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196화 (196/257)

제196화

‘고작 이건가?’

한눈에 봐도 그리 유능하지 못했다.

과거 오거스트 국왕과 비슷할 정도로 무능했다.

거기다 사대주의라는 특성은 또 처음 봤다.

발랑스 왕국이 앤드루스 제국에 친화적인 정책 노선을 유지하는 국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국왕이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을 정도인 줄은 몰랐다.

‘어려운 상대는 아니군.’

결론을 내린 밀턴은 일단 한 김 빼서 상대를 초조하게 만들기로 했다.

“원정을 와서 꽤 피곤하오. 할 얘기가 많을 테지만 우선은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겠소?”

잠시 시간을 두고 상대를 초조하게 하려는 밀턴의 의도였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니콜라스 국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하시오. 최대한 편하게 지내도록 준비를 했으니 저녁까지는 푹 쉬도록 하시오.”

그리고 왕궁의 안으로 들어간 밀턴과 그 수하들은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발랑스 왕국의 왕족이 머무는 별궁을 통째로 받아서 시종들의 시중을 받았다.

목욕하는 과정에서 시녀들이 들이대려고 하기는 했지만 밀턴은 피식 웃으며 거부했다.

‘뻔히 보이는 수작질을….’

사람을 회유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리고 미인계는 그중에서도 상당히 유효한 작전이다.

발랑스 왕국에서는 왕궁의 시녀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출신이 좋은 여인들을 밀턴에게 들이밀었지만 통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 마누라가 훨씬 예쁜데 뭐.’

이런 밀턴이다 보니 미인계는 가볍게 실패했다.

그리고 묵은 먼지를 말끔하게 씻어낸 밀턴에게 왕실의 시종이 찾아와서 말했다.

“대공 전하를 환영하기 위해서 왕실에서 연회의 자리를 마련했다고 합니다. 부디 참석해 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밀턴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전쟁 중에는 연회를 즐기지 않는다. 귀국에서도 작금의 시국에서 연회를 연다는 것은 좀 이해가 가지 않는군.”

“아…. 예.”

시종은 갑자기 자신이 꾸지람 비슷한 것을 당하자 어찌 대꾸해야 할지 버벅거렸다.

“그대를 질책하는 건 아니네. 다만 니콜라스 전하에게 가서 그대로 전하도록 하게.”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시종의 말은 니콜라스 국왕에게 전해졌고, 그 말을 들은 니콜라스 국왕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심기가 불편할 때 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삐딱하게 나오는군.”

니콜라스 국왕의 심기는 몹시 불편했다.

일단 연회장에 불러서 분위기를 최대한 좋게 만들려고 했다.

그래야 밀턴을 회유할 수 있고 계속해서 발랑스 왕국을 위해서 싸우게 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밀턴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삐딱하게 나오니 호의를 보이려고 하던 자신이 무안해졌다.

“전하. 일단은 참으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제국군이 실패하고 물러난 지금에 와서는 일단 포레스트 대공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나 더러 새파랗게 어린 대공의 비위를 맞추라는 말인가?”

“전하, 일국의 군주라는 자리는 때때로 쓴 것과 단 것을 가리지 않고 삼켜야 하옵니다. 부디 용단을 내려 주십시오.”

“크으음….”

니콜라스 국왕은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애당초 그는 제국군이 질 줄도 몰랐고, 지금과 같은 상황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전하, 지금 레스터 왕국군이 물러난다면 정말로 나라의 존폐조차 위험합니다. 부디 유념해 주십시오.”

하지만 발랑스 왕국의 귀족 중진들이 밀턴이 이끌고 온 레스터 왕국군의 중요성을 주장하자 어찌 반박할 수도 없었다.

‘후우…. 우리 전하께서는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계신다.’

‘포레스트 대공은 전하의 나이가 반도 되지 않는 나이에 국력을 몇 배로 성장시켰는데 어찌 니콜라스 전하는….’

발랑스 왕국의 중진들은 자신들의 군주가 국난의 위기 속에서도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 답답했다.

자연스럽게 밀턴의 업적과 비교가 되었고 그러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사실 밀턴이 한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한 번 크게 당하고 전선을 뒤로 물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공화국은 발랑스 왕국의 영토 3분의 1 이상을 점거하고 있다.

이걸 되찾기 위해서는 레스터 왕국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런데 무슨 놈의 연회는 연회란 말인가?

백성들이 알면 왕실과 귀족들을 싸잡아서 욕할 일이다.

세바스티안 공작이 제국군을 데리고 돌아가며 곧 2차 원정군이 조직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걸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어디 원정군이라는 것이 그렇게 뚝딱뚝딱 조직해서 바로 파견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더구나 1차 원정군이 제국의 역사에 남을 정도로 굴욕적인 패배를 겪은 시점이다 보니 제국에서 2차 원정군을 보낼지 말지도 솔직히 의문이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발랑스 왕국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밀턴이 이끌고 온 레스터 왕국군뿐인 것이다.

지금 말을 한 사람들은 나름 현실을 인정하고 그런대로 바른 판단을 한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말이다.

정치판이라는 곳은 참으로 신기한 곳이다.

충신이 있으면 매국노가 있듯이 인재가 있으면 병신도 있는 곳이 정치판이다.

고작 레스터 왕국 같은 약소국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는가? 라는 이상한 망집에 사로잡힌 인간들도 있었다.

“크흠…. 전하.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바로 이 인간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볼칸 카니에르 후작.

발랑스 왕국의 안에서도 대표적인 왕실파 귀족이며 사적으로는 니콜라스 국왕의 장인이기도 하다.

그의 가문은 발랑스 왕국의 개국공신 가문이며, 첫째 딸이 이 나라의 왕비이며, 그의 외손자가 이 나라의 왕태자다.

그야말로 귀족 중의 귀족이라고 할 만큼 혈통 하나는 빵빵한 인물이다.

“제가 보기에 포레스트 대공의 태도는 너무 무례합니다. 여기서 마냥 무르게 대하면 국가의 위신에 심각한 해가 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인물이 이렇게 병신 같은 대사를 하는 걸 보면, 확실히 인간의 혈통과 능력은 별 상관관계가 없는 모양이다.

“호오…. 후작은 그렇게 생각하오?”

문제는 이런 말이 니콜라스 국왕에게 잘 먹힌다는 말이다.

니콜라스 국왕은 원래 무능하고 오만한 성정이다.

제국에 관해서는 극단적인 사대주의를 가지고 있으며 항상 제국의 이슈에 귀를 기울였지만 정작 자국의 문제에는 관심이 적었다.

사실 니콜라스 국왕이 국내에 공화주의가 퍼지고 있을 때 제대로 손을 쓰기만 했다면 지크프리트가 이렇게 자기 집 누비듯이 발랑스 왕국의 내부를 휘젓고 다니지는 못했을 것이다.

무능하고 오만한 국왕.

그 국왕의 비위를 맞추는 고위 귀족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외척.

무거운 세금과 착취에 시달려서 떠나간 민심.

본격적으로 칼을 세우고 있는 공화국의 군사적 위협.

솔직히 나라가 망하기에 이것보다 완벽한 조건을 찾기도 힘들 것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그걸 모르고 계속해서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전하. 포레스트 대공이 어찌하여 우리 전쟁에 끼어들었겠습니까?”

“제국에서 명령을 내렸다 들었소.”

“그렇습니다. 제국의 명령에 의해서 그들은 이 전쟁에 참가한 것입니다. 그 말은 제국이 허락을 하지 않는 이상 그들은 좋든 싫든 우리나라에서 공화국과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그렇군.”

니콜라스 국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포레스트 대공이 이렇게 까칠하게 나오는 이유는 뻔합니다. 원군을 파병한 대가로 우리에게 최대한 많은 대가를 요구하려는 것이죠. 지금은 그 기세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과연, 약세를 보이면 곤란하다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어쩌면 포레스트 대공은 무엄하게도 알리나 공주님을 원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뭣이? 그가 내 딸을?”

“그렇습니다. 알리나 공주님은 세상의 누구나 인정할 만큼 아름다운 미인이지 않습니까?”

듣고 있던 귀족들 중에 몇 명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알리나 공주님의 나이는 이제 고작 12세가 아닌가?’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던 간에 니콜라스 국왕과 볼칸 후작의 안에서 망상은 점점 구체화되어 갔다.

“알리나 공주님은 훗날 제국의 황실에 입적하는 것도 바랄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심성과 미모를 갖추고 있으니, 호색한으로 소문난 포레스트 대공이라면 탐을 낼 만하지요.”

제국 황실에서 들었다면 어이가 없어했을 주장이다.

하지만 니콜라스 국왕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가 호색한으로 소문이 났단 말인가?”

“정통한 왕족도 아니고, 아내의 위광으로 대공위에 올랐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셋이나 된다고 합니다.”

“뭐라고? 그럼 내 딸을 네 번째 처로 원한단 말인가!?”

버럭 화를 내는 니콜라스 국왕을 보며 중진들은 이제 영혼이 몸을 떠날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있나?’

‘아니 그보다, 누가 누구를 호색한이라고 한단 말인가?’

니콜라스 국왕이 정식으로 비로 들인 후궁은 일곱 명이다.

거기다 애인 역할을 하고 있는 여인들까지 합하면 몇 명인지 파악도 못할 정도다.

밀턴을 욕할 처지는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니콜라스 국왕의 머릿속에는 정통한 왕족인 자신과 벼락출세한 밀턴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행실을 비교할 수 없다.

라는 이상한 근거가 자리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거기다 카니에르 후작의 입에서는 계속해서 말도 안 되는 주장이 쏟아져 나왔다.

“전하, 강한 모습을 보이셔야 합니다. 포레스트 대공은 결코 원정군을 물리지 못합니다. 저들이 무엇을 요구하던 간에 우리가 기가 죽을 필요는 없습니다.”

“확실히 그렇군.”

뭐가 확실히 그렇단 말인가?

그 후에 몇몇 신하들이 레스터 왕국군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니콜라스 국왕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이미 니콜라스 국왕의 귀는 닫혀 버렸다.

어차피 제국의 명령을 받고 참전한 레스터 왕국이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어떻게 나오든 간에 함부로 군을 물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다소(?) 막 대해도 된다.

라는 이상한 삼단 논법이 자리해 버렸기 때문이다.

하루 동안 왕실에서 몸을 쉰 밀턴은 다음날 바로 니콜라스 국왕과 만났다.

이제 본격적으로 일 얘기를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하루 동안 잘 쉬었소?”

“호의 덕분에 잘 쉬었소.”

밀턴은 인사를 하면서 니콜라스 국왕의 태도가 어제에 비해서 약간 차가워진 느낌을 받았다.

‘설마 삐졌나?’

어제 개념 없이 연회 어쩌고 하기에 한마디 하기는 했지만 설마 그것 가지고 삐졌을까 싶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본론이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전쟁 조약의 협의를 보도록 하지요.”

“그렇게 하지요.”

그리고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두 군주가 마주 앉고 먼저 니콜라스 국왕이 입을 열었다.

“우선 핵심 사안은 제국에서 2차 원정군이 올 때까지 수도가 함락되지 않고 버티는 것이오. 그러기 위해서 귀국의 군대가 공화국을 선제공격해서 압박을 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오.”

그 말에 밀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밀턴의 귀에 니콜라스 국왕의 말이 어떻게 들렸느냐 하면….

[닥치고 가서 싸워라.]

라는 말로 들렸다.

몹시 무례한 말이었고 밀턴은 몹시 빡쳤다.

‘일단 웃자.’

그래도 요물 마누라한테 배운 게 있어서 밀턴은 표정 관리는 확실하게 했다.

미소야말로 협상의 테이블에서 가장 강력한 방패다.

라는 것이 레이라 여왕의 지론이었다.

물론 밀턴이 그 말을 들었을 때, ‘그건 당신이 미소나 그렇지.’라고 말했지만 굳이 레이라 여왕이 아니라도 미소는 포커페이스의 기본이다.

화가 나도 감정을 숨기기 위해서 밀턴은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군사 작전에 관한 얘기를 하기 앞서서 이 전쟁에 대한 정식 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밀턴의 말에 이번에는 니콜라스 국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니콜라스 국왕의 귀에 밀턴의 말이 어떻게 들렸느냐 하면….

[우리가 싸우면 너희는 뭐 해줄래?]

라고 들렸다.

당연히 심기가 불편해진 니콜라스 국왕이었지만 현명한(?) 카니에르 후작에게 미리 언질을 들어 두었다.

레스터 왕국에서 분명 전쟁 참전에 대한 대가를 요구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 어떤 대응을 할지도 대강 정해두고 나왔다.

“물론 귀국이 전쟁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원조할 것이오. 후방의 보급은 우리에게 완전히 맡겨도 좋소. 그리고 원한다면 자국에 징집령을 내려 병력의 원조도 하겠소.”

‘이런 병신 새끼를 봤나?’

밀턴은 어이가 없었다.

지금 니콜라스 국왕은 보급은 자신들이 담당할 테니 너희들은 열심히 싸우라는 말이다.

이건 마치 원군으로 불러 놓고 밥은 먹여 줄게, 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새끼가 나를 핫산 취급하네.’

전생에 들었던 ‘일해라. 핫산.’ 개그를 ‘싸워라. 밀턴.’으로 바꿔 듣는 기분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이건 개그가 아니라 상대가 진심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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