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3화
“철벽 부대 앞으로!”
“옛!”
지크프리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이전의 보병과는 전혀 다른 육중함을 가지고 있는 보병들이었다.
거의 기사 못지않게 두꺼운 판금 갑옷을 입고 커다란 타워 실드를 장비하고 있었고, 무기로 가지고 있는 것은 짧은 글라디우스 하나뿐이었다.
그런 중장보병들이 방패를 다닥다닥 겹치고 있었다.
‘마치 고대 시대의 중장보병 같군. 이걸로 나를 막겠다고?’
지크프리트는 잠시 멈칫했다.
과거, 그러니까 대략 1,000년 전에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과 같은 중장보병들이 대륙을 정복하던 시절이 있었다.
방어력을 우선시한 무장으로 단단한 벽을 쌓고 후방에서 화살로 공격해서 적을 섬멸하는 그런 형태의 병력 구성 말이다.
하지만, 기사의 존재가 등장하며 이런 형태는 사라졌다.
아무리 방어력을 두텁게 한다고 해도 병사는 병사.
기사의 돌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거기다 익스퍼트나 마스터의 존재가 나타나면서 이렇게 중무장을 한 중장보병을 주력으로 하는 군대 구성은 시대의 뒷길로 사라졌다.
그런데 그게 눈앞에 나타나다니?
‘무슨 꿍꿍인지 몰라도, 일단 박살낸다.’
지크프리트는 주저 없이 검을 휘둘렀다.
아무리 두꺼운 갑옷을 입은 중장보병이라고 해도 마스터의 오러 앞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
“쓸어버리겠다!”
지크프리트는 오러 블레이드를 힘차게 휘둘러서 중장보병들의 방패 위로 일격을 그었다.
그리고….
콰아아앙!
“크으윽….”
“으읏….”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병사들이 몇몇 쓰러졌고 방패가 몇 개 날아가기는 했지만 병사들 중에 그 누구도 죽지 않았다.
일개 병사들이 마스터의 일격을 버텨낸 것이다.
“이럴 수가….”
지크프리트는 순간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아무리 갑옷을 두껍게 입은 중장보병이라고 해도 보병은 보병이다.
개인의 실력이 받쳐주지 않는 자들이 무장만 두텁게 해 봐야 방어력의 향상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이건 상식이다.
그런데 그 상식이 무너졌다.
일개 병사들이 마스터의 공격을 버텨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전진하라! 저속 전진!”
심지어 그 중장보병들은 흐트러진 대열을 추스르더니 지크프리트를 밀어내겠다는 듯이 앞으로 전진해 오기까지 했다.
“어떻게…?”
철벽 부대.
밀턴이 합성궁을 사용하는 궁수대와 더불어서 만들어낸 특수 병과였다.
이들이 입고 있는 갑옷은 강철이 아니라 텅스텐이다.
보통의 강철보다 훨씬 더 강하고 무엇보다 가볍다.
전신을 가리는 플레이트 메일이라고 해도 텅스텐으로 제작하면 무게는 가죽 갑옷과 비슷했다.
거기다 갑옷뿐만 아니라 들고 있는 타워 실드 역시 텅스텐으로 만든 것이었다.
전신을 텅스텐으로 무장시켰기 때문에 병사 하나하나에 상당한 돈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 성과는 확실히 놀라웠다.
방어력은 몇 배로 올라갔고, 중장보병 답지 않게 빠른 기동성까지 가지게 되었다.
밀턴은 이 중장보병을 철벽 부대라고 부르고 집단 전술을 철저하게 훈련시켰다.
전쟁터에서 승패의 5할은 보병들의 싸움에서 결정이 난다.
보병의 질이 높으면 정면 대결에서도 승기를 잡을 확률이 크게 올라간다는 말이다.
실제 그 효과가 지금 드러나고 있었다.
철벽 부대는 무려 지크프리트가 이끄는 고스트 4조와 5조의 발을 멈추게 했다.
이건 어지간한 기사단을 동원한다고 해도 이룰 수 없는 성과였다.
사실, 처음부터 1진에 철벽 부대를 배치했다면 병사들의 피해는 적었으리라.
하지만 밀턴은 지크프리트를 확실하게 끝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지 않고 숨겼던 것이다.
지크프리트 본인이 철벽 부대의 존재를 모르는 이상 제 발로 먹잇감에 걸려든 물고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실제 지크프리트는 지금 1진을 돌파했지만 그 뒤에 있는 2차 방어 라인을 뚫지 못하고 애를 먹고 있지 않은가?
“건방진….”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그렇게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검에 오러 블레이드를 제대로 집중시켰다.
이전에 휘두른 일격은 힘에 여분을 충분히 남기고 가볍게 휘두른 것이었다.
전력으로 치면 대략 20퍼센트 정도의 힘만을 담아서 휘두른 것이다.
우우우웅….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오러를 충만하게 담아내자 검이 맹렬하게 진동하며 진한 오러가 백열하듯이 검에 맺혔다.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일격을 가했다.
“어디 이것도 버티나 보겠다.”
강하게 휘둘러지는 일격.
거기에 집단 보병들은 다시 한번 이를 악물고 방패를 겹쳐서 대비했다.
콰아아아앙!
“크아악!”
“커억….”
그리고 이어지는 충둘.
다만 이번에는 결과가 달랐다.
마스터가 작정하고 힘을 모아서 날린 공격은 아무리 단단한 방어벽을 자랑하는 중장보병이라도 어쩔 수 없었다.
방패가 찢어지고 갑옷도 박살이 났다.
그리고 철벽 부대의 병사들 가슴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하지만….
“전열을 메워라!”
“방패를 겹쳐라. 바늘구멍 하나 들어갈 틈을 주지 마라.”
“옛!”
철벽 부대는 공백 지대가 생기기 무섭게 다시 밀집하며 공백 지대를 메웠다.
“제길….”
지크프리트는 상황이 좋지 않음을 알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 정체불명의 중장보병의 방어력은 범상치 않다.
마스터인 자신도 저걸 밀어내려면 일격 일격에 제대로 된 힘을 실어야 했다.
문제는 그렇게 하면 오래 싸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마스터라고 해도 오러의 절대치는 정해져 있다.
그래서 마스터든 익스퍼트든 일반 병사를 상대할 때는 힘을 빼고 공격했다.
그렇게 오러를 절제하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탈진하기 때문이었다.
‘어쩌지? 지금이라도 후퇴를? 아니야. 너무 깊게 들어왔다.’
결국 지크프리트는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후퇴가 불가능하다면 그저 앞으로 향할 뿐이다.
다행이 적이 포위망을 구성하고 있다면 그만큼 중앙은 얇아졌을 것이다.
“내 뒤를 따르라! 이대로 적을 가른다!”
“우오오오오!”
“지크프리트 총사령관님은 무적이다.”
“전진! 전진!”
난감한 상황에 처한 속내와는 달리 강하게 공격을 주장하는 지크프리트의 외침에 공화국의 병사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공화국군은 레스터 왕국군을 반으로 가르며 전진하고 있었다.
병사들이 보기에는 자신들이 이기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무조건 뚫는다.’
지크프리트는 이를 악물고 오러를 끌어올렸다.
병사들의 사기가 오른 지금 자신의 기세가 멈추면 끝이다.
그러니 힘을 아끼지 않고 일격에 강력한 공격을 날려야 했다.
“목숨이 아까운 놈들은 꺼져라!”
지크프리트는 호기롭게 외치며 철벽 부대를 물리쳐 갔다.
“군을 물리지 않는 건가? 역시 정확한 판단력이야.”
밀턴은 뒤에서 지크프리트의 행동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철벽 부대의 견고함에 곤란함을 느끼고 지크프리트가 군을 물렸다면 밀턴으로서는 훨씬 좋은 그림을 만들 수 있었다.
철벽 부대는 견고한 방어력도 장점이었지만 텅스텐의 가벼운 중량 덕분에 기동성도 높았다.
즉, 후퇴하는 적의 후미를 갉아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장보병이 후미를 공격하는 것과 동시에 합성궁을 든 궁병의 공격이 이어지면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지크프리트가 병사들을 희생시켜서 빠져나간다고 해도 자신이 남부 기사단을 이끌고 추적을 하면 앞질러서 퇴로를 차단할 수 있었다.
남부 기사단이 타고 있는 디스트로이종의 주력이 적의 말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이다.
결국 후퇴는 실패하고 더 최악의 상황에 처할 뿐이다.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전진을 선택했다.
일단 전진을 멈추지 않음으로 인해서 병사들은 계속해서 전쟁에 집중할 수 있었다.
같은 전투라고 해도 적을 향해서 전진할 때와 적을 피해서 도주할 때의 병사들의 사기는 천지 차이다.
거기다 지크프리트는 몸소 최선두에 서서 철벽 부대를 걷어냄으로써 자신이 이기고 있는 것처럼 상황을 포장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게 상수는 상수야. 하지만 지크프리트. 똑똑한 너라면 알고 있겠지? 눈앞에 벽을 뚫고 나왔을 때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말이야.”
밀턴의 말에 끝나는 그 시점에서 지크프리트가 드디어 철벽 부대를 가르고 포위망을 뚫었다.
“이대로 적을 관통한다! 절대 멈추지 마라!”
지크프리트는 그렇게 외치며 선두에서 달렸다.
그의 뒤를 고스트 4조, 5조가 받치고 있었고 공화국 병사들 역시 뒤를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돌파 과정에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는지 병사들의 숫자는 확연하게 줄어 있었다.
‘빌어먹을….’
지크프리트는 병사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자신이 선두에 서서 돌파구를 열고 사기를 올렸다고 해도 결국 한계가 있었다.
병사들 중에 상당수가 포위망을 뚫는 과정에서 희생당했고, 자신이 가장 아끼는 부대인 고스트 대원들 역시 명백하게 피로를 보이고 있었다.
선두에서 포위망의 구멍을 뚫은 건 지크프리트였지만 그 구멍이 다시 막히지 않도록 더 넓혀 놓은 것은 고스트였다.
그들은 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비약을 복용해야 했다.
그리고 이제 비약의 복용 시간도 슬슬 떨어져 가고 있었다.
피로와 부상으로 부대의 상황이 엉망인 걸 파악한 지크프리트는 이대로 군을 우회해서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남부 기사단! 전원 돌격!”
“우오오오오오!”
“공화국을 물리치자!”
“대공 전하를 따르라!”
밀턴이 직접 기사들을 이끌고 지크프리트를 향해서 돌진했다.
“제길, 산 넘어 산이군.”
지크프리트는 이를 악물고 자신을 향해서 달려오는 밀턴을 바라봤다.
짐작은 했다.
그 기묘한 중장보병은 무척 견고했지만 그래도 마스터인 자신이 뚫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약간 싸워 보니 적인 자신도 그걸 알겠는데 같은 아군이 모를까?
분명 적은 포위망이 뚫릴 것을 전제로 해서 작전을 세워두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지크프리트였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포위망을 뚫고 적을 관통한 자신들을 향해서 기다렸다는 듯이 밀턴 포레스트가 직접 달려오고 있었다.
‘소문에는 저놈도 마스터라지? 어쩔까? 후퇴? 아니면 전진?’
짧은 순간이지만 지크프리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제길, 선택의 여지조차 없나?’
밀턴을 포함해서 남부 기사단이 타고 있는 말은 디스트로이종이다.
저걸 피해서 후퇴하려고 해도 그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뿐.
‘정면 승부를 해서 놈을 죽이고 상황을 뒤집는다.’
이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고스트는 나를 따르라! 다른 지휘관들은 병사들을 지휘해서 적을 견제하라!”
짧게 지시를 내린 지크프리트는 자신을 향해서 달려오는 밀턴에게 마주 달려갔다.
둘은 서로를 향해서 시선을 떼지 않고 검을 수평으로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서로가 마주한 순간….
“지크프리트!”
“밀턴 포레스트!”
둘은 서로의 목을 노리고 섬광 같은 일격을 날렸다.
밀턴 포레스트와 지크프리트.
이 시대를 호령하는 숙적들이 다시 한번 전쟁터에서 검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