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7화
레스터 왕국의 승리.
지크프리트가 제국을 물리쳤고 그 지크프리트를 밀턴이 이겼다.
이쯤 되면 밀턴이 지크프리트의 천적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메이치 성에서 승전을 거둔 밀턴도 무리해서 지크프리트를 추적하지는 못했다.
그 이유로는 세 가지나 있었다.
첫째로 이 전쟁은 레스터 왕국의 전쟁이 아니다.
발랑스 왕국 안에서 공화국을 완전히 몰아내봐야 밀턴이나 레스터 왕국에서 이득이 될 일은 없었다.
그리고 둘째로 대외적으로 천적이니 뭐니 해도 밀턴 스스로가 지크프리트를 상대로 무리하게 전쟁을 지속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번째.
이것은 밀턴도, 그리고 전쟁의 귀재인 지크프리트도 미처 짐작하지 못한 이유였는데….
레스터 왕국의 북동부 국경 지대에 일어난 변수가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후퇴! 후퇴하라!”
“공작님을 모셔라!”
북부 기사단의 기사들은 사색이 되어서 군을 물렸다.
그들이 안간힘을 써서 후방으로 후송하고 있는 것은 피투성이로 엉망이 되어 있는 페일런 공작이었다.
놀랍게도 레스터 왕국의 수호신이라고 불리던 페일런 공작이 당한 것이다.
북부 기사단 중의 한 명은 페일런 공작을 이 꼴로 만든 남자를 보며 이를 갈았다.
“저 괴물….”
함정에 빠졌다거나 책략에 당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당당하게 일기토를 벌였고, 그 결과 페일런 공작이 반죽음 상태가 된 것이다.
북부 기사단이 조금만 늦게 끼어들었다면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
페일런 공작을 무너트린 남자는 검을 앞으로 겨누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진군하라.”
“오오오오오오오오!!”
순간 천지를 진동시키는 함성과 함께 공화국군 병사들이 맹렬하게 전진했다.
그건 지크프리트가 공화국 병사들을 고양시킬 때와 비슷한 수준의 사기였다.
페일런 공작을 일대일로 물리칠 수 있는 무력.
지크프리트 수준의 카리스마.
공화국에 이 두 가지를 겸비하고 있는 인물은 딱 한 명뿐이다.
코브르크 공화국의 바론.
공화국이 보유하고 있는 마스터 중 한 명이고 오랜 시간 동안 코브르크 공화국의 수호신으로 존재해온 남자다.
그를 설명하자면 딱 한마디로 충분하다.
공화국 최강.
이 말에 가장 어울리는 남자가 바로 이 남자인 것이다.
“바론 대장이 나섰다고?”
바론이 나섰다는 말에 가장 놀란 것은 지크프리트였다.
“예. 그리고 레스터 왕국군의 페일런 공작을 박살냈다고 합니다.”
상기된 표정으로 보고하는 전령의 말에 지크프리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천만다행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건가? 이걸로 밀턴 포레스트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겠지.’
코브르크 공화국의 바론.
그가 움직일 것이라고는 지크프리트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총통 바로 밑의 대장이라는 직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외적인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인물이다.
코브르크 공화국의 총통의 명령도 잘 따르지 않았고, 당연히 지크프리트의 명령에도 따르지 않고 있었다.
몇 번이고 호출을 해 봤지만 그저 무시로 일관할 뿐이었다.
엄밀히 말해서 이건 하극상.
좀 더 좋게 본다고 해도 명령을 무시하는 태업이었다.
하지만 바론을 상대로 섣불리 손을 쓰는 것은 지크프리트로서도 꺼려지는 일이었다.
바론은 그냥 마스터가 아니라 공화국의 최강자로 이름을 날리며 그 존재감이 강렬한 인물이었다.
밀턴이 전쟁에 끼어들 시기에 스트라부스 왕국에는 마스터가 세 명이었지만….
30년 전에는 무려 다섯 명의 마스터가 있었다.
그 다섯 명의 마스터가 맹위를 떨치며 공화국을 맹공격하던 그 시기가 스트라부스 왕국의 군사적 전성기라고 할 수도 있었다.
스트라부스 왕국의 맹공격에 공화국은 점점 열세로 몰려갔고 위기감도 심각해졌다.
그때 코브르크 공화국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바로 바론이었다.
그는 전쟁터에서 맹활약을 하며 스트라부스 왕국의 다섯 마스터 전부와 검을 겨뤘다.
그 결과, 다섯 명 중에서 네 명의 목이 날아갔다.
전부 바론이 한 일이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데릭 브란스 공작 역시 처절한 패배를 겪고 간신히 목숨만 건졌었다.
비록 그 후에 맥카시 오브라이언과 라이언 카텔이라는 인물들이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며 스트라부스 왕국은 다시 세 명의 마스터를 갖추게 되었지만 결국 공화국을 압도할 전력은 갖추지 못했다.
그렇게 바론은 위기 속에서 공화국을 구한 영웅으로 등극했고 총통 바로 밑의 직위인 대장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 후에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은둔한 상태였던 것이다.
지크프리트가 아무리 떠오르는 공화국의 신성이라고 해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더 바론과 반목할 수는 없었다.
딱히 파벌을 만들지 않는다고 해도 공화국 내에서 바론을 따르는 젊은 장교들은 잔뜩 있었다.
지크프리트가 바론과 반목한다면 그건 필연적으로 군부의 분열을 불러올 수 있었다.
그렇기에 바론이 노골적으로 지크프리트를 무시해도 그냥 내버려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바론이 자신을 도운 것이다.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더 이상 레스터 왕국에서는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워 졌다는 것이다.
그걸 알리기라도 하듯이 전령이 다급하게 달려와서 말했다.
“총사령관님. 레스터 왕국에서 사신이 찾아왔습니다.”
“휴전 제의인가?”
“예. 그렇습니다.”
“후우우….”
지크프리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발랑스 왕국에서 벌어진 이 전쟁은 훗날 2차 이념 대립 전쟁으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이 2차 이념 대립 전쟁을 애매하게 봉합한 것은 큰 실수였다.
왜냐하면 이것 때문에 이후에 발생하는 3차 이념 대립 전쟁에서는 훨씬 더 많은 피가 흘렀기 때문이다.
밀턴과 지크프리트는 다시 만났다.
다만, 이번에는 서로 검을 겨누고 대지에 피를 흘리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다.
휴전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서 칼 대신에 펜을 들고 서로 중립 지대에서 만났다.
“다시 만나게 됐군. 지크프리트.”
“그래. 유감스럽게도 다시 만나고 말았어.”
서로에게 하는 인사는 언뜻 보면 평범한 듯싶지만 말 속에는 굵은 뼈가 있었다.
전쟁터에서 치열하게 서로의 목숨을 노렸지만 결국에는 살아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을 유감스러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밀턴의 뒤편에 있는 제롬과 지크프리트의 뒤편에 있는 제이크 역시 서로를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날카로운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크흠…. 크흠….”
바로 니콜라스 테론 발랑스 국왕이었다.
아무리 구제할 길이 없을 정도로 망해 가는 나라의 무능한 왕이라고 해도, 일단 이 나라의 왕이다.
발랑스 왕국에서 벌어진 전쟁에 관한 휴전 협정에서 빼놓을 수는 없기 때문에 데리고 온 것이다.
“크흠…. 큼….”
그렇다고 해도 기껏 할 수 있는 것은 헛기침이나 하며 자신이 여기 있으니 신경 좀 써 달라고 호소하는 것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말이다.
지크프리트와 말없이 노려보던 밀턴은 지크프리트에게 말했다.
“일단 자리에 앉지.”
“좋다.”
양측은 사전에 준비해둔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지크프리트 쪽에서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휴전의 대가로 우리 공화국의 요구 조건을 적은 서류다. 확인해 보도록.”
밀턴은 그 서류를 확인해 보더니 눈썹을 꿈틀거렸다.
- 1. 공화국이 현재 점령한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할 것.
2. 공화국에 귀순할 의지가 있는 민중들의 이동을 억제하지 말 것.
3. 전쟁 배상금으로 향후 3년에 걸쳐서 500만 골드를 지불할 것.
이 세 가지 말고도 여러 가지 조건이 있었지만 하나같이 무리한 요구들뿐이었다.
누가 이 서류만 본다면 공화국이 대승을 거둔 승전국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사람 호구 취급하는 건가?’
밀턴은 자신이 확인한 서류를 니콜라스 국왕에게도 보여줬다.
그리고 니콜라스 국왕은 서류의 내용을 확인하더니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윽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크게 외쳤다.
“이런 조건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소!”
니콜라스 국왕이 강경하게 외쳤지만 지크프리트는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밀턴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밀턴 역시 니콜라스 국왕은 신경도 쓰지 않고 머릿속으로 레스터 왕국의 입장만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우리는 발랑스 왕국의 서부 지역만 병합할 수 있으면 되기는 한데….’
레스터 왕국이 이번에 노렸던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문제는 이대로 지크프리트가 원하는 대로 넘어가 주기에는 많이 찝찝하다는 것이다.
어차피 이 휴전 협정의 진의는 발랑스 왕국이라는 먹잇감을 갈라서 자기 몫을 챙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대로 지크프리트의 조건을 받아들이면 공화국이 레스터 왕국보다 훨씬 더 많은 몫을 챙겨가게 된다.
‘그 꼴은 용납할 수 없지.’
밀턴은 지크프리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이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다.”
“당연한 말이오.”
옆에서 니콜라스 국왕이 한마디 거들었지만 별 의미는 없었다.
지크프리트는 의자 뒤에 몸을 기대고 느슨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그쪽에서 요구하는 조건은 뭐지?”
“점령한 토지를 모두 반환하고 물러나라. 당연히 백성들의 이주도 인정하지 않겠다. 전쟁 배상금 역시 지불 못 해.”
밀턴의 말은 지크프리트의 조건에 완전히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거기에 우리가 납득할 거라고 생각하나?”
“납득 못 하면? 이대로 다시 붙어 볼까?”
“괜찮겠나? 바론 대장이 너희 나라 본토를 완전히 밟아 버릴 텐데?”
지크프리트의 말에 밀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안 그래도 본토에서 페일런 공작이 중상을 입고 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밀턴이었다.
그것 때문에 이 이상 전쟁을 지속하기는 어려워졌다.
지크프리트와 싸워서 이길지 말지는 둘째치고, 다시 전쟁이 벌어지면 절대 단기간에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본국을 오랫동안 비워 둬야 하는데….
공화국의 바론이라는 거물이 움직이기 시작한 지금 그렇게 하기에는 부담이 컸다.
하지만 그건 밀턴의 속사정이고, 그걸 협상의 테이블에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상관없으니 한번 해보지 그래?”
“호오…. 무슨 자신감이지?”
“바로 최근에 네놈을 반죽음으로 만들어 놓고 생긴 자신감?”
밀턴의 도발에 지크프리트보다 그 뒤편에 있는 제이크가 눈을 부라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자신의 주군을 모독한 밀턴을 베어 버릴 것처럼 살기가 흘러넘쳤다.
그러자 제롬이 반 발짝 앞으로 나서며 제이크에게 말했다.
“허튼수작 부리지 마라.”
“허튼수작인지 아닌지 시험해 볼 테냐?”
제이크는 여차하면 이 자리에서 밀턴이나 제롬을 다 베어 버리겠다는 듯이 말했다.
그 기세는 진짜 같았지만 밀턴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허세다.’
서로가 변변한 호위도 없이 단 네 명이서 만나기로 한 것은 서로간의 무력이 팽팽하기 때문이었다.
니콜라스 국왕은 없는 셈 친다고 해도 이 회담에 있는 사람들 네 명이 모두 마스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같은 마스터라고 해도 지크프리트는 지금 부상 중이다.
말끔하게 차려 입고 최대한 감추고 있기는 하지만 밀턴과 제롬에게 합공을 당하면서 입은 부상이 벌써 다 나았을 리가 없다.
‘어느 정도는 나았겠지만 여기서 자기 목숨을 담보로 도박을 할 정도는 아니야.’
밀턴은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있기에 겉으로 태연함을 유지했다.
그저 지크프리트의 눈을 똑바로 직시하는 밀턴은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
“…….”
둘은 말없이 서로를 노려봤다.
먼저 시선을 피하면 지는 것처럼 지그시 교차하는 시선 속에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역시 만만한 인간은 아니지.’
결국 지크프리트가 먼저 가벼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서로 무리한 요구만 계속해서 이 회담을 파토 내기에는 기껏 마련한 자리가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걸 아는 놈이 처음부터 시비에 가까울 정도로 무리한 요구를 하나?”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니 시도는 해본 거지.”
지크프리트는 다시 한번 품 안에서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거기에 적힌 내용을 확인하니 이전보다는 훨씬 더 완화된 내용이 적혀 있었다.
- 1. 발랑스 왕국 북부와 북동부 지역을 공화국의 영토로 인정할 것.
2. 공화국으로 이미 귀순한 국민들의 가족에게 이주의 자유를 줄 것.
전쟁 배상금에 대한 조항은 사라졌고, 그 외에 자잘한 조건도 많이 완화되었다.
‘어차피 북부와 북동부는 우리가 관리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미 공화국에 귀순한 백성들을 강제로 가족과 갈라놔서 이산가족으로 만들어 봐야 우리가 악역이 될 뿐이지.’
이 정도라면 아주 못 들어줄 조건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