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1화
“밀턴 포레스트가 직접 성벽 위에서 날뛰고 있다고 합니다.”
“자세한 상황은?”
“성벽 위에서 아군이 고전하고 있습니다. 운제 역시 반 이상 파손되고 있습니다.”
“빠르게 대응하는군. 사다리가 파괴된 운제는 현장에서 즉시 수리하라. 적을 쉬게 해서는 안 된다.”
“예. 알겠습니다.”
지크프리트의 명령을 받은 공화국 병사들은 부지런하게 사다리를 머리에 이고 날랐다.
공화국의 운제는 밀턴이 만든 것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개량된 것이다.
그중의 하나가 사다리를 일체화시키지 않고 하나의 부품처럼 끼워서 사용한다는 것이다.
전투 중에 적에게 가장 먼저 공격당하고 파손되는 부분이다 보니 궁리를 한 것이다.
아무리 튼튼하게 만들어도 사다리는 결국 한계가 있다.
차라리 부서져도 바로 갈아 끼울 수 있는 여분의 부품을 준비하고 현장에서 바로 갈아 끼우는 식으로 개량한 것이 공화국의 운제였다.
실제로 여분의 사다리가 도착하자 운제를 담당하고 있던 병사들은 능숙하게 사다리를 갈아 끼웠다.
1분도 걸리지 않는 그 속도는 반복 연습을 충분히 해봤다는 증거였다.
“수리 완료했습니다!”
“좋아! 다시 걸쳐!”
“옛!”
그리고 운제는 다시 한번 메이치 성벽에 사다리를 내렸고, 공화국 병사들은 다시 사다리를 타고 성벽 위로 올라갔다.
“가라! 포기하지 마라!”
“위대한 공화국의 포석이 되어라!”
“낙원을 위하여!”
“우오오오오!!”
공화국의 병사들은 목소리를 하나로 모아서 맹렬하게 공격했다.
“제길, 이러면 끝이 없잖아?”
밀턴은 눈살을 찌푸렸다.
메이치 성의 성벽 위를 한 바퀴 쭉 돌면서 운제의 사다리를 박살냈는데 별로 상황이 변한 것이 없었다.
공화국의 병사들은 여전히 끈질기게 공격을 해왔다.
성벽 위에서 장창으로 견제를 하고, 성벽 위에 강력한 기사 전력이 대기하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망설임이 없었다.
‘이 사상 광신도 새끼들이 또 필 받았군.’
밀턴은 눈살을 찌푸렸다.
공화국의 병사들이 낙원을 위해서 어쩌고 하면서 덤비기 시작하면 굉장히 끈질겨진다.
인간은 목적을 가지고 행동할 때 훨씬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하는데 공화국의 병사들은 그걸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죽어라!”
“커억….”
공화국 병사 한 명이 장창에 심장을 찔렸다.
그러자 그 병사는 자기 몸을 찌른 장창을 두 손으로 꼭 잡고 사다리 옆으로 구르듯이 떨어지려 했다.
“어…. 어어. 이 미친놈아 놔!”
장창을 찌른 병사는 기겁을 했다.
죽으려면 혼자 죽을 것이지 이렇게 물귀신처럼 늘어질 줄은 몰랐다
“낙원을…. 위해서….”
공화국의 병사는 쥐어짜듯이 유언 한마디를 남기더니 기어코 상대편을 끌고 같이 투신하는 것에 성공했다.
“으아아아아악!”
장창병이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그리고 이것과 비슷한 광경이 성의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었다.
자기 몸을 찌른 적과 함께 떨어져 투신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 몸을 방패삼아서 뒤따라오는 전우에게 길을 열어주는 병사도 있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영광스런 낙원의 초석이 되자!”
“와아아아아아!!!”
공화국 병사들의 사기가 엄청나게 올랐다.
아니, 이건 사기가 아니라 차라리 광기에 가까울 지경이었다.
밀턴이 이끌고 온 레스터 왕국군은 철저하게 훈련된 정예 병력이었지만 일순간 공화국 병사들의 광기에는 질려서 기가 죽을 지경이었다.
다행인 것은 지금 성벽 위에 버티고 있는 남부 기사단의 존재였다.
“겁먹지 마라! 무서울 것은 하나도 없다.”
“저건 미친 광신도 새끼들일 뿐이다.”
“죽는 게 소원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주마!”
아무리 공화국 병사들이 사상으로 꽁꽁 무장하고 광기에 가깝도록 사기를 올린다고 해도 현실에 존재하는 실력의 차이는 어쩔 수 없다.
성벽 위로 올라가는 빈도가 높아지기는 했지만 남부 기사단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성벽 위를 점거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치열한 전투가 끝났고,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공화국은 공성을 그만두고 일단 물러났다.
“이겼다!”
“그대로 집까지 꺼져라 공화국 새끼들아!”
“와아아아아!!”
레스터 왕국군의 병사들은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하지만 그들도 결코 쉬운 전투를 한 것은 아니었다.
하루 종일 전투에 시달린 메이치 성의 성벽이 붉게 물들어 있는 이유는 노을 때문만은 아니었다.
적과 아군 모두 치열하게 피를 흘렸다는 증거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만큼 치열한 전투였던 것이다.
첫날의 전투가 끝나고 밀턴은 즉시 피해 상황을 점검했다.
“사상자는 1,000 이하이며 부상자는 700입니다.”
“부상자 중에 전투가 불가능할 정도의 중상자는?”
“200명 정도는 중상이지만 나머지는 경상입니다.”
“그래. 그렇군.”
생각보다 피해가 많았다.
수성전이라는 전투는 성벽에 적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기만 하면 병사의 피해가 가장 적은 전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지크프리트가 개량한 운제가 결국 성벽 위에 병사들을 끊임없이 올려 보냈기 때문에 통상적인 수성전보다 훨씬 더 힘겨운 전투가 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공화국 병사들의 비정상적일 정도의 사기였다.
원래 공화국의 병사들이 툭하면 광신도처럼 폭주해 버리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지크프리트 놈이 가지고 있는 카리스마 때문인가? 어쨌든 생각보다 피해가 커.’
밀턴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참모 한 명이 좋은 소식도 가져왔다.
“아군의 피해가 컸지만 적의 피해도 큰 것 같습니다.”
“근거할 추정치가 있나?”
“예. 대공 전하께서 빠른 판단으로 남부 기사단을 성벽 위에 올려 보내주신 덕분에 성벽 위로 올라온 공화국 병사를 상당수를 쓰러트릴 수 있었습니다.”
밀턴에 대한 아부를 슬쩍 곁들인 참모가 말을 이었다.
“성벽 위에서 수습한 시체의 숫자만 해도 2,000에 가깝습니다. 성벽 아래로 떨어진 시체와 공성 과정에서 성벽 밖에서 화살을 맞아 죽은 이들까지 합하면 더 많을 것이 분명합니다.”
밀턴은 고개를 끄덕였다.
“치열한 전투였으니…. 보급은 충분한가?”
“예.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밤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푹 쉬게 하라. 단 술은 엄금하며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도록.”
“옛. 알겠습니다.”
참모진에게 지시를 내리고 밀턴은 생각에 잠겼다.
‘우리 군의 피해가 컸지만 공화국의 피해는 더 컸어. 이건 엄연한 사실이다.’
오늘 하루 동안 밀턴이 개인적으로 베어 넘긴 공화국 병사들만 해도 200은 넘을 듯했다.
이런 페이스로 전쟁이 계속되면 결국 먼저 나가떨어지는 것은 공화국일 것이다.
‘지크프리트가 이걸 모를 리가 없어. 내일의 전투에는 분명 뭔가의 변화가 있을 것이다.’
밀턴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내일을 대비하기로 했다.
“내일도 오늘과 같은 전법으로 메이치 성을 공격한다.”
막사에 공화국의 지휘관들을 불러 모은 지크프리트가 가장 먼저 한 말이 이것이었다.
그러자 참모 중에 한 명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말했다.
“총사령관님. 오늘 전투에서 병사들의 피해가 상당했습니다.”
“정확한 수치는?”
“사상자는 3,000이 넘고, 부상자도 2,000에 달합니다.”
“부상자 중 전투가 불가능할 정도의 중상자 비율은?”
“생각보다 적습니다. 대부분이 경상이고 중상자는 100명이 되지 않습니다.”
참모의 보고에 다른 참모들은 크게 감탄하며 말했다.
“대부분이 경상자라는 말이군.”
“과연 우리 공화국의 병사들이오. 몸을 사리지 않고 싸웠기에 사망자에 비해서 중상자가 적은 것이지요.”
중상자라는 것은 대부분 전투 불능의 상처를 입었을 때 전의를 잃고 쓰러진 병사들이다.
그런 병사들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어찌어찌 숨이 붙어 있다가 아군에게 구조를 받으면 그제야 중상자로 등록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화국에 중상자가 적다는 것은 대부분의 병사들이 자기 몸을 가리지 않고 싸웠다는 증거였다.
몸에 화살이 달리고 창칼이 날아와도 용감하게 죽을 때까지 싸웠기 때문에 중상자로 등록될 자들이 대부분 사망자로 등록된 것이다.
참모들이 생각해도 참으로 훌륭한 병사들이었다.
지크프리트는 그 분위기 속에서 직접 고개를 숙여 말했다.
“실로 훌륭한 병사들이다. 총사령관으로서 병사들과 지휘관 제군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총사령관이 직접 머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자 지휘관 일동은 깜짝 놀랐다.
“아…. 아닙니다.”
“어찌 그렇게 황송하신 말씀을 하십니까?”
“맞습니다. 모두 총사령관님의 인덕과 지혜를 믿고 있기에 몸을 던진 것입니다.”
공화국은 기본적으로 신분 제도를 부정하는 나라이다.
하지만 지크프리트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전설적인 행보에 매료된 이들이 그에게 보이는 예우는 이미 일국의 군주를 대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지크프리트는 그들의 경예를 받는 분위기 속에서 말을 이어갔다.
“본 사령관을 믿어 주어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렇다면, 조금 더 나를 믿어 주지 않겠는가?”
지크프리트는 좌중에 앉아 있는 지휘관들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치며 말을 이어갔다.
“병사들의 피해가 큰 것은 알고 있다. 이대로 전투가 지속되는 것을 귀관들이 걱정하는 이유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나를 믿어 다오. 귀관들이 그렇게만 해준다면….”
지크프리트는 단호하게 책상을 주먹으로 두들기며 선언했다.
“사흘 안에 메이치 성을 떨어트릴 것을 장담하겠다.”
그 말에 좌중의 지휘관들은 모두 일제히 일어났다.
그리고 공화국의 군례대로 경례를 하며 동시에 소리쳤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더 이상 이유는 필요 없었다.
지크프리트가 믿고 따르라 했다.
사흘 안에 메이치 성을 떨어트린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신들은 거기에 응할 뿐이었다.
지크프리트라는 남자는 결코 허언을 하는 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전군 공격!”
“미래의 낙원을 위해서!”
“우오오오오오오!!”
공화국의 병사들이 다시 한번 메이치 성에 돌격했다.
공격 방식은 전날과 같았다.
방어를 탄탄히 해서 성벽에 접근한 다음 운제를 이용해서 사다리를 걸치고 병사들이 성벽 위로 올라갔다.
공화국에서는 어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병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덤벼들었다.
밀턴은 여기에 어제와 같은 대응책을 썼다.
남부 기사단을 성벽에 올리며 자신도 직접 성벽 위를 뛰어다니며 적을 정리했다.
다만, 그러면서 현장의 분위기를 꾸준하게 살폈다.
‘무슨 생각이지? 왜 어제와 같은 방법으로 덤비는 거지?’
밀턴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제의 전투에서 공화국에서는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그런데 똑같은 방식의 전투를 고수하는 것은 이상했다.
정상적인 역량을 가지고 있는 지휘관이라면 어떻게든 공격 방식을 바꿀 것이다.
그런데 지크프리트는 어제와 같은 공격을 고수하고 있다.
이건 무슨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지휘관이 초조함에 눈이 흐려졌다. 라고 생각할 수는 없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지크프리트가….’
밀턴은 상황을 신중하게 살폈다.
그러면서 어제와 뭔가 다른 점이 없는지?
혹시 자신이 뭔가 놓치고 있는 게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했다.
하지만 그날의 전투가 다 끝나도록 밀턴은 아무런 차이점도 찾지 못했다.
공화국은 악착같이 덤볐고 밀턴과 남부 기사단은 병사들을 통솔하며 그 공격을 계속 막아냈다.
“와아아아! 이겼다!”
“꺼져라. 이 지겨운 놈들아!”
결국 그날의 전투가 끝날 때까지 메이치 성은 굳건하게 버텼다.
승리의 함성을 지르는 병사들 사이에서 밀턴은 어딘지 모를 찝찝함을 느끼며 동참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