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5화
‘어느 쪽이든 지금에 와서야 결과가 같으니 별문제 없지만 말이야.’
지크프리트가 그렇게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것을 보고 밀턴이 말했다.
“치사하게 마스터 둘이서 협공을 하다니? 자존심도 없나?”
“자존심으로 전쟁하는 건 아니지.”
“비겁하다는 생각도 없고?”
“물론.”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이때 밀턴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그 모습에 지크프리트는 순간 심장이 철렁해졌다.
‘뭐지? 이 국면을 뒤집을 한 수가 있다는 건가?’
불안해하는 지크프리트에게 밀턴이 말했다.
“네가 먼저 말한 거다.”
그리고 밀턴이 신호를 보내자 뿔피리 소리가 크게 전쟁에 울렸다.
뿌우우우우우.
넓게 퍼진 그 신호에 따라서 성벽 위의 첨탑에서는 붉은 깃발이 올라갔다.
그러자….
“전군 전진! 목표는 지크프리트다.”
“와아아아아아아!!!”
제롬 테이커가 한 무리의 기마 부대를 이끌고 공화국의 뒤편에서 나타났다.
“말도 안 돼….”
지크프리트는 순간 패닉에 빠졌다.
어째서 후방에서 일군이 나타났지?
어째서 저 일군을 이끌고 있는 게 제롬 테이커지?
“어떻게…. 크윽!”
패닉에 빠져 있던 지크프리트는 매섭게 날아드는 밀턴의 일격에 황급하게 반응했다.
지크프리트가 뒤로 크게 휘청거리자 그 틈을 타서 밀턴이 타고 있던 레너드가 상대편 말의 목을 덥석 물었다.
“웃? 야. 너 뭐 하려고….”
말에 타고 있던 밀턴도 깜짝 놀란 돌발 행동이었다.
상대편 말은 마치 사자한테 목덜미라도 물린 것처럼 애처롭게 울부짖었다.
푸히이이잉!
그리고 레너드는 자기가 마치 육식 동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상대 말의 목을 물고 그대로 휘둘러 버렸다.
“말도 안 돼.”
쿠우웅!
지크프리트는 날아가는 와중에 어이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말의 무게에 자신이 타고 있고 갑옷의 무게까지 합하면 대략 400킬로그램은 넘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집어 던지다니?
“저 괴물 같은 말….”
다행이 깔리기 전에 재빨리 착지한 지크프리트는 밀턴이 타고 있는 말을 보고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동감이야.”
그리고 레너드의 등에 타고 있는 밀턴 역시 어이없다는 표정은 똑같았다.
디스트로이종의 말들이 보통 말보다 피지컬이 좋은 건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레너드는 그런 디스트로종의 말들 중에서도 탁월한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에 어떤 말이 상대 말을 물어서 집어 던진단 말인가?
“어쨌든 잘됐지. 이제 네놈이 섣불리 도망가기는 힘들어졌으니 말이야.”
밀턴은 자신도 말에서 내려서 지크프리트를 향해서 검을 겨눴다.
레너드가 아무리 뛰어난 명마라고 해도 마스터의 신체 능력에 제대로 반응해 주기는 힘들다.
아까운 애마를 잃어 버리느니 밀턴이 스스로 지면에 내려오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지크프리트 놈이 퇴각 수단을 잃어버린 것만으로도 충분해.’
제롬은 공화국 병력을 뒤에서 치기 위해서 저기 있는 게 아니다.
분명 최단거리로 공화국의 병력을 돌파해서 여기로 올 것이다.
‘그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돼.’
밀턴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지크프리트가 이를 악물고 외쳤다.
“어떻게 제롬 테이커가 저기에 있는 거냐? 어떻게?”
“알아서 뭐 하게?”
밀턴은 말할 것도 없다는 듯이 바로 지크프리트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다시 맹렬하게 검을 겨루며 생각했다.
‘너는 생각도 못 할 거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무리수는 말이야.’
메이치 성에 먼저 도착한 밀턴은 성의 상태를 보고 생각했다.
성의 상태가 이 정도로 괜찮으면 수성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단, 그건 적이 평범한 수준일 때의 일이야.’
적은 지크프리트.
밀턴이 스스로 인정하는 한 수 위의 상대였다.
솔직히 무슨 짓을 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과연 내가 지크프리트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까?’
수성이라는 유리함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밀턴은 불안했다.
지크프리트라는 인간의 역량을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있는 밀턴이기에 결코 방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밀턴은 결심했다.
‘수성전과 별개로, 하나의 보험을 들어두자.’
라고 말이다.
그리고 밀턴은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제롬 테이커를 불러서 명령했다.
“지금 즉시 남부 기사단원 일부와 기마병 1,000명을 이끌고 메이치 성을 떠나라.”
“예?”
되물어보는 제롬에게 밀턴이 말을 이었다.
“이 성을 나서서 크게 우회한 다음 공화국의 배후를 점거하라는 말이다.”
“적의 보급을 끊으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것도 하지 마.”
“…….”
“그저 존재감을 죽이고 철저하게 매복해 있어라.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마.”
밀턴의 명령에 제롬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주군, 죄송하지만 명령의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의도라…. 사실 터무니없는 뻘짓이라서 설명하기도 뭐한데.”
밀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제롬에게 솔직한 속내를 밝혔다.
다른 부하들이라면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꺼려졌지만 제롬의 충성심을 생각하면 속내를 드러내 보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의도를 다 들은 제롬은….
“주군이 패하셨을 때를 대비한 한 수로 대기하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말이야.”
“…….”
제롬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밀턴에게 말했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뭐가 말이지?”
“지금 주군께서는 이 전쟁이 당연하게 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수행하시는 듯합니다.”
순간 밀턴은 뜨끔했다.
제롬의 말은 밀턴의 약한 마음을 제대로 지적했기 때문이다.
“어떤 장수라고 해도 전쟁에 앞서서 부담감을 가지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죠. 하지만 주군께서는 지금 당연하게 패배한다는 전제하에 작전을 짜고 계십니다.”
“…그렇지.”
밀턴이 인정을 하자 제롬은 조금이지만 화가 난 표정을 하고 말했다.
“주군께서는 적이 두려우십니까?”
“맞아.”
밀턴은 순순하게 인정해 버렸다.
그리고 제롬을 보며 말했다.
“제롬, 네가 보기에 지크프리트와 나 둘 중에 누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당연히 주군이십니다.”
제롬의 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하지만 밀턴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지크프리트 그놈이 나보다 더 뛰어나다.”
그러자 제롬은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주군께서는 몇 번이고 지크프리트를 상대로 승리하신 경험이 있지 않으십니까?”
현재까지 전쟁터에서 지크프리트를 상대로 유일하게 승리를 거둔 사람이 바로 밀턴이다.
덕분에 지크프리트가 이름을 날리면 날릴수록 거기에 비례해서 밀턴 포레스트라는 이름도 더욱더 크고 선명하게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세간의 평가가 어떻든 간에 밀턴은 거기에 현혹되지 않고 냉정하게 현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지크프리트는 나보다 뛰어난 인재야. 이건 인정 안 할 수가 없어.”
“하지만 주군….”
“생각해 봐. 내가 놈에게 이겼을 때의 상황 대부분은 외부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거나 놈이 미처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야.”
“그건 전쟁이라면 당연히 감수해야 할 변수입니다.”
“알아. 하지만 순수한 역량을 논할 때 내가 지크프리트 놈보다 위에 있다는 생각은 역시 들지 않아. 자네도 기억하지? 리트인크 공성전에서 우리가 어떻게 됐었는지?”
“…….”
밀턴의 말에 제롬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대답하지 못했다.
리트인크 공성전.
밀턴이 지크프리트에게 참패한 전장이었고, 그때 밀턴은 거의 죽다가 살았다.
제롬이 결사의 분투로 어찌어찌 버텼고 바이올렛이 적절한 타이밍에 구원군으로 왔기에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도망쳤던 굴욕의 전장이었다.
“그게 실력의 차이라는 거야. 지크프리트 놈은 나를 손바닥 위에 올려다 놓을 정도의 지략이 있지. 그리고 반대로 나는 놈이 뭘 할지 짐작도 할 수 없어. 기량의 차이가 현격하다는 거지.”
“…….”
제롬은 여전히 인정할 수 없다는 표정을 했지만 그래도 반박을 할 말이 딱히 없었다.
리트인크 공성전의 굴욕은 제롬에게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패전의 굴욕이었다.
그때….
“하지만, 이길 수단이 아주 없느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야.”
밀턴의 말이 바뀌었다.
겸손을 넘어서 패배를 상정하고 말을 하던 밀턴의 말에서 일말의 자신감이 드러났다.
“판을 짜 놓고 거기서 수를 겨루면 이길 수 없다. 놈의 수준이 나보다 높기 때문이지. 하지만, 애당초 판의 밖에 한 수를 숨겨 놓는다면 어떨까?”
“판의 밖에 말입니까?”
“그래. 생각해 보면, 내가 놈에게 이긴 경우는 대부분 그런 경우였어. 릭과 토미가 북부의 동토를 횡단해서 힐데스 공화국 본토에 분란을 일으키거나 하는 형식의 공작으로 놈을 어지럽게 했지.”
“과연, 그러셨죠.”
“전쟁이라는 반상 위에서 지크프리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야. 그러니, 나는 판을 그 이상으로 벌린다. 제롬, 너는 나의 숨겨진 한 수가 되어야 해.”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만약 전쟁이 끝날 때까지 우리가 유리하다면 너는 그저 대기만 하고 있으면 된다. 하지만 만약 우리에게 위기가 오거나 다른 문제가 생기면 너는 다른 것은 다 집어치우고 딱 하나에만 집중하도록.”
“그 하나가 뜻하는 것은….”
“지크프리트의 목이다.”
제롬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신호가 떨어지면 앞뒤 가릴 것 없이 최단거리로 노리도록. 할 수 있겠나?”
“예.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그리고 제롬은 릭과 토미를 비롯해서 남부 기사단의 일부분을 이끌고 1,000의 병력과 함께 조용히 사라졌다.
밀턴의 말대로 이 메이치 성 전투라는 판에서는 슬쩍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공화국의 뒤편에 슬그머니 자리를 잡고 대기했다.
사실 공화국이 한창 공성에 집중하고 있을 때 뒤를 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롬은 기다렸다.
먹이를 노리고 기척을 지운 호랑이처럼 얌전하게 웅크리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크프리트가 스스로를 미끼로 써서 고스트와 떨어졌다는 것을 확인한 밀턴이 바로 신호를 보내자 웅크리고 있던 호랑이가 단숨에 박차고 일어난 것이다.
“레스터 왕국의 제롬 테이커가 여기에 있다!”
최정예 남부 기사단을 이끌고 제롬은 지크프리트가 있는 곳으로 일직선으로 달려갔다.
‘위험해. 진짜 위험하다.’
지크프리트는 이를 악물었다.
밀턴이 쉴 틈 없이 공격을 하고 있기에 생각할 틈도 없었지만 그래도 지크프리트는 쉬지 않고 생각했다.
원래 그의 계획대로라면 성벽 위를 정리한 제이크가 이미 내려와서 자신과 함께 밀턴을 합공해야 했다.
하지만 성벽의 안쪽에서는 소란스런 전투의 소음은 들릴지언정 아직 제이크가 등장하지는 못했다.
“방어벽을 5중으로 만들어라. 성문을 철저하게 막아라! 반드시 여기서 적들을 막아야 한다!”
‘저놈이 원인인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철벽 부대를 지휘하는 숀을 보고 지크프리트는 이를 악물었다.
이러는 중에도 자신의 뒤편에서는 제롬 테이커가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눈앞에 있는 밀턴 포레스트를 상대하며 뒤에 달려드는 제롬 테이커까지 같이 상대하면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1분? 아니면 3분?’
아무리 생각해도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위기가 닥치기 전에 밀턴의 목을 쳐야 했다.
“죽어라. 밀턴 포레스트!”
“너나 죽어!”
지크프리트가 결사의 각오로 달려들었고 밀턴도 망설이지 않고 그 검을 받았다.
지크프리트가 제롬에게 압박을 받고 있는 것처럼 밀턴 역시 뒤편에서 제이크가 언제 올지 모를 압박을 받고 있다.
숀이 철벽 부대를 철저하게 지휘해서 좁은 성문의 지형을 살려 막아주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계속 버틸 수 있다는 보장은 없어.’
결국 시간의 승부다.
자신의 오른팔 중에 누가 먼저 도착하느냐?
이것이 관건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그 전에 밀턴이나 지크프리트 스스로가 적의 목을 칠 수 있다면 그게 최고의 결과였고 말이다.
그런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이 현장에 먼저 도착한 것은….
“죽기 싫거든 비켜라! 내가 제롬 테이커다!”
밀턴의 오른팔인 제롬이었다.
“제롬!”
밀턴이 반갑게 이름을 부르자 거기에 화답하듯이 제롬이 말에서 훌쩍 점프했다.
그리고 중간에 걸리적거리는 공화국 병사 한 명의 머리를 밟아서 뭉개더니…
콰직!
“합!”
힘찬 소리와 함께 그 탄력으로 다시 한번 높게 뛰어 올랐다.
그리고 다시 지면으로 떨어지는 제롬의 검은 정확하게 일직선의 궤도를 허공에 그으며 지크프리트의 정수리를 노렸다.
“크윽….”
위기를 느낀 지크프리트는 즉각적으로 몸을 날려 제롬의 일격을 피했다.
콰아앙!
제롬의 일격은 지면에 거대한 검흔을 남기고 지크프리트를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공격을 피한 지크프리트는 멀쩡하지 않았다.
“으음….”
제롬의 일격을 피한 지크프리트의 허벅지에는 제법 깊은 검상이 남아 있었다.
“아쉽군. 아주 다리를 잘라 버리려 했는데 말이야.”
그 상처를 만든 건 당연힌 밀턴이었다.
제롬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빈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일격을 먹였다.
제롬은 빠르게 밀턴의 상태를 확인했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물론, 그보다 급한 일부터 먼저 처리하지.”
“예. 알겠습니다.”
밀턴이 말하는 급한 일이 뭔지는 새삼 말할 것도 없었다.
밀턴과 제롬의 시선이 동시에 상처 입은 지크프리트에게 닿았다.
그 둘의 시선을 받으며 지크프리트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진짜 죽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