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9화
“어머? 이제 왔나요?”
엘리제는 철저하게 격리된 막사에서 근신 중에 있었다.
전쟁에서 제국의 마스터인 헤일리 모론 후작을 쓰러트린 공을 세웠지만 그 과정에서 아군을 제물로 바치고, 본인 스스로도 광기를 터트려서 호위로 붙여준 고스트 대원들에게 전쟁과 상관없는 불명예를 안겨주려 했다.
그 사실을 전해 들은 지크프리트는 일단 그녀에게 근신 명령을 내렸고 오늘까지 격리되어 있었다.
그런 것치고는 여유 만만한 태도였지만 말이다.
“나를 풀어주려고 하는걸 보니 부탁할 게 있나 보죠? 아! 듣기로는 최근에 졌다고 하던데 그것 때문인가요?”
빈정거리는 엘리제의 말에 지크프리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괜히 도발하지 마라. 근신 당한 건 네 탓이니까.”
“흥, 나보고 마음대로 하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전쟁에 관련된 것이라면 그렇지. 내 부하들에게 진상 부리라고 한 적은 없다.”
고스트 대원들에게 헤일리 모론 후작을 범하라고 했던 명령을 지적하는 것이다.
병사들을 제물로 바친 것은 전쟁과 연관이 있으니 넘어가 줄 수 있지만 전쟁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명령은 그냥 진상 짓일 뿐이었다.
그런 지크프리트의 지적에 엘리제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아…. 여자한테 한 입으로 두말하시는 분인 줄 알았다면 진작 죽여 버렸을 텐데 말이죠.”
순간 지크프리트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지금이라도 해 보지 그래?”
“…….”
엘리제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지크프리트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둘의 사이에서는 무거운 적막이 맴돌았다.
사실 이 둘의 관계는 미묘하다.
주종 관계에 가깝지만 그보다는 대등하다.
동맹 관계로 보기에는 상하의 서열이 뚜렷하다.
계약 관계.
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둘의 계약에는 서로의 목적을 위한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있었지만 그 대부분은 둘밖에 몰랐다.
지크프리트의 최고 심복인 제이크 역시 그것에 관해서는 다 알지 못했다.
다만, 지크프리트와 엘리제의 사이는 결코 영원하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틀어질지 모르는 위태한 관계였고 이 둘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엘리제는 아주 조금이긴 하지만 선을 넘었다.
물론 지크프리트는 그걸 용납할 생각이 없고 말이다.
네가 내 밑에 있으려면 네 역할에 충실해라.
라는 의사가 지크프리트의 차가운 눈빛에 담겨 있었다.
여기서 엘리제가 어떤 화답을 하느냐에 따라서 둘의 계약은 파탄이 날 수도 있었다.
엘리제는 한참을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관두죠. 당신만 한 파트너는 또 구하기 힘들 테니까요.”
결국, 엘리제가 먼저 숙였다.
그러자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나야말….”
뻐어억!
순간 엘리제는 말을 다 잇지도 못하고 한쪽으로 나가 떨어졌다.
제이크가 검집째로 검을 휘둘러 엘리제의 머리를 후려친 것이다.
죽지는 않을 정도였지만 엘리제의 가녀린 몸이 한쪽으로 날아가 버릴 정도로 강력한 일격이었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날아간 엘리제는 한쪽에서 간신히 꿈틀거렸고 지크프리트가 냉엄하게 말했다.
“이건 방금 전의 발언에 대한 페널티로 해 두지. 불만 있나?”
“없을리가…. 없지만…. 으윽….”
엘리제는 몸을 꿈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입에서 부러진 이를 핏물과 함께 뱉어내고 말을 이었다.
“페널티…라는 것은 인정 안 할 수가 없네요.”
“좋아.”
그렇게 상황을 정리한 지크프리트는 분위기를 바꿔서 엘리제에게 말했다.
“너한테 시킬 일이 있다.”
“그게 뭐죠?”
“이전에 네가 말했던 비약의 부산물. 그것이 필요하다.”
“호오…. 그게 말이죠?”
“그래.”
“좋아요. 연구는 그만뒀지만 아까워서 폐기는 하지 않았어요. 얼마든지 제공하죠.”
“좋아.”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비장의 무기는 너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밀턴 포레스트.’
이런 말이 있다.
싸워서 이기는 것은 중책.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은 상책.
발랑스 왕국 정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크프리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밀턴 포레스트는 방해물이었다.
이 방해물을 치워버리기 위해서는 싸워서 물리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싸우지 않고 물러나게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상책은 없다.
그 일환으로 시도한 것이 레스터 왕국의 본토에 대한 공격이었다.
데이비드에게 전령을 보내서 공화국의 예비 병력 6만을 일으켜 레스터 왕국의 본토를 공격하게 했다.
만약 이 공격이 먹힌다면 밀턴은 물러나지 않을 수 없다.
발랑스 왕국에서 벌이는 전쟁에서 무엇을 얻든 간에 레스터 왕국의 본토가 위협당하면 곤란하니 말이다.
하지만, 밀턴이라고 이 부분에 방비를 해 두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우선 가장 신뢰하는 책사인 세비안 백작에게 국경 방위에 대한 작전권을 위임하고 왔다.
지크프리트가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세비안 백작의 지략으로 못 막을 상대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세비안 백작에게는 션 페일런 공작과 더불어서 트라이크 로우 자작이라는 강력한 패가 있었다.
특히 트라이크의 활약이 눈부셨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공격하라! 오늘 안에 요새를 떨어트린다!”
공화국의 병사 5,000이 맹렬하게 레스터 왕국군의 방위 거점을 공격하고 있다.
주성을 방어하느라 병력이 충분하지 않은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서 5,000의 별동대를 이끌고 공격한 것이다.
요새의 안에 있는 병력이라고 해 봐야 고작 1,000 남짓.
성도 아니고 임시로 지어놓은 요새 따위는 하루면 함락할 수 있다는 계산하에 벌어진 공격이었다.
실제로 레스터 왕국군의 수비군은 상당히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자작님! 요새의 문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병사들을 정문에 배치하라! 적이 내부로 돌입하게 두지 마라!”
요새의 방위를 맡은 귀족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솔직히 부하들에게 명령을 하면서도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못 막는 건가?’
그가 패배를 직감하고 있는 그때.
적의 오른쪽 편에서 한 무리의 기마가 나타났다.
“저건?”
“어…. 붉은색 화살 깃발. 저 부대는 설마?”
“붉은 깃털이다! 트라이크 로우 자작님이 이끄시는 지원군이다.”
“만세 이제 살았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요새의 수비군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트라이크가 이끌고 온 기마대는 적의 오른쪽에 자리를 잡더니 부채꼴로 넓게 진형을 갖췄다.
그리고….
“쏴라!”
트라이크의 명령 하나에 기마 위에 있던 궁병들이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그 숫자는 무려 2,000.
화살로 비를 뿌리기에 차고도 넘치는 숫자였다.
“크악!”
“적이다! 오른쪽에 적이… 커억.”
“으아아악…. 내 눈!”
갑작스럽게 쏟아진 화살 공격에 적들은 무방비하게 있다가 큰 피해를 입었다.
“계속 쏴라! 적들이 진형을 정비할 시간을 주지 마라!”
트라이크의 명령에 부하들은 계속 적에게 화살로 비를 뿌렸다.
그들의 화살은 하나하나가 상당히 정확하고 속사의 속도도 빨랐다.
그러자 보통의 궁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을 보이고 있었다.
트라이크가 심혈을 기울여 조련해서 만들어낸 직속 부대로 부대의 이름은 붉은 깃털이라고 한다.
기사단이 아니지만 전쟁터에서 발휘하는 위력은 어지간한 기사단보다 훨씬 더 강력한 부대였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전원이 합성궁을 사용하는 궁사들이었고, 트라이크에게 맹훈련을 받은 1류 궁사들이었다.
200미터 앞에 있는 사과를 노렸을 때 다섯 개 중에 세 개 이상을 맞춰야 붉은 깃털에 합류할 최소 자격을 갖추게 된다.
또한 달리는 기마 위에서 화살을 쏠 수 있도록 궁기병으로서의 훈련을 받았다.
예전에 트라이크가 이끌던 부대는 전차를 타고 화살 공격을 했지만 역시 속도나 방향의 선회 등에 있어서 전차는 뒤떨어졌다.
그래서 시간을 들여서 전차 부대를 궁기병 부대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이 부대가 한번 떴다 하면 상대편에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압도적으로 긴 사거리와 빠른 기동력을 보유하고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대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궁기병단이 아니라 붉은 깃털을 이끌고 있는 대장 트라이크였다.
그는 연사를 하지 않고 한 발 한 발 화살을 정확하게 쏘면서 적의 지휘관을 저격하고 있었다.
그가 화살을 한 번씩 당길 때마다 공화국의 장교들이 쓰러졌다.
현장 지휘를 맡아야 할 장교들이 쓰러지자 공화국의 병력은 점점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트라이크의 눈이 반짝였다.
“저놈이 최고 지휘관이군.”
부하들이 적을 공격하는 사이 트라이크는 조용하게 적의 지휘관을 찾아냈다.
척 봐도 정예들에게 보호를 받으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남자가 눈에 띈 것이다.
“확실하게 끝내주지.”
이제 숨길 필요도 없어진 트라이크는 화살에 오러를 실었다.
웅웅웅웅웅….
화살에 오러가 진하게 맺히고 표적이 화살촉의 끝에 걸렸다.
“가라.”
투우웅!
순간 트라이크의 손끝에서 섬광이 날아갔다.
그 섬광은 혼전 중에 부하들을 필사적으로 추스르는 지휘관에게 날아갔고, 그 결과….
퍼엉!
그대로 적 지휘관의 머리가 날아가 버렸다.
“겐… 겐지스 소령님이 전사했다!”
“악마다! 붉은 악마가 왔어!”
“제길, 머리 숙여!”
국경 지대의 전쟁을 넓게 누비면서 적의 지휘관을 골라서 저격하다 보니 트라이크에게 한 가지 별명이 붙었다.
붉은 악마.
적들에게 이런 별명이 붙었다는 것은 그만큼 트라이크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적들의 전열이 완전히 흐트러지자 요새의 문이 열리고 레스터 왕국의 병력이 뛰쳐나왔다.
“공격! 침략자들에게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하라!”
“와아아아아아!!”
적의 전열이 완전히 흐트러진 것을 놓치지 않고 요새의 병력이 적을 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공화국의 병사들은 지휘 체계를 잃고 혼돈 속에서 허둥거리다가 결국 후퇴했다.
“후퇴! 후퇴하라!”
“도망가! 빨리…. 커억!”
전황이 완전히 뒤집힌 것을 보고 트라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빠진다! 나머지는 아군이 정리할 것이다.”
“옛! 대장님.”
“다음 목적지는 어디지?”
“예. 여기서 반나절 거리에 있는 맥켄지 성입니다. 하루 안에 도착하라는 지령입니다.”
“좋아. 전원 출발!”
그렇게 트라이크는 요새 하나를 구원하는 동시에 공화국의 병력 5,000을 박살내고 유유하게 사라졌다.
공화국과의 국경 지대에서 트라이크가 이런 활약을 한 횟수가 벌써 다섯 번을 넘었다.
세비안 자작이 공화국의 공격 루트를 읽어내고 트라이크가 찾아가서 요격하는 식으로 적의 숫자를 줄인 것이다.
거기다 적이 좀 많다 싶으면 페일런 공작이 기사단을 이끌고 와서 원조를 해 주기도 했다.
세비안 백작이라는 지략가는 트라이크와 그가 이끄는 붉은 깃털 부대를 최대한 유용하게 써먹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공화국의 병력은 감히 레스터 왕국의 국경을 넘지 못했다.
결국 데이비드는 이렇게 무의미하게 병력을 소모시킬 수 없다는 판단하에 레스터 왕국의 공격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지크프리트에게 짧은 내용의 전서구를 날렸다.
- 레스터 왕국 공격 실패.
“빌어먹을….”
편지를 받은 지크프리트는 편지를 와락 구기며 욕을 했다.
그 답지 않은 반응이었지만 그만큼 아쉬웠다는 것이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군. 밀턴 포레스트.”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군.”
“어쩔 수 없지. 힘으로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제이크에게 명령했다.
“전 부대에 알려라. 발랑스 왕국의 수도를 공격한다!”
“예. 주군.”
“어디 해보자. 밀턴 포레스트.”
결국 지크프리트는 밀턴과 힘으로 자웅을 가리기로 결정했다.
“주군, 공화국의 본대가 움직였습니다.”
“지크프리트 본인은?”
“확실하게 확인했습니다. 본대에 포함되어 움직이고 있습니다. 제이크라는 고스트 부대의 대장도 확인되었습니다.”
“총력전이군. 받아준다.”
밀턴 역시 빼지 않고 군을 출진시켰다.
결전지는 메이치 성.
발랑스 왕국의 수도로 이어지는 관문 역할을 하는 요새 도시였다.
메이치 성은 밀턴이 이끌고 온 3만의 병력에 발랑스 왕국 귀족들을 협박해서 얻어낸 5,000의 사병까지 합친 3만 5,000의 병력이 머물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큰 요새였다.
자연스럽게 전투는 공성전의 형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