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208화 (208/257)

제208화

‘사실 이런 건 나보다 레이라가 더 잘하는 건데 말이야.’

밀턴은 지크프리트가 제시한 조건을 다 파악한 후에 생각에 잠겼다.

레이라의 부재가 몹시 아쉬웠지만 여기서는 밀턴이 주도해서 상황을 결정해야 했다.

‘이 조건을 수용하면서 우리가 뭘 더 얻어낼 수 있을까?’

정치는 밀턴의 특기가 아니다.

아주 못하는 건 아니지만 고수라고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내가 도입한 정책들 대부분은 지구에서 사용해서 효과를 봤던 것들의 재탕이었을 뿐이니 말이야. 아 잠깐….’

밀턴의 머릿속을 슬쩍 스치고 지나가는 뭔가가 있었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후에 밀턴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휴전의 조건으로 내 쪽에서도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게 뭐지?”

“이산가족의 만남을 추진하고 싶다.”

“뭐라고?”

“구 힐데스 공화국의 백성들 사이에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고 떨어진 자들이 상당히 있다고 알고 있다. 그들이 가족과 만나도록 돕고 싶다는 말이다.”

“…….”

“또, 희망자에 한해서 일가족의 귀화를 허락했으면 한다.”

“…너무 뜬금없군.”

“전쟁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서 생사도 알 수 없게 된 이들이다. 그냥 방치하는 건 인도적으로 비정하다 생각하지 않나?”

“…….”

밀턴의 말에 지크프리트는 무거운 표정으로 침묵했다.

“이 테이블은 전후 처리를 위해서 모인 자리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그 화제는 전후 처리와는 다소 무관계해 보이는군.”

“그렇다면 거부하는 건가?”

“…….”

밀턴이 태연하게 말했고 지크프리트는 다시 굳은 얼굴을 하고 침묵을 지켰다.

달변가이기도 한 지크프리트가 이렇게 말문이 막히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가 궁지에 몰렸다는 말이다.

그런 지크프리트의 침묵 속에서 밀턴은 오히려 확신을 얻었다.

‘역시 내 생각대로야. 이건 한 방 먹일 수 있는 건수다.’

밀턴은 희미한 미소를 띠고 지크프리트에게 말했다.

“왜 그러지?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 미소를 보며 지크프리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개자식.’

뒤에 있는 제이크와 제롬은 이해를 못하고 있었지만 지크프리트는 지금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이산가족의 만남을 주선하고 희망자에 한해서 국가 귀화조차 허락하는 행위.

밀턴이 한 제시는 이 전쟁과는 별 관계없어 보였지만 태연하게 지크프리트의 살점을 도려내는 행위였다.

힐데스 공화국 출신의 이산가족이라고 해도 양쪽의 입장은 많이 다르다.

지크프리트 쪽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이 젊은 남자들로 스트라부스 왕국 공격에 참여했던 정규군이었다.

거기에 비해서 밀턴 쪽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이 민간인이었다.

양쪽이 만나서 서로 함께하고자 한다면 귀화를 해야 하는데….

과연 어느 쪽으로 무게가 많이 실릴까?

뻔한 일이다.

군사 출신에게 있어서 지금의 레스터 왕국 북부는 원래 그들이 살던 고향이다.

그들의 눈앞에 다시는 못 만날 거라고 생각했던 가족이 있다.

전쟁터를 전전하던 병사들에게 있어서 고향과 가족만큼 그리운 것이 또 있을까?

과연 가족을 눈앞에 두고서 다시 이상을 위해 전쟁터로 향하는 것이 가능할까?

공화국 병사들의 정신 무장 상태를 봤을 때 아주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한 이탈자가 나올 것이 분명했다.

설령 귀화의 비율이 5대5라고 해도 지크프리트에게 손해인 상황인데, 그 상황 자체가 엄청나게 불리한 것이다.

힐데스 공화국 출신의 공화국군 병사들은 지크프리트에 대해서 절대적인 충성심을 가지고 있으며 오랫동안 훈련 받고 무수한 실전을 거친 정예 병력이다.

그런 병력이 이산가족과의 만남으로 인해서 대거 이탈하면 어떻게 될까?

공화국군 총사령관이라는 자리에 취임하기는 했지만 그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자기 명령에 복종하는 군사력이 필요하다.

고스트가 지크프리트의 친위대라면 힐데스 공화국 출신의 병사들은 지크프리트의 실질적인 사병력인 것이다.

그 병력이 줄어든다는 것은 지크프리트의 실질적인 군사 기반이 약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크프리트 입장에서는 밀턴이 어찌 곱게 보이겠는가?

무엇보다 가장 미치고 환장할 일은….

‘이걸 함부로 거절할 수가 없다는 거야.’

그렇다.

지크프리트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조건을 절대 거절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만약 지크프리트가 밀턴의 조건을 거절하면 어떻게 할까?

뻔한 일이다.

레스터 왕국은 물론이고 공화국 안에까지 들리도록 소문을 낼 것이다.

[나는 이별의 아픔을 겪은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만남의 장을 가질 것을 제시했지만 지크프리트가 거절했다.]

[가족 간 생이별의 아픔을 간직한 이들이여. 미안하다. 최선을 다했지만 내 힘이 부족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지크프리트 때문임을 이해해 다오.]

‘이런 식으로 선전하겠지. 빌어먹을 자식.’

지크프리트는 오랜만에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렸다.

밀턴이 내민 제의는 인체에 무해한듯하지만 분명 독이 들어 있다.

다만, 이 독을 안 마실 수가 없는 상황이다.

만약 이 조건을 거절하고 밀턴이 인심 조작을 했을 때 과연 병사들을 다독일 수 있을까?

‘힘들어. 고스트도 아니고 일개 병사들의 인심까지 완벽하게 장악하는 건 무리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이럴 때 짜증이 난다.

외통수에 몰렸는데 그게 외통수라는 것을 너무 빠르게 파악해 버린 것이다.

‘주군께서 왜 저러시는 거지?’

‘분위기를 봐서는 주군께서 한 제의가 공화국에 치명적인 손해를 불러오는 걸까?’

다만 제롬과 제이크처럼 자세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이들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어쩔 수 없다. 감수하는 수밖에….’

결국 지크프리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뜻하지 않게 생이별한 가족들에게 좋은 기회가 되겠군. 수락하도록 하지.”

“다행이군.”

밀턴은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생각했다.

‘됐다. 이 괴물 단지 자식한테 정치적으로 한 방 먹였어.’

이산가족을 이용한 것 같아서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회심의 한 수였다.

이산가족을 이용해서 지크프리트의 군사적 기반을 갉아먹은 절묘한 한 수.

레이라 여왕이라고 해도 쉽게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절묘한 계획이었다.

물론 밀턴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전생의 기억 덕분이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에서 살았던 것이 도움이 될 줄이야.’

그 후의 회담은 잘 흘러갔다.

지크프리트는 자신이 노리던 대로 발랑스 왕국의 북부 영토를 병합했고 밀턴은 발랑스 왕국에 전쟁에 참여한 대가로써 서부 지역을 받았다.

이로서 공화국의 영토와 레스터 왕국의 영토는 좀 더 넓어졌고, 발랑스 왕국의 국토는 전쟁 전에 비하면 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니콜라스 국왕은 가장 죽을 맛이었지만 밀턴과 지크프리트가 내린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이었지만 지금 같은 난세의 국제 사회에서는 명분보다는 실질적인 국가의 힘이 더 중요한 법이다.

밀턴과 지크프리트가 모든 조건을 정하고 니콜라스 국왕은 그저 거기에 사인을 하는 게 다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밀턴과 지크프리트가 발랑스 왕국의 명맥만큼은 남겨 뒀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지만 말이다.

‘아직은 발랑스 왕국을 멸망시킬 때가 아니야.’

‘발랑스 왕국이 사라지면 제국과 국경을 마주해야 하지. 제국이 공화국만 적대한다는 보장은 없어.’

제국과 국경을 마주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발랑스 왕국을 남겨두고 일종의 완충 장치로 삼은 것이다.

비록 이번 전쟁에서 제국이 형편없는 모습을 보이며 패했다고 하지만 밀턴도 지크프리트도 제국을 얕잡아 보지는 않았다.

제국이 작정하고 이 전쟁에 끼어들기 전에 먼저 전쟁을 끝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럼 이만 가지. 휴전 조항은 최대한 성실하게 이행하기를 바란다.”

“내가 할 말이야. 만약 어긴다면 다시 전쟁터에서 만나야 할 거다.”

“훗, 과연 지킨다고 안 그럴까?”

지크프리트의 한마디에 밀턴은 쓰게 웃으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지크프리트와는 전쟁터에서 결착을 짓게 될 것이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돌아간다. 제이크!”

“옛!”

지크프리트가 먼저 제이크와 돌아가고 니콜라스 국왕이 밀턴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크흠…. 포레스트 대공.”

“무슨 용무라도 있소?”

“전쟁이 끝났으니 축승회를 열 생각입니다. 부디 참석하셔서 자리를 빛내 주지 않겠습니까?”

니콜라스 국왕의 말에 밀턴은 어이가 없었다.

‘축승회? 진심인가?’

자국의 영토 3분의 2 이상이 뜯어먹힌 전쟁이다.

그런데 축승회를 열겠다니?

‘정신 차리려면 멀었군. 아니, 이런 인간은 정신 못 차릴 거야.’

이쯤 되면 발랑스 왕국의 국민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밀턴은 냉정한 표정으로 니콜라스 국왕에게 말했다.

“연회는 필요 없소. 우리는 바로 돌아가겠소.”

“하지만….”

“본국을 오랫동안 비워 둘 수는 없소. 그보다 약속한 토지의 반환을 서둘러 주시오.”

“예. 그거야 물론….”

“한 달 안에 해당 지역의 영주들을 물려주시오. 그리고 그 과정에 영지민을 강제로 이동시키는 일은 없기 바라오.”

“예. 최대한 주의하겠습니다.”

“주의 정도로는 부족하지.”

“예?”

“영주들이 토지를 떠나는 과정에서 강제로 영지민을 이주시키거나 재산을 강탈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나라를 향한 적대 행위로 간주하겠소.”

“적대 행위? 그…. 그건 너무 확대 해석하는 것 아니오.”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하지만….”

“내 의사는 확실하게 표명했소. 부디 성실한 이행을 바라겠소. 귀국을 위해서라도….”

밀턴은 니콜라스 국왕의 등줄기가 서늘해질 협박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자. 제롬.”

“옛. 주군.”

그렇게 밀턴이 떠나가고 회담의 자리에 홀로 남은 니콜라스 국왕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도. 살았어. 일단은… 그게 가장 중요하지.”

밀턴의 생각한 대로다.

니콜라스 국왕은 죽었다 깨어나도 정신 차리지 않을 것이다.

개선(凱旋).

승리자를 향한 찬가이자 전쟁의 영광이다.

하지만 보통 개선이라고 하면 나라에서 백성들을 강제적으로 동원해서 만들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밀턴의 경우는 달랐다.

“와아아!! 저기 오셨다!”

“포레스트 대공 전하!”

“여기 좀 보세요! 대공 전하!”

“레스터 왕국의 군신!”

“왕국에 영원한 영광 있으라!!”

자발적으로 나와서 밀턴에게 꽃을 뿌리고 환호성을 지르는 백성들 중에 강제로 동원된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대로를 통제하고 선을 넘어오지 못하게 병사들이 애를 써서 막아야 할 정도였다.

이 모든 것은 밀턴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

꿈 많은 소년들은 어느 날 갑자기 포레스트 대공이 우연히 자신을 만나고 자신의 뛰어난 재능을 알아본 후에 운명적으로 기사가 되고 훗날 전쟁터에서 활약하는 꿈을 꿨다.

그리고 꿈 많은 소녀들은 어느 날 갑자기 포레스트 대공을 우연히 만나고 그가 자신에게 한눈에 반해서 아름다운 사랑이 꽃피는 그런 꿈을 꿨다.

물론 그 꿈속에서의 밀턴은 실물보다 더 잘생긴 밀턴이었다.

요점은 그만큼 밀턴이 레스터 왕국 안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 말이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원래 대륙 북서국의 약소국이었던 레스터 왕국이 이제는 대륙의 패권을 다투는 전쟁에서 대활약을 할 정도로 강력해졌다.

이게 누구 때문인지는 네 살 먹은 어린애라도 알 수 있었다.

모두 밀턴 덕분이었다.

밀턴이 전쟁터에 나가서 국토를 확장하고 해상 무역으로 재정을 확보함으로 인해서 레스터 왕국은 강대국으로 부상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레이라 여왕의 훌륭한 국정 운영도 한몫을 했다.

그 결과 나라의 위상이 올라가고 백성들의 삶의 질도 눈에 띄게 올라갔다.

그러니 어찌 인기가 없겠는가?

지금 레스터 왕국 안에서는 누가 밀턴의 욕이라도 하면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입성한 밀턴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수고했어요. 여보.”

“수고하셨어요.”

“승전을 경하드립니다.”

사랑하는 아내들과 딸 엘리자베스였다.

아내들이 우아하게 인사를 하고 엘리자베스는 오랜만에 보는 아빠가 부끄러운지 레이라 여왕의 치맛자락 뒤에 숨어서 빼꼼 고개만 내밀고 있었다.

밀턴은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며 자연스런 미소가 맺혔다.

‘돌아왔구나.’

화려한 개선식을 받는 것보다 가족을 만나는 것이 훨씬 더 집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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