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0화
“제법이군.”
카텔 후작이 용맹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며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꺼지기 전의 촛불이라는 걸까요? 확실히 대단하군요.”
제이크 역시 동의했다.
지금 카텔 후작이 보여주는 무위는 이전에 상대했던 버켈 후작보다 확실한 윗줄로 보였다.
“이대로 두면 병사들과 장교들의 피해가 클 것 같습니다. 고스트를 투입할까요?”
제이크의 말에 지크프리트는 잠시 생각했다.
‘저 기세를 봐서는 고스트라고 해도 피해가 없지는 않을 것이야. 차라리 내가 제이크와 함께 직접 갈까?’
기세를 보아하니 카텔 후작의 무위는 지크프리트 본인보다는 한수 위로 보였다.
하지만 제이크가 감당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 자신과 제이크가 합공을 하면 무난하게 잡을 수 있다는 말이다.
계산을 마친 지크프리트가 말했다.
“우선은 맹수를 사냥하기 적합한 사냥터를 만들어야겠군. 2조.”
“예. 주군.”
고스트 2조의 조장이 대답하자 지크프리트가 지시를 내렸다.
“카텔 후작과 병력을 분단시킨다. 지시대로 움직이도록.”
“옛!”
그리고 지크프리트의 지시를 받은 공화국군 전체가 움직임에 변화를 보였다.
“다 죽여 버리…. 큭!”
“날뛰는 것도 여기까지다.”
거침없이 카텔 후작의 뒤를 따르던 제국군의 기사들의 진격이 멈췄다.
그들을 멈춘 것은 고스트 안에서도 정예라고 일컬어지는 2조였다.
2조의 조장은 카텔 후작을 뒤따르는 기사단의 측면을 공격한 것이다.
“네놈들이 고스트냐?”
“그래. 우리도 꽤 유명해졌군.”
“그렇지. 그럼 죽어라!”
길게 말을 섞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제국군의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건방진 것들. 다 죽여라.”
2조의 조장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2조의 조원들 전원은 비약을 복용하고 제국의 기사단을 공격했다.
“후작님! 속도를 늦춰 주십시오. 뒤에 기사들이 따라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카텔 후작의 근처에 바싹 붙어서 움직이던 기사들은 후속 병력이 따라오지 못한 것을 알고 카텔 후작에게 말했다.
하지만 카텔 후작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미 늦었다! 따라올 수 있는 이들만 내 등을 따라와라!”
카텔 후작은 자신을 따르던 기사단 대부분이 낙오했다는 것을 알고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더욱더 거칠게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달려갔다.
‘나를 고립시킬 생각이군. 그래…. 좋다. 얼마든지 해 봐라.’
그도 알고 있었다.
지금 이건 함정이다.
자신을 고립시켜서 포위해서 잡아 버리겠다는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함정? 거기에 걸려봤자 최악의 결과는 자신의 죽음뿐이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결사대가 죽음을 두려워할까?
그는 오히려 이 함정을 기회로 보고 있었다.
‘나를 사냥터로 몰아넣는다면 기꺼이 가주마. 단, 결코 쉽게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카텔 후작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은 충분히 거물이었다.
그리고 자신 정도의 거물을 사냥하고자 한다면 상대 쪽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인물이 나설 것이 분명했다.
‘가능하면 지크프리트, 아니면 제이크라는 놈이라도 좋다. 둘 다 덤벼도 상관없다. 반드시 한 놈은 저승길 동행으로 데리고 가겠다.’
결사대로서의 임무는 이미 수행되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전과로 지크프리트나 제이크와 함께 죽을 수 있다면 죽는다고 해도 웃으면서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잔챙이들은 꺼져라!”
카텔 후작은 거칠게 오러 블레이드를 뿌리면서 전방의 병사들을 베어 버렸다.
“으…. 으으….”
“이 괴물….”
전신에 피갑칠을 하고 잔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카텔 후작의 모습은 공화국의 병사들에게 있어서 감당 못 할 맹수 그 자체였다.
“공화국에는 겁쟁이들밖에 없느냐? 내 목을 날리고 이름을 날리고 싶은 놈이 있다면 얼마든지 와라!”
카텔 후작이 호기롭게 외치자 공화국의 장교 한 명이 거기에 응했다.
“나는 대 공화국의 페트릭 중위다! 나와 승부를 겨루자!”
당당하게 외치며 달려오는 적을 보며 카텔 후작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애송이가….”
“간다!”
거물을 눈앞에 두고 일어난 공명심일까?
아니면 카텔 후작도 이제 지쳤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페트릭이라고 이름을 밝힌 남자는 용맹하게 달려들었다.
다만….
“건방진 놈!”
지쳐도 호랑이는 호랑이.
늑대가 덤비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자명한 이치였다.
한 번의 번뜩임과 함께 카텔 후작의 오러 블레이드가 선을 그었다.
“크…. 막…. 막았는…. 데.”
카텔 후작의 일격은 페트릭 중위의 검과 갑옷, 그리고 그의 신체까지 그대로 양단해 버렸다.
단 일격에 상대를 처리한 카텔 후작은 그대로 호탕하게 웃으며 앞으로 달려갔다.
“하하하…. 죽기에도 죽이기에도 참으로 좋은 날이구나!”
“이 미친…. 크악!”
“끄아아악!”
카텔 후작의 거침없는 진격에 공화국의 병사와 장교들이 대거 희생되었다.
그런 카텔 후작의 모습에 뒤를 따르던 기사들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쩌면 가능한 것 아닐까?’
카텔 후작의 무위와 대활약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지금이라도 이 전쟁을 뒤집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될 정도였다.
물론 그건 오산이었다.
까아앙!
카텔 후작의 거침없는 공격이 처음으로 막혔다.
그런 카텔 후작의 공격을 막아낸 남자는 검은색 해골 투구를 쓰고 있었고, 어느새 카텔 후작의 주변에는 그런 인물들이 가득했다.
‘여기인가?’
상대가 제법 강자라는 것을 느낀 카텔 후작은 우선 뒤로 물러나서 거리를 벌리며 말했다.
“네놈은 누구냐?”
“고스트 1조의 조장입니다.”
“이름을 물었다만?”
“저희는 고스트. 이름은 없습니다.”
“기분 나쁜 놈들이군.”
자신의 일격을 막아낼 정도의 무위라면 결코 범상치 않은 능력의 강자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니?
‘고스트라…. 저놈들에 관해서도 좀 더 조사했어야 했어.’
고스트의 존재는 이제 제법 알려져 있었다.
지크프리트 직속의 병력.
공화국 최고의 정예들.
하지만 이 이상의 정보는 거의 흘러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그 고스트를 이끄는 제이크라는 인물이 마스터라는 것도 이번 전쟁에서 알려졌을 정도니 오죽하겠는가?
그만큼 고스트에 대한 정보 통제가 철저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여기가 종착지인 모양이군.’
카텔 후작은 주변을 돌아보며 조금씩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신과 자신을 따라온 기사 서른여 명을 둘러쌓고 둥근 포위망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 포위망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검은색 해골 투구를 쓰고 있는 인물들로 그들 하나하나가 최소한 익스퍼트 정도는 되어 보였다.
공화국의 최고 정예 고스트.
그 고스트 안에서도 가장 정예들만을 모아 놓은 1조.
그들이 직접 나서서 카텔 후작을 포위한 것이다.
카텔 후작은 여기가 자신의 마지막 무대라고 직감했다.
그러자 그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나와라! 지크프리트! 네놈이 바라는 대로 나 라이언 카텔이 왔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카텔 후작의 고성에 주변 기사들은 영문을 몰라 했다.
하지만 고스트들의 포위망 한쪽이 열리더니 거기에서 두 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중의 한 명이 카텔 후작에게 말했다.
“소원대로 나타났소. 라이언 카텔 후작.”
“네가 지크프리트군. 웃기는 얘기지만 정말 만나서 반가워.”
카텔 후작이 웃으면서 하는 말에 지크프리트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는 카텔 후작을 모습을 잠시 관찰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역시 함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들어왔던 거군.”
“그렇지.”
“대단한 배짱이오.”
“흥, 그냥 이 판국에 더 가릴 게 없을 뿐이었다. 어쨌든….”
카텔 후작은 검을 한 번 휘둘러서 피를 털어낸 후에 그 검극을 지크프리트에게 겨누며 말했다.
“여기까지 와서 빼지는 않겠지? 네놈이냐? 제이크냐? 둘 다 온다고 해도 사양하지 않겠다.”
카텔 후작의 무모한 도발에 좌중의 인물들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적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마스터 둘을 동시에 도발하다니?
설령 저게 허세라고 해도 대단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상처 입은 호랑이인가?’
지크프리트는 그런 카텔 후작의 모습에서 위험한 맹수의 모습을 봤다.
지치고 여기저기 상처도 입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차하면 목 줄기를 물어뜯길지도 모를 위험성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결론은 상대하기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군.’
지크프리트는 한숨을 내쉬고 1조의 조장에게 말했다.
“1조장.”
“예. 주군.”
“너희에게 맡기겠다.”
“예. 알겠습니다.”
지크프리트와 1조 조장의 말을 들으면서 카텔 후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크프리트 네놈! 도망갈 생각이냐?”
카텔 후작의 호통에 지크프리트는 담담하게 말했다.
“좋을 대로 생각하시오.”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지크프리트이지만 그는 무인이 아니다.
강자와 자웅을 겨뤄서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고 싶은 치열한 투쟁 본능은 그에게 없었다.
오히려 지크프리트의 옆에 있는 제이크가 몸이 근질거리고 있었지만 그 역시 자신의 욕구보다는 주군의 명령이 우선인 인물이다.
결국 카텔 후작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고스트 1조의 정예들이었다.
“이 비겁한 놈!”
카텔 후작은 울분을 토하며 지크프리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의 앞을 고스트 1조가 막아섰다.
“우리가 상대요. 카텔 후작.”
“꺼져라!”
카텔 후작은 거칠게 날뛰었지만 고스트 안에서도 최정예인 1조가 펼친 포위망은 상처 입은 그가 쉽게 뚫을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하지 않았다.
그를 따르는 기사들이 최대한 도우려고 했지만 고스트 1조는 너무 강했다.
그들이 비약을 복용하면 전원이 익스퍼트 상급의 실력을 발휘하는 강자들이었다.
“크으…. 이 비겁한 것들….”
“커억…. 분하다.”
한 명, 한 명.
제국의 기사들이 바닥에 몸을 눕히고 카텔 후작 역시 점점 상처를 입어갔다.
“지크프리트 네 이놈! 비겁하다! 나와 승부하라!”
카텔 후작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분전하며 거듭 지크프리트를 도발했다.
패배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강적을 바라며 함정에 몸을 던졌다.
그런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게 강자가 아니라 승냥이 떼의 합공이라니?
이건 아니다.
이렇게 죽어서는 분해서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지크프리트으으으으!!!”
카텔 후작은 울분의 눈물을 쏟으며 지크프리트의 이름을 불렀다.
카텔 후작의 부르짖음은 지크프리트를 동요시키지는 못했다.
거기에 흔들리기에는 지크프리트의 심장은 너무 차갑고 단단했다.
하지만….
“주군, 허락하신다면 제가 저 남자의 마지막을 장식해 주겠습니다.”
지크프리트의 심복인 제이크의 마음에는 와닿았다.
지크프리트를 향한 충성심이 우선이긴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뜨거운 피가 흐르는 무인이었다.
카텔 후작같이 훌륭한 무인을 눈앞에 두고 있으면 피가 끓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안 돼.”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이 제이크의 부탁을 거절했다.
“주군, 저를 믿어 주십시오. 설령 저 남자가 최상의 상태라고 해도 저는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제이크는 포기하지 않고 거듭 간청했다.
보통 제이크가 했던 말을 바꾸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번 경우는 그로서도 많이 아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좀처럼 포기를 할 수 없었다.
그런 제이크에게 지크프리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고 있다. 제이크. 너는 나의 검. 네 강함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하지만 저 남자는 지금 위험하다. 승패를 논하는 결투를 하기 위해서 내 함정에 뛰어든 것이 아니다. 우리 둘 중에 한 명이라도 좋으니 걸리면 저승길로 데리고 갈 생각으로 뛰어든 것이지.”
“그렇다고 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너 답지 않게 고집을 부리는구나.”
“…….”
대답하지 못하는 제이크에게 지크프리트가 혀를 차며 말했다.
“쯧, 어쩔 수 없군.”
이 정도로 간절한 바람이라면 마냥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허락한다.”
결국 지크프리트는 마음을 바꿨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크프리트가 가장 믿고 있는 오른팔인 제이크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제이크는 환하게 웃으며 카텔 후작을 상대하기 위해서 달려갔다.
아니 그렇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급보입니다. 아군의 우측에서 적군이 나타났습니다.”
“적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변수에 지크프리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세바스티안 공작이 병력을 남긴 건가? 아니야. 있을 수 없어.’
“적의 정체는 파악했는가?”
“지금 확인 중입니다.”
전령이 그렇게 대답한 순간 다른 전령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급보입니다. 적의…. 정체는….”
숨을 가쁘게 내쉬는 전령에게 지크프리트는 드물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다그쳤다.
“어서 말하라.”
“예. 적의 정체는…. 레스터 왕국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