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8화
밀턴이 보기에 이 나라는 이미 망국의 수순을 밟고 있다.
민심을 잃었고 전쟁의 여파로 국토가 황폐화 되었다.
국가와 사람의 공통점은 태어난 이상 언젠가 죽을 때도 있다는 것이다.
밀턴이 보기에 발랑스 왕국은 이미 수명이 다했다.
남은 것은 이 나라에 살고 있던 백성들이 더 이상 힘들지 않도록 그나마 좀 나은 형태의 마무리를 지어주는 것뿐이다.
“여기서 조건이 더 완화되지는 않을 것이오. 이제 결정을 내려 주시오.”
밀턴은 서류를 내밀로 팔짱을 끼고 니콜라스 국왕을 지켜봤다.
그리고 니콜라스 국왕은 서류를 한참 바라보며 괴로운 고민에 빠졌다.
결국, 니콜라스 국왕은 밀턴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이 전쟁에 대한 모든 권리를 이양하고 막대한 보상금도 지불하겠다고 말했다.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귀족들이 벌 떼처럼 들고 일어났지만 소용없었다.
국가 간의 외교 문서에 국왕의 인장이 찍혔다.
그렇다면 빼도 박도 못 하도록 정해진 것이다.
실망한 귀족들은 니콜라스 국왕에게 등을 돌렸다.
그들 중 상당수는 제국을 망명을 선택했고, 또 어떤 이들은 새로운 대세가 될 것 같은 밀턴에게 의탁을 해 왔다.
앤드루스 제국에 기대느냐? 레스터 왕국에 기대느냐?
이 두 가지 선택지가 발랑스 왕국의 귀족들에게 제시된 것이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입장과 국가의 정세를 살펴가며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 것 같은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극히 드물지만 나라를 갈아탈 변죽이 없는 이들과 고지식한 충신들은 끝까지 니콜라스 국왕의 곁을 지켰다.
아이러니하게도, 국가가 망국의 위기에 처했을 때야 빛을 발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망해가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밀턴과 제국에 접선하며 어떻게든 나라의 명맥을 이어 보려고 했다.
‘무능한 군주에 과분한 신하들이군. 저런 자들이 진작 발랑스 왕국의 중진으로 자리했다면 지금 같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이미 늦었어.’
밀턴이 보기에 그들의 행동은 무의미한 짓으로 보였지만 필사적으로 행동하는 그들을 굳이 방해하지는 않았다.
사실 그것보다는 공화국과의 전쟁에 집중을 해야 했다.
지크프리트를 한 차례 물리치기는 했지만 놈이 이대로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밀턴은 정찰대를 정밀하게 운용해서 지크프리트의 행동을 주시하는 한편 발랑스 왕국의 민심을 최대한 다독였다.
본국에서 꾸준하게 식량과 생필품을 지원 받아서 그것을 발랑스 국민들에게 풀었다.
공화주의에 선동된 국민들 대부분은 국가의 폭정에 시달려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국가의 사상이나 체제보다는 자신들의 생활이 우선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밀턴은 물자를 풀어서 민심을 다독이게 했다.
단, 그렇게 다독이는 지역은 대부분 발랑스 왕국의 서쪽 지역이었다.
레스터 왕국에서 출발해 자신이 진격해온 경로에 있는 지역에 우선적으로 물자를 풀었다.
이것은 전쟁 이후의 큰 그림을 그리고 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이런 밀턴의 행동은 당연히 지크프리트의 이목을 끌었다.
“서쪽 지역의 구휼이 우선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예. 그렇습니다. 주군.”
고스트 대원이 직접 가져온 정보를 접한 지크프리트는 지도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한 말은….
“레스터 왕국에서 화친을 제의하고 있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무 뜬금없는 지크프리트의 말에 제이크가 영문을 모를 표정을 했다.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 전쟁에서 레스터 왕국은 우리와 끝까지 싸울 생각이 없다는 말이지.”
“…….”
여전히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제이크를 보며 지크프리트는 말을 이어갔다.
“우리에게 한 번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이 전쟁을 끝까지 수행하기에 레스터 왕국은 약점이 있지. 그게 뭔지 알겠나?”
“병력이 너무 소수라는 것입니다.”
“맞아.”
지크프리트는 피식 웃었다.
이전의 일전에서 패배한 이후 군사를 물린 지크프리트는 최우선적으로 밀턴이 이끌고 온 군세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 병력 규모는 3만.
병력 구성은 불투명하지만 밀턴 포레스트와 그 오른팔인 제롬 테이커가 참전함.
남부 기사단 참전.
대강 이 정도가 주어진 정보였다.
밀턴과 제롬이 직접 참전한 것을 봐서는 레스터 왕국의 정예들이 참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발랑스 왕국의 영토를 수복하기에 3만은 너무 적었다.
지금 공화국은 발랑스 왕국의 국토를 반 이상 점거했다.
정식으로 점령하지 못한 지역에서도 공화주의자들이 내분을 조장하고 있기 때문에 점령하기는 몹시 쉬웠다.
사실상 발랑스 왕국의 수도를 공격해서 함락시킬 수만 있다면 이 나라 전체를 정복할 수 있다.
과거 스트라부스 왕국을 무너트렸을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밀턴이 그 수도로 이어지는 길목을 막고 있으며 그 와중에 서쪽 지역에 대한 민심을 다독이고 있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 걸까?
지크프리트는 그 뜻을 바로 알았다.
“밀턴, 아니 아마 이건 레이라 여왕의 뜻이겠지. 그녀는 지금 나에게 제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서부 지역은 우리가 접수하겠다. 그 대신 나머지는 너희가 가져라.’라는 제시를 말이야.”
지크프리트의 말에 제이크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건, 과거 스트라부스 왕국을 정복할 때 눈 뜨고 서부 지대를 빼앗겼던 것과 같군요.”
“맞아. 다만, 그때와 차이점은 그때는 영주들을 다독이던 것을 백성들로 바꿨다는 거지. 이미 발랑스 왕국에서 귀족들의 영향력은 바닥이니 말이야.”
지크프리트의 말을 들으며 제이크는 심기가 크게 불편해졌다.
발랑스 왕국을 거의 다 무너트린 것은 공화국이었다.
지크프리트가 오랜 시간 동안 발랑스 왕국의 안에 공화주의를 퍼트리고 제국을 상대로 일전을 펼치고 승리한 끝에 이제 달콤한 과실을 거두려는 참이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서 밀턴이 나타나서 나도 한 쪽 먹자, 라고 하면서 그 과실의 3분의 1 정도를 내놓으라고 한다.
생각하면 할수록….
“죽일 놈.”
열 받았다.
그런 제이크를 보고 지크프리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많이 분한가?”
“예. 하는 짓이 너무 치졸하다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런 놈이 세간에서 주군과 대등한 존재로 평가 받는 것 역시 화가 납니다.”
제이크가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흔하지 않다.
지크프리트는 피식 웃으며 그런 제이크에게 말했다.
“말했지만 이런 밀턴 포레스트보다는 레이라 여왕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일 확률이 크다.”
“그게 그거죠. 똑같은 것들끼리 잘 만났군요.”
지크프리트는 겉으로는 그냥 웃었지만 머릿속으로는 냉정하게 상황을 살폈다.
‘이 패를 받아야 할까? 아니면 무시하고 끝을 볼까?’
밀턴이 이끌고 온 병력은 3만이다.
이전 전투에서 밀턴에게 크게 패하며 병력을 많이 상실했다고 하지만, 공화국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5만이 넘는다.
병력이 우위에 있으면서 보급 상황도 나쁘지 않다.
한마디로 전력이 더 높은 것이다.
무엇보다 전쟁이라면 지크프리트가 가장 자신 있는 도박판 중에 하나다.
하지만 망설여지는 것은….
‘밀턴 포레스트. 이놈은 만만하지 않아.’
밀턴의 존재감이었다.
이제까지 지크프리트에게 있어서 밀턴 포레스트는 방해물이었고 경쟁자였지만 한편으로는 전쟁터에서 만나면 이길 수 있는 상대였다.
몇 번이고 패전을 겪었지만 그래도 작정하고 전쟁에서 부딪히면 항상 우위를 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감이 이번에 사라졌다.
비록 급습이었다고 하지만 제대로 전열을 갖추고 싸웠다.
승산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랬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지크프리트의 패배였다.
그냥 그런 패배가 아니라 이번에는 지크프리트의 목숨도 위험했다.
원인은 알고 있다.
레스터 왕국군에서 새롭게 갖춘 신형 무장들 때문이다.
그 수라장 중에 몇 개를 확보해서 확인해 봤지만 놀라운 성과였다.
코브르크 공화국의 특수 석궁보다 훨씬 더 우수한 합성궁.
중장보병을 어지간한 기사단보다 더 탄탄한 벽으로 만들어내는 갑옷.
둘 다 이제까지 본 적 없는 특수한 금속이 사용되어서 그런 물건이 나왔다고 해석되었다.
‘차분하게 연구를 하면 언젠가 따라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무리겠지.’
결국 무기에서 열세를 가진 상태로 싸워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기에 밀턴이 이끄는 레스터 왕국군은 만만하지가 않다.
‘어떻게 할까? 발랑스 왕국의 서쪽 지역 일대까지 점령한다면 레스터 왕국의 기세는 앞으로 더 올라갈 것이 분명한데.’
오랜만에 고민에 빠진 지크프리트를 보고 제이크가 말했다.
“주군, 놈들의 속셈이 서쪽 지역을 병합하는 것에 있다면 우리가 우선적으로 그쪽을 점령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본군을 움직이면 밀턴 포레스트도 움직일 것이다.”
“두렵지 않습니다.”
“전쟁은 자신감만으로 하는 게 아니야. 확실한 승산이 없는 전쟁은 그냥 도박판일 뿐. 꼭 필요한 순간이 아니라면 나는 도박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군을 둘로 나눠서 진격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둘로 나눠?”
“예. 제가 2만을 이끌고 서쪽 지역을 병합하겠습니다. 그리고 주군께서 3만을 이끌고 발랑스 왕국의 수도를 공격하면 됩니다. 우리보다 수가 적은 레스터 왕국군은 둘 중에 하나밖에 대응하지 못할 것입니다.”
제이크는 스스로 말하고 꽤 괜찮은 작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굉장한 실책이다. 제이크.”
“예?”
생각하지 못한 혹평에 제이크가 놀란 눈을 했고 지크프리트가 말했다.
“여기서 군을 나눈다면 레스터 왕국은 다 떠나서 내가 이끌고 있는 군을 공격할 것이다.”
“서쪽 지역은 버려둔단 말입니까?”
“내가 놈이라면, 서쪽 지역, 아니 발랑스 왕국 전체를 병합할 수 있는 기회보다 나 지크프리트의 목을 더 무겁게 칠 것이다.”
“아….”
제이크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설령 발랑스 왕국 전체를 공화국에 병합시킬 수 있다고 해도 지크프리트가 당하면 아무 의미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위장을 하면 어떻습니까? 제가 주군으로 위장을 하고 군을 이끌고 주군께서는 반대로 서쪽 지역을 공격하시면….”
“그 위장 전술이 통할지 말지를 별개로 놓고 봐도, 그게 통하면 이번에는 네가 위험하다.”
“주군의 대계를 위해서라면 제 목숨 하나 정도는 상관없습니다.”
제이크의 말에 지크프리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의 대계를 위해서는 네가 필요하다. 고작 발랑스 왕국의 서부 지역을 너하고 바꿀 수는 없어.”
“하지만 주군….”
“그만!”
강하게 말을 끊은 지크프리트가 말을 이었다.
“네 목숨이 필요하다면 아무런 주저 없이 명령할 것이다. 하지만 그 장소와 시기는 내가 정한다.”
지크프리트의 말은 단호했다.
“알겠습니다. 주군.”
결국 제이크는 지크프리트의 말에 순응했다.
그리고 자신의 의견이 거부당했지만 제이크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알 수 없는 만족감이 은은하게 차올랐다.
기사란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위해서 죽는다고 했던가?
공명심이 없는 제이크였지만 자신의 가치가 일국의 영토 3분의 1보다 더 크게 평가 받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던 것이다.
지크프리트는 그런 제이크의 마음을 알았지만 모르는 척하며 속으로 치열한 계산을 했다.
이대로 전쟁을 피하고 레스터 왕국과 협정을 맺으면 더 이상의 국력 소모 없이 발랑스 왕국의 중북부를 집어삼킬 수 있다.
이것만 해도 제국을 공격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기에는 충분하다.
하지만 레스터 왕국이 발랑스 왕국의 서쪽 지역을 병합하는 것은 내키지 않는다.
이 이상 레스터 왕국의 국력이 커진다면 공화국에서는 부담이 너무 큰 것이다.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는가?
그 결과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가?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장고를 거친 지크프리트가 입을 열었다.
“일단, 한 번은 더 싸워 보는 게 좋겠군.”
“주군의 선택에 따르겠습니다.”
“너무 결사의 각오를 다질 필요는 없다. 일단은 이기는 것보다는 지지 않는 것에 중점을 둔 전쟁이 될 테니 말이야.”
결국 지크프리트는 전쟁을 선택했다.
단, 사생결단까지의 전쟁이 아니라 한 번 정도는 더 찔러보는 식의 전쟁이었다.
무엇보다 레스터 왕국군의 힘을 한 번 정도 더 피부로 느껴보는 것이 도움이 되겠다는 판단도 있었다.
정보 수집을 겸하면서 가능하면 실익을 노려보는 전쟁.
그것이 지크프리트의 선택이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아무런 전투 없이 밀턴 포레스트의 병력을 치워 버리는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 지크프리트는 가장 빠른 전서구를 이용해서 한 장의 편지를 공화국 본토에 보냈다.
그리고 한 가지 수를 더 준비하기 위해서 엘리제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