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197화 (197/257)

제197화

‘무슨 배짱으로 이러는 거지?

사실 밀턴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누가 봐도 이 테이블에서 갑은 자신이었다.

제국의 원정군이 패하고 물러난 이상 발랑스 왕국을 지켜줄 수 있는 건 자신이 끌고 온 레스터 왕국군뿐이었다.

그렇다면, 니콜라스 국왕에게 바른 판단력이 있다면 어떻게든 자신을 구슬려서 잡아 두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건 마치 자신들은 아쉬울 것이 없다는 듯이 고압적인 태도가 아닌가?

‘뭐지?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치면 우선은 의심하라.

이것도 요물 아내에게 배운 것이다.

예를 들어서 갑자기 아내가 각방을 쓰자고 하면 뭔가 삐진 것이다. 그러니 뭘 잘못했는지 하루 종일 생각해서 다음날 좋은 선물과 함께 다정한 목소리로 달래줘야 했는….

‘아니, 지금 그런 생각할 때가 아니지.’

부부 생활과 국가 중대사에 약간의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파악하자 약간 다른 생각을 해 버린 밀턴이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니콜라스 국왕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당당하게 나오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보급을 귀국에서 담당하신다는 생각은 썩 좋지 않다고 생각하오.”

밀턴은 우선 상대의 의견 자체를 반박해서 판을 깨기로 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이오?”

“내가 알기로 제국의 원정군이 결정적으로 패배한 이유 중에 하나가 보급선의 괴멸이라고 알고 있소. 그런데 우리도 제국과 같은 실수를 할 수는 없지 않겠소?”

“그건….”

뭐라 반박하려는 니콜라스 국왕에게 밀턴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아직 안 끝났소. 보급 이외에도 문제는 있소.”

그리고 밀턴은 자기 앞에 있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여유만만 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내가 레스터 왕국에서 끌고 온 군대의 숫자는 고작 3만이오. 과감하게 공격을 선택하기에는 작은 숫자란 말이오.”

“그래서 자국의 국민에게 징집령을 내릴 권리를 주겠다는 것이오.”

“그건 제국에서 한 번 하지 않았소? 듣자하니 싸울 수만 있다면 성인식을 치르지 못한 어린애부터 노인까지 모두 동원했다고 하더군.”

“그건 모함이오!”

니콜라스 국왕은 얼굴을 붉히며 고함을 질렀다.

‘모함은 무슨….’

밀턴은 속으로 조소하며 말을 이었다.

“진위 여부는 둘째치고, 한 번 징집령을 동원했는데 또 징집령을 내린다고 병사들이 얼마나 모일 것 같소?”

“…….”

니콜라스 국왕은 대답할 말이 궁색해졌다.

물론 속으로야 나름 할 말이 있었다.

백성은 젖은 수건과 같아서 다 쥐어짠 것 같아도 작정하고 또 쥐어짜면 물방울이 떨어지더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걸 대놓고 입에 올리기에는 아무래도 체면이 마음에 걸려서 말하지 못했다.

그저 궁색하게 한 말은….

“자국의 저력을 너무 얕잡아 보는 것 같소.”

이게 고작이었다.

‘저력 같은 소리하고 있네.’

밀턴은 노골적인 비웃음을 띄었다.

과거 스트라부스 왕국 정도 되면 저력이라는 말을 믿어 줄 수 있겠지만 여기는 발랑스 왕국이다.

솔직히 밀턴이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이건 이미 나라가 아니다.

솔직히 이 나라의 백성들만 생각한다면 그냥 지크프리트가 정복하게 내버려 두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뭐, 그 야망에 똘똘 뭉친 인간에게 이 이상의 힘이 주어지는 건 싫으니까 막기는 막아야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밀턴은 니콜라스 국왕에게 말을 이었다.

“냉정한 말이 될 수도 있지만 나는 귀국에 그런 저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 무슨….”

“그만, 그 부분에 관해서 입씨름하고 싶지 않소. 견해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그대가 나를 설득할 수 없는 이상 무의미한 논쟁만 지속될 뿐이오.”

“으음….”

니콜라스 국왕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밀턴을 노려봤다.

외교 석상에서 이런 시선 자체가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그러면서 기껏 한다는 말이….

“너무한다고 생각하지 않소?”

고작 이거였다.

그리고 니콜라스 국왕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공화국은 우리 대륙의 공통된 적이오. 그리고 귀국도 제국에서의 명령을 받고 이 전쟁에 참전한 이상 본국과의 협조는 필수적일 것이오. 그런데 이렇게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다니? 훗날 제국에서 이 사실을 안다면 귀국에게 이로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오?”

“…하아?”

순간 밀턴의 포커페이스가 깨졌다.

‘이 인간 설마…. 믿는 구석이 제국이었던 거야?’

밀턴은 그제야 니콜라스 국왕이 이렇게 막나가는 이유를 알았다.

지금 니콜라스 국왕은 자신이 제국의 ‘명령’을 받고 참전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국의 눈치를 봐서라도 이 전쟁에서 발을 뺄 수는 없으니 필요 이상의 원조는 할 필요가 없다.

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런 게 왕이라고? 나라 꼴 한번 잘 돌아간다.’

자기 나라 일도 아니지만 밀턴은 한숨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니콜라스 국왕에게 사대주의라는 특성이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처음 보는 특성이라서 그냥 한심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게 니콜라스 국왕의 약점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그럼 네가 믿고 있는 제국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보여주지.’

짧은 시간에 생각을 정리한 밀턴은 다시 표정을 정돈하고 니콜라스 국왕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귀국은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는 듯하군.”

“뭐가 오해라는 말이오?”

밀턴은 품 안에서 한 장의 서신을 꺼내서 내밀었다.

“이것은 앤드루스 제국의 세바스티안 공작이 나에게 보낸 친서요.”

“…….”

“한번 읽어 보시겠소?”

니콜라스 국왕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편지를 받아서 읽었다.

- 친애하는 포레스트 대공에게.

본인은 앤드루스 제국의 핵터 세바스티안이라 하오.

일면식도 없는데 갑자기 서신을 보내는 무례를 우선 사과하는 바이오.

멀리 떨어져 있는 제국에서도 귀하의 위명은 종종 들려왔소.

실로 전신이라 칭하기 부끄럽지 않은 그대의 위업은 실로 대단하다 생각하오.

-중략-

오늘은 다름이 아니라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이렇게 서신을 보내오.

본인이 제국의 군을 이끌고 공화국과 전쟁을 수행하고 있으나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지 않고 있소.

물론 필승의 각오로 싸울 생각이고 아직 패배를 염두에 두는 것은 아니지만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그대에게 부탁을 하고자 하오.

그대가 군을 일으켜서 공화국의 후방을 공격하거나 발랑스 왕국의 전쟁에 원군을 보내주기를 바라오.

만약 그대들이 이 전쟁에 참전한다면 제국의 황제 폐하에게 위임받은 권한을 대리하여 선언하건대 포레스트 대공에게 이 전쟁에 한하여 나와 대등한 권리를 인정할 것을 선언하오.

발랑스 왕국 내부에서의 군사 이동과 시설물 이용. 물자와 인재의 징집 등에 대한 모든 권리를 인정하는 바이오.

공화국은 위험한 사상으로 무장한 괴뢰 단체로 전 대륙의 적이니 부디 정의로운 판단을 내리기 바라오.

앤드루스 제국 소속

핵터 세바스티안 공작 씀.

이상이 편지의 내용이었다.

이걸 끝까지 읽은 니콜라스 국왕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왕위에 오르기 전 왕자 시절에는 앤드루스 제국에서 유학을 했고,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수시로 앤드루스 제국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국정을 운영해 왔던 니콜라스 국왕이었다.

하지만 그의 평생에 걸쳐서 제국에서 이렇게 정중한 편지를 받아본 적은 없었다.

제국의 귀족들이 얼마나 오만하고 거만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 그였다.

심지어 그저 그런 귀족도 아니고 핵터 세바스티안 공작이 이런 편지를 보내다니?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배신감과 실망감에 전신이 가늘게 떨렸다.

‘제대로 쇼크 받은 모양이군.’

밀턴은 그런 니콜라스 국왕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아무래도 니콜라스 국왕은 자신과 제국의 사이에 국가의 득실을 넘어선 인연과 의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만….

국제 논리라는 것은 대인 관계가 아니다.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아군도 없다.

그저 그때그때 시류를 읽으며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다.

제국의 입장에서 다 무너져 가는 발랑스 왕국에게 무슨 가치가 있을까?

기껏해야 공화국과의 완충 지대로 존재하기만 하면 될 뿐인 나라다.

거기에 비해서 밀턴이 이끄는 레스터 왕국군은 국력도 강성하며 공화국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패가 될 수 있다.

어디가 더 중요할지는 어린애라도 알 수 있었다.

현실을 파악한 니콜라스 국왕은 떨리는 목소리로 밀턴에게 말했다.

“대공은 제국에게 명령을 받는 입장이 아니었던 것이오?”

“당연하지. 우리나라는 그 어떤 나라도 상국으로 모신 적이 없소.”

“그런…. 하지만 제국은? 정녕 제국의 위상이 두렵지 않다는 말이오?”

“그렇소.”

담담하게 대답하는 밀턴의 말에 니콜라스 국왕은 얼굴을 붉히더니 쥐어짜듯이 말했다.

“그건 그대가 제국과 멀리 떨어진 나라에 위치해서 그렇소. 우리나라처럼 제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나라였다면 그렇게 당당하게 나오지 못했을 것이오.”

“무의미한 결과론이오.”

“…….”

“이러면 이랬을 것이다. 저러면 저랬을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학자들이 종종 탁상 위에서 떠들어대기 좋아하는 화제지. 하지만 우리가 그걸 논해서 무엇이 의미 있소.”

밀턴의 한마디 한마디가 칼날이 되어서 니콜라스 국왕의 가슴을 날카롭게 후벼 팠다.

“우리가 지금 처한 현실에 만약은 없소. 공화국은 귀국을 침략했고, 제국은 패하고 물러났소. 실질적으로 지금 발랑스 왕국에 건재한 군이라면 내가 이끌고 온 레스터 왕국군뿐이오. 이게 작금의 현실이오.”

“아….”

니콜라스 국왕은 탄성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밀턴은 그런 니콜라스 국왕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공화국은 우리의 적. 거기다 제국의 원군 요청도 있었지. 그러니 이 전쟁에 최소한의 참전 명분은 있소. 하지만!”

강하게 말을 끊은 밀턴은 니콜라스 국왕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먼 타국에서 피를 흘리는 병사들의 희생을 무가치하게 만들 수는 없소. 귀국에서 우리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면 우리 군은 물러날 것이오.”

밀턴의 입에서 군이 물러날 수도 있다는 말이 처음으로 나왔다.

그러자 니콜라스 국왕은 10년은 늙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간절하게 애원했다.

“그래서는 안 되오. 부디 우리나라를 구해주시오. 대공께서 물러난다면 더 이상 우리나라는 버틸 수가 없소.”

니콜라스 국왕의 태도는 확연하게 변했다.

이전에는 대등한 입장에서 교섭을 하는 듯했고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직시하자 자신이 얼마나 주제 파악을 못 했는지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밀턴이 자신보다 아득하게 위에 있다는 입장의 차이를 깨닫자 그의 특성 중에 하나인 사대주의가 나타났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들어주겠소. 대공께서 원하신다면 이 나라의 어떤 것이든 아끼지 않고 주리다. 그러니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시오.”

그런 니콜라스 국왕의 모습은 간절함을 넘어서 비굴하게까지 보였다.

그리고 밀턴은 그 모습에서 환멸을 느꼈다.

이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이런 게 왕이라고? 진짜 일국을 다스리는 군주의 모습이라고?’

신념은커녕 최소한의 자존심도 없다.

이런 인물이 국가의 정점에 올라서서 나라를 이끌어 왔으니 발랑스 왕국이 오늘 같은 처지가 된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어쨌든, 밀턴으로서는 니콜라스 국왕을 상대로 완벽하게 우위에 점한 상태로 회담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밀턴은 품 안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내서 내밀었다.

출발하기 전에 이미 레이라 여왕이 직접 작성해준 서류였다.

“우리 군이 귀국에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받아야 할 최소한의 협조와 대가입니다.”

밀턴의 말에 니콜라스 국왕은 서류를 확인하고 나서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 서류에는 막대한 참전 보상금과 더불어서 이 전쟁에 대한 모든 권리를 레스터 왕국에 이양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참전 보상금의 규모도 엄청나서 발랑스 왕국의 3년간 국가 예산에 필적할 정도였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전쟁에 대한 모든 권리를 이양한다는 조항이었다.

전쟁에 대한 작전권이나 전시 동원령에 대한 권리.

여기까지라면 제국에게도 약속했던 것이다.

하지만 레일라 여왕이 제시한 조건에는 전쟁 중에 진행되는 권리뿐만 아니라 이 전쟁이 끝나고 난 후의 전후 처리 역시 모두 레스터 왕국에 맡긴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한마디로, 이 전쟁을 어떤 형태로 어디서 끝낼지도 레스터 왕국에서 정하는 것이니 절대 간섭하지 말라.

라는 내용의 서류였다.

“이런 조건을 받아들여서….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오?”

“그건 우리가 알 바 아니오.”

밀턴은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싸늘한 눈으로 니콜라스 국왕을 바라봤다.

그건 마치 네놈 주제에 뭘 더 바라겠느냐? 라는 듯이 차가운 시선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