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녀 오셨어요. 아바마마.”
밀턴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은 엘리자베스가 뚜렷하게 말을 했다는 것이다.
“베스. 너…. 말을 하는구나.”
“많이 놀랐죠?”
“하…. 하하하….”
밀턴이 전쟁터에서 싸우는 동안 엘리자베스는 말문이 트였다.
이전에는 옹알이밖에 못했는데 이제 뚜렷하게 말을 하는 딸을 보니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날의 서프라이즈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피곤하시겠지만, 꼭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성안으로 들어간 밀턴에게 소피아가 가장 먼저 보여준 것은 시녀들에게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있는 아기였다.
이 왕궁 안에서 시녀들에게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있는 아기.
그리고 출진 전에 소피아의 해산일이 얼마 남지 않았던 것까지 생각할 때….
이 아기가 누군지는 뻔했다.
“이 아이가 내 아들이라고?”
“예. 다음 포레스트 대공가의 후계자에요. 이름은 아직 없지만요.”
“…….”
멍하니 굳어 있는 밀턴에게 소피아가 아이를 조심스럽게 안아서 내밀었다.
“한 번 안아주세요.”
밀턴은 조심스럽게 아이를 받아서 안았다.
‘이 아이가 내 아들이구나.’
레이라 여왕과의 약속대로라면 이 아이의 성은 레스터가 아니라 포레스트가 된다.
즉, 밀턴 다음으로 포레스트 대공이라는 이름을 이어받을 후계자라는 말이다.
작은 손을 쉬지 않고 꼬물꼬물거리며 하품을 하는 아기를 보고 있으니 밀턴은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전쟁터에서 질리도록 서로 죽고 죽이는 멍청한 짓만 하다가 이렇게 자신의 피붙이를 품에 안고 있으니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잘 알 수 있었다.
‘전쟁 영웅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그냥 이렇게 작은 행복만 있으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데….’
진한 미련과 아쉬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밀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시대는 격동하기 시작했고, 밀턴은 이 시대의 혼돈 한가운데 있다.
예전처럼 은수저 라이프 어쩌고 하는 것은 이제 차마 바랄수도 없었다.
어떻게든 이 시대에 끝장을 보지 않고는 밀턴이 바라는 평온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적어도 너에게 물려주지는 않으마.’
밀턴이 아기를 품에 안고 할 수 있는 맹세는 이게 최대한의 것이었다.
월리엄 포레스트.
아들에게 밀턴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월리엄. 좋은 이름이네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야.”
소피아의 미소를 보며 밀턴도 마주 웃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동생에게 다가가서 헤헤 웃으며 말했다.
“월리엄. 헤헤….”
그런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보고 밀턴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동생을 좋아하나 봐?”
“예. 많이 예뻐하라고 계속 말하고 있거든요.”
“다행이야. 그 부분은 많이 신경써줘. 아이들이 계속 사이좋게 자랐으면 하니까.”
“예. 걱정 마세요.”
“그 점은 확실하게 할게요.”
밀턴의 말은 진지했고 그 말을 듣는 아내들 역시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소피아를 제외하고 레이라 여왕이나 바이올렛은 왕족으로 태어났다.
그러니 왕족에게 있어서 형제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같은 피가 흐르는 경쟁자.
이 세상에 역사가 깊은 왕족 중에 골육상쟁이 벌어지지 않은 왕족이 하나라도 있을까?
지금은 천진한 아이들이지만 성장하고 권력에 욕심을 내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몇 세대가 흐른 후라면 어찌 될지 몰라도 자신들의 바로 다음 세대에서 그런 비극이 일어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레이라 여왕이 왕가와 대공가의 분리라는 안전장치를 달기는 했으나 그래도 미래는 모르는 일이다.
지금이야 포레스트 대공가와 레스터 왕가가 완벽하게 호흡을 맞춰 가며 나라를 운영하고 있지만, 원래 왕이라는 자리는 자기 옆에 동등한 누군가를 용납하기 어려운 법이다.
훗날에는 왕가와 대공가가 서로 반목하며 적대할 수도 있는 법이다.
‘아무래도 거기까지는 책임질 수 없지만 말이야.’
그러기 위해서도 아이들은 최대한 사이좋게 지내도록 해야 했다.
밀턴은 영웅이다.
전쟁터에서 불패의 신화를 자랑하는 살아 있는-진 적 있지만 레스터 왕국의 국민들은 그냥 이렇게 우긴다-전설.
국토를 몇 배로 넓히고 국력을 신장시킨 위대한 군주다.
사람들은 밀턴에게 환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일상이 어떨지 몹시도 궁금해 했다.
그리고 위대한 포레스트 대공의 일상은….
“싫어! 안 먹어!”
“야채도 먹어야지 베스야. 응?”
딸의 편식 투쟁을 달래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전쟁에 복귀한 아버지를 보고 엘리자베스는 처음에는 어색해 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어렴풋하게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께한 시간이 늘어나면서 어색함이 사라지고 아버지와 굉장히 친밀해졌다.
단, 그 친밀함이 약간의 부작용을 불러왔는데 그게 뭐냐 하면….
“야채 싫어. 안 먹어!”
“그러지 말고 먹어야지. 베스야….”
아빠를 굉장히 만만하게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공주님이다.
하지만 귀하게 자라는 공주님이라고 해도 모든 응석이 용서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왕족의 아이는 어려서부터 엄격한 예의범절과 교육을 받는 게 보통이다.
특히 레이라는 자신의 딸이라고 해도 마냥 좋다고 응석을 받아줄 여인이 아니었다.
소피아와 바이올렛은 그런 레이라의 교육 방침에 잘 협조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를 무척 사랑해주고 예뻐해 주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교육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밀턴의 경우는 달랐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오니 귀여운 딸이 말문이 트였고 한층 더 귀여워졌다.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하는 부탁마다 전부 들어주었다.
해 달라고 하는 것 다 해주고 가지고 싶다고 하는 건 다 가져다주었더니….
“헤헤헤…. 아빠 좋아.”
엘리자베스는 급격하게 밀턴과 친해졌다.
그리고 자신이 무슨 실수를 해도 아빠가 용서한다는 사실을 알자 이 영특한 공주님은 아이답게 거기에 무한정 기대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밀턴은 만만한 아빠로 찍혀 버린 것이고, 그 결과가 지금의 상황이다.
“안 먹어! 야채 싫어! 으아아아앙!”
마침내 일국의 공주님이 야채 먹기 싫다고 바닥에 드러누워 버리는 일까지 생겨 버린 것이다.
밀턴은 그런 딸을 보고 또 쩔쩔매기 시작했다.
울고불고 땡깡 부리는 딸내미는 어떤 의미로는 지크프리트 이상의 강적이었다.
“베스야. 그러면 못써요.”
다른 쪽에서 식사를 하던 소피아가 곤란한 표정으로 밀턴을 도와주려고 했지만….
“놔두세요. 소피아.”
레이라가 그런 소피아의 행동을 제지했다.
“여왕님. 하지만….”
“놔두세요. 이것도 모두 교육이니까요.”
소피아는 그러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리에 앉았다.
여기서 레이라가 말하는 교육의 대상이 어린 딸 한 명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도 알았다.
레이라는 이번 기회에 딸을 대하는 밀턴의 무른 태도도 교정을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어디 실컷 해 보라지.’
딸을 귀여워하는 것이야 이해를 하지만 밀턴처럼 오냐오냐하다가는 엘리자베스의 인성이 망쳐질 것 같았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밀턴의 태도까지 같이 교정하려는 것이다.
전쟁 같은 식사 시간이 끝났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당당하게 자신의 접시 위에 야채를 남기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식후에 나온 케이크를 맛있게 먹고 정원으로 나갔다.
“아빠, 밀어 줘.”
그리고 정원에 만들어진 그네에 올라타고 밀턴에게 밀어 달라고 말했다.
“그래. 알았어.”
명색의 마스터인 밀턴인데 그네 좀 밀어 주는 게 힘들까?
원하면 하루 종일이라도 밀어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부우우우웅!”
“꺄아아아아아아!!”
시녀들이 조심조심 밀어 줄 때와는 전혀 다른 다이내믹함에 엘리자베스는 좋다고 웃음이 터졌다.
“꽉 잡아 베스야. 360도 회전 들어간다!”
“꺄아아아아!”
그리고 좋다는 딸의 반응에 밀턴은 신이 나서 점점 더 격하게 그네를 밀었다.
이 그네를 설계했던 소피아가 보기에 그네가 버틸 수 있을지 불안할 정도로 격하게 말이다.
“아아…. 저러다 다치면….”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소피아와 바이올렛은 부녀의 기행을 보고 불안해했다.
“내버려 둬요. 명색이 마스터인데 위험할 것 같으면 받아 주겠죠.”
하지만 정작 친어머니인 레이라는 한가롭게 차를 들며 차분한 태도를 보였다.
실컷 놀고 나면 뭘 해야 할까?
정원에서 뛰어놀고 흙투성이가 되었으니 이제 씻어야 한다.
“베스야. 이제 간식 먹을 시간이야.”
“간식 좋아.”
“그래. 그럼 간식 먹기 전에 깨끗하게 씻고 먹자.”
밀턴은 나름 논리적으로 접근해서 씻어야 한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나름 논리적으로 일국의 국왕도 논파해본 적 있는 밀턴이었다.
하지만….
“씻는 거 싫어.”
논리가 안 통하는 애한테는 아무 소용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씻기 싫다고 단호하게 팔짱을 끼고 자신을 방어했다.
그러자 밀턴은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베스야. 하지만 안 씻으면 간식을 못 먹는데? 오늘 간식은 베스가 좋아하는 딸기 아이스크림인데?”
“아이스크림 좋아. 베스 먹을래.”
“그럼 씻고 먹을까?”
“안 씻어.”
순간 밀턴은 머릿속에서 뭔가 빠직하며 끊어질랑 말랑 하는 느낌이 들었다.
딸은 사랑스럽다.
너무너무 사랑스러워서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는 말이 진짜 실감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그거랑 별개로….
‘꿀밤 한 대만 때리고 싶…. 아니 아니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부성애와는 별개로 육아는 필연적으로 스트레스를 불러오는 법이다.
안 씻기고 흙투성이로 간식을 집어 먹으면 분명 위생상 좋지 않다.
딸을 위해서라면 씻겨야 한다.
그런데 딸 본인은 안 씻겠다고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다.
이 모순적인 상황에서 짜증이 나는 건 모든 부모들의 공감대일 것이다.
“베스야. 씻고 먹자. 응.”
“싫어. 안 씻어.”
“그럼 간식은 못 먹는데?”
“으…. 으으….”
베스는 앙증맞은 손으로 치마를 꼭 쥐고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어쩔래? 베스야? 간식 안 먹을 거야?”
밀턴은 양자택일의 선택지 속에서 딸이 자발적으로 씻는다는 선택지를 고르게 유도했다.
그러나….
“으으…. 으아아앙!”
어디 애들이 어른 마음대로 된다던가?
결국 울음이 터져 버리는 베스였다.
바닥에 주정앉아서 짧은 양다리로 바닥을 밀어내며 세상 서럽다는 듯이 엉엉 울었다.
“아아아아앙! 아빠 미워! 으아아앙!”
“아니, 베스야. 내가 뭘 어쨌다고….”
“으아아앙! 미워. 절로 가!”
밀턴이 베스를 안아서 달래려고 했지만 삐진 베스는 바둥거리면서 밀턴에게 안기는 것도 거부했다.
그렇게 쩔쩔매는 밀턴을 보며 레이라 여왕이 속으로 생각했다.
‘슬슬 한계겠네.’
그리고 그녀는 밀턴을 보고 슬쩍 말했다.
“제가 할까요?”
그녀의 한마디에 밀턴은 눈물이 날것처럼 고마웠다.
“아…. 뭐, 도와주면 고맙긴 한데….”
하지만 육아에 무능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아집 때문에 괜히 강한 척을 하는 밀턴이었다.
“필요 없다면 됐고요.”
“아니. 필요해. 제발 도와 줘.”
그런 아집과 허풍은 단번에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