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191화 (191/257)

제191화

전령의 보고를 들은 지크프리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레스터 왕국이라고? 틀림없나?”

“예.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밀턴 포레스트를 나타내는 군기도 확인되었습니다.”

“밀턴 포레스트…. 네가 어떻게 여기에?”

지크프리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밀턴은 레너드의 위에 올라타서 전장을 살피며 말했다.

“오랜만의 전장이군.”

밀턴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피비린내와 흙먼지가 뒤섞인 이 묘한 공기가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현실이 묘한 것이다.

그런 밀턴에게 제롬이 다가와서 말했다.

“주군, 제국의 군을 이끌고 있는 사령관의 이름을 알아냈습니다.”

“누구지?”

“스트라부스 왕국 출신의 라이언 카텔 후작입니다.”

“카텔 후작이라…. 과연, 그 정도 되는 인물이니 저렇게 끈질기게 버티는 거겠지.”

밀턴이 멀리서 봐도 제국군의 포위망 안에서 거칠게 날뛰는 점 하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건 마치 거센 폭풍 속에서 꺼질 듯 말 듯 불을 밝히고 있는 촛불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여기서 죽게 하기에는 아까운 인물이야. 병력의 전개는?”

“모두 끝났습니다.”

제롬의 대답을 들은 밀턴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리고 밀턴은 투구를 눌러쓰고 레너드의 갈기를 한 번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잘 부탁한다.”

밀턴의 말에 레너드는 대답이라도 하듯이 콧김을 거칠게 뿜어냈다.

마치 자신만 믿으라는 듯이 말이다.

“전군 진격하라!”

그리고 밀턴의 명령과 함께 레스터 왕국군 3만이 앞으로 전진했다.

“2군단 전원 우향우! 궁기병대는 후방 대기! 신호를 기다려라! 전령은 3군단의 장창병과 궁수대에 지시를 내려서 이쪽으로 불러라!”

지크프리트는 큰 목소리로 호령을 하면서 스스로 군세를 가다듬었다.

어째서 밀턴이 이 발랑스 왕국의 전장까지 올 수 있었을까?

공화국과 레스터 왕국의 국경 지대가 뚫렸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몇 가지 가설은 생각할 수 있었지만 당장 중요한 것은 밀턴이 이끄는 군세와 맞서 싸우는 것이다.

공화국의 정예들을 지크프리트가 직접 지휘하자 빠르게 레스터 왕국군을 상대할 수 있는 전열이 만들어졌다.

이미 포위망 안에 가둔 카텔 후작에 대한 경계를 흐트러트리지 않으면서도 밀턴을 상대할 수 있는 대형을 갖춘 것이다.

지크프리트이기 때문에 이렇게 정확한 군사 지휘가 가능했던 것이다.

‘괜찮다. 이만하면 충분히 싸울 수 있어.’

전열을 다 갖추고 나서 지크프리트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병력은 충분했고, 병사들의 사기도 높다.

충분히 이길 수 있고, 가능하면 이번 기회에 밀턴을 잡아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머릿속으로 대략적이 작전을 수립한 지크프리트는 바로 첫수를 내밀었다.

“궁기병대 출진! 좌측으로 크게 우회 기동하며 적을 공격하라!”

코브르크 공화국의 궁기병.

지크프리트가 내민 첫 번째 수였다.

발이 빠른 실피드종을 타고 사거리가 긴 특수 석궁을 사용하는 이 궁기병단은 지크프리트가 공화국 전체의 군권을 손에 넣은 후에 특히 공을 들여서 양성했다.

원래 코브르크 공화국 시절부터 강력한 병과였던 이 궁기병단은 지크프리트가 전장에서 무척 애용하는 카드였다.

빠른 기동력과 긴 사거리.

이 두 가지의 장점을 앞세워서 무수한 전장에서 우위를 봐왔다.

다만, 레스터 왕국에서는 실피드 종의 말보다 더 빠른 말들이 있었기에 마냥 똑같이 사용할 수는 없었다.

‘디스트로이종이라고 했던가? 놈들의 기동력과 폭발력을 얕보면 안 되지.’

그래서 지크프리트는 궁기병대를 미끼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적들이 기동력에 더 자신이 있다면 직접 기마대를 이끌고 궁기병대를 요격하려 나올 것이 분명하다.

그때를 노려서 제이크가 이끄는 고스트 본대를 출전시킬 생각이었다.

그 시점에서 노릴 목표는 기마 전력이 빠진 본대여도 좋고, 아니면 따로 튀어나온 기마 부대여도 좋다.

두 가지 선택권을 모두 염두에 두고 상황을 두고 보며 더 유리한 쪽으로 병력을 보낼 생각이었다.

여기서 지크프리트는 한 가지 오산을 했다.

정확히 말하면 정보의 부족이 불러온 오류라고 하는 편이 옳겠다.

지크프리트가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정보가 부족하면 잘못된 결과를 도출 할 수밖에 없다.

지크프리트의 실수는 거기에 있었다.

“코브르크의 궁기병단인가? 오랜만에 보니 꽤 정겹기까지 하네.”

예전에 한 번 상대해 본 적 있는 상대였다.

그때는 제법 경계를 하며 신중하게 타이밍을 노려서 디스트로이종의 기동력으로 잡아먹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밀턴은 피식 웃으며 손을 들었다.

“합성궁 사수 준비!”

밀턴의 명령에 궁병들은 전원 활에 시위를 매겼다.

그리고 밀턴은 적과의 거리를 신중하게 가늠한 후에 외쳤다.

“쏴라!”

그러자 현을 튕기는 맑은 소리와 함께 화살의 날아갔다.

“적이 활을 조준합니다.”

부관의 보고를 듣고 궁기병대를 이끌고 있는 지휘관이 말했다.

“허세다. 신경 쓰지 마라!”

코브르크 공화국 시절부터 궁기병대를 이끌며 싸워온 그는 항상 정확한 거리를 가늠할 수 있었다.

자신이 보기에 아직 50미터는 더 접근해야 자신들도 공격이 닿을까 말까 한 거리였다.

좀 더 유효한 공격 거리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70미터는 더 다가간 후에 공격을 시도할 생각이었다.

‘신중하게 거리를 가늠하고 놈들이 움직이면 빠르게 이탈하자. 놈들의 말은 우리 실피드종보다 더 빠르니 말이야.’

그는 여느 때보다 더 신중하게 거리를 가늠하며 좁히고 있었다.

그런데….

“대위님! 적들이 화살을 쏩니다.”

“멍청한 놈들, 여기까지 닿을 리가…. 큭!”

말을 하던 지휘관은 기겁했다.

분명 아직 닿을 거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적의 화살이 자신에게 닿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화살의 비가 내렸다.

퍼퍼퍼퍽! 퍽퍽!

“크윽….”

“윽….”

“제길, 어떻게 이 거리에서…. 크윽….”

기동력과 사거리가 장점인 궁기병대는 무장을 최소화했기 때문에 방어력이 빈약했다.

무자비한 화살비에 그들은 거의 너무나 허무하게 쓰러졌다.

“어떻게 저 거리에서?”

지크프리트는 크게 놀랐다.

아군의 지휘관이 거리를 착각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적들의 화살이 코브르크 공화국의 특수 석궁보다 훨씬 더 먼 거리에서 닿고 있었다.

“밀턴 포레스트…. 네놈, 그동안 뭘 준비한 거냐?”

지크프리트는 이를 갈았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던가? 참 맞는 말이야.”

밀턴은 흐뭇하게 자신의 결과물을 보며 중얼거렸다.

코브르크 공화국의 특수 석궁보다 긴 사거리의 활의 정체는 목제와 금속을 섞어서 만든 합성궁의 일종이었다.

정식 명칭은 롱 포인트라고 이름 붙인 활이다.

처음에 밀턴이 만들려고 했던 건 총화기였다.

이 세상의 전쟁사를 크게 바꾸게 되겠지만 그래도 지크프리트라는 괴물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문명의 치트키를 쓰려고 했다.

그리고 총을 만들면 더 나가서 탱크나 헬기도 만들고 미사일까지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까지 세웠었다.

물론 그 계획은 실패했다.

밀턴이 가지고 있는 무기에 대한 지식은 너무 추상적이고 단편적인 것이었으며, 비앙카의 마법과 지식도 그렇게 형편 좋은 만능은 아니었다.

다만, 총기를 만들려고 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부산물이 의외로 쓸모를 보였다.

총신으로 쓰기 위한 단단한 금속을 만들기 위해서 비앙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연금술 지식과 야금술 지식을 총동원했다.

그 과정에서 우연하게 만들어낸 금속이 있었다.

가볍고, 경도가 뛰어나며 탄성도 대단했다.

밀턴의 말도 안 되는 억지 닦달에 시달리던 비앙카도 그 결과물을 보고 놀랐을 정도였다.

밀턴은 그 금속을 스탠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실제 지구에 있는 스탠 금속이 이것과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굉장히 유용한 금속이라는 생각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

이 스탠은 가벼운 무게 때문에 무기로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갑옷이나 마갑으로 사용하니 최고였다.

갑옷의 무게가 반 이하로 줄어들자 움직임이 민첩해졌고 경도가 뛰어나서 방어력은 더 올라갔다.

그리고 탄성이 뛰어나서 스탠으로 합성궁을 만들자 코브르크 공화국의 특수 석궁보다 더 뛰어난 사거리가 나온 것이다.

특수 금속 스탠은 디스트로이종과 더불어서 레스터 왕국의 중요한 군사 기밀로 분류되어 엄중하게 관리되었다.

그게 이제 대륙에 첫선을 보이는 것이다.

“비밀로 하기 잘했어. 덕분에 저 징글맞은 천재 놈까지 오판을 하게 했으니 말이야.”

밀턴은 지크프리트가 내보낸 궁기병대를 압도적으로 압살한 후에 전군에 추가 지시를 내렸다.

“기세를 살려서 들어간다. 전진하라! 궁사대는 적이 사거리에 들어오면 자율적으로 쏴라!”

밀턴이 군사의 이동 속도를 높였다.

모처럼 지크프리트의 계산이 틀어진 상황이다.

여기서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치고 들어가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밀턴의 예상은 정확했다.

정밀 기계가 고장 나면 그저 고철 덩어리에 불과한 것처럼 자신의 계산이 틀어지자 지크프리트는 거듭 실수를 범했다.

“큭….”

“커억….”

공화국의 보병 전열에 있던 장창병들 상당수가 레스터 왕국군의 화살에 당하기 시작했다.

지크프리트의 전열에 장창병을 그대로 배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군, 적의 화살이 아군에게 닿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고스트 1조 조장의 말에 지크프리트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실수다. 저 신형 활을 상대하려면 방패병이 앞으로 갔어야 했는데….’

사람인 이상 누구나 실수는 한다고 하지만 지크프리트가 이런 실수를 한다는 것은 그가 정신적으로 많이 흔들렸다는 증거였다.

자신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고 있는 지크프리트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제이크!”

“예. 주군.”

“너와 내가 나눠서 돌입한다. 고스트 2조를 네가 이끌어라. 나는 4조, 5조와 함께 돌입한다.”

“옛!”

열세인 상황을 뒤집기 위해서 지크프리트는 무력을 동원하기로 했다.

제이크와 자신이 직접 나서고, 고스트 중에서도 최고 정예인 2조를 투입할 생각이었다.

‘1조를 투입할 수 없는 게 아쉽군.’

지금 1조는 카텔 후작을 포위하고 있기 때문에 동원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이게 최선의 판단이었다.

‘괜찮을까?’

제이크는 지크프리트의 지시를 따르며 속으로 약간의 꺼림칙함을 느끼고 있었다.

오랫동안 지크프리트를 주군으로 섬겨왔지만 그의 얼굴 표정에 초조함이 서린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지크프리트의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적의 활이 훨씬 더 사거리가 긴 이상 기다리고 있는 건 멍청한 짓이다.

무조건 이쪽에서 달려가서 거리를 좁혀야 했고, 그 거리를 좁히는 선두 병력으로 강력한 기마 전력을 사용하는 건 정석이다.

다만, 머리로는 납득을 하더라도 어쩐지 마음에 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니야. 주군을 믿자.’

제이크는 애써 상념을 떨쳐 버렸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주군의 검.

생각하는 것보다는 그의 검으로써 눈앞에 있는 적을 분쇄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리고 레스터 왕국에 밀턴 포레스트라면 그놈도 왔겠지.’

카텔 후작은 놓쳤지만 그보다 더 가슴 떨리는 만남이 있을 것 같았다.

“돌격하라!”

“오오오오오오!!”

지크프리트의 한마디에 두 줄기의 기마 전력이 소의 뿔처럼 튀어나갔다.

“좌익과 속도를 맞춰라! 동시에 돌입한다!”

지크프리트는 오랜만에 선두에서 말을 달리며 적에게 달려들었다.

평소 전략 전술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지만 그 역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무인이다.

카텔 후작이 한 것처럼 적의 전열을 뚫기에 자신이 유효한 전략적 수단이라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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