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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187화 (187/257)

제187화

제국군의 선봉군을 완벽하게 괴멸시킨 지크프리트는 그대로 군을 본진으로 물렸다.

그 본진에는 지크프리트가 미리 지시를 내려 준비한 완벽한 방어 포진이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제국군을 맞이한다.”

“옛!”

지크프리트는 직접 병력을 배치하고 상황을 점검하며 신중을 기했다.

그의 계산대로라면 이번 전투가 발랑스 왕국에서의 마지막 고비가 될 것이다.

꼼꼼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마침내 제국의 본대가 도착했다.

“허어…. 저게 놈들의 본거지인가?”

적의 본진을 보고 세바스티안 공작은 감탄했다.

지도대로라면 여기는 강을 배후에 끼고 있는 작은 언덕이 있어야 했다.

처음에는 적이 어째서 여기에 진지를 차렸는지 의아했다.

뒤에 강을 끼고 있어서 후퇴가 용이하지 않으며 언덕의 고저차가 약간의 이득이 될지는 몰라도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실제로 와서 보니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공화국은 작은 언덕 위에 완벽한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다.

언덕 전체에 석벽과 목책으로 미로 비슷한 것을 만들어 냈고 군데군데 높은 망루를 만들어서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시야를 확보했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언덕 자체의 높이도 듣던 것보다 높아 보였다.

이 정도면 사실 작은 산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높이였다.

“지형은 완벽하게 이용해서 요새를 만들었군. 어찌 생각하나 카텔 후작.”

세바스티안 공작이 카텔 후작을 불러 의견을 구했다.

비록 그의 조언을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카텔 후작이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참모들보다 훨씬 더 유능하다는 것은 이제 인정한 것이다.

카텔 후작은 세바스티안 공작의 앞에 서서 적의 요새를 차분하게 관찰하더니 말했다.

“완벽한 산성(山城)입니다.”

“요새가 아니라 성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건가?”

“예. 생각해 보면 지크프리트는 원래 힐데스 공화국 출신입니다. 그리고 힐데스 공화국의 특기가 바로 산악전이죠.”

“소문은 들었네. 그렇게 대단한가?”

“공화국이 3국이었던 시절, 가장 까다로운 병과 중에 하나였습니다. 산속에서 그 놈들과 조우하게 되면 세 배, 많을 때는 다섯 배의 병력이 잡아먹히는 경우도 종종 있었죠.”

“흐음…. 저 요새, 아니 산성의 안으로 들어가면 그런 놈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건가?”

“예. 벽을 단단히 친 것이 아니라 요새로 만든 것도 그래서일 겁니다. 저것은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낸 성이 아니라 우리를 유인해서 격퇴시키기 위한 함정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렇단 말이지.”

세바스티안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신중하게 몇 가지 시도를 해 보지.”

그리고 세바스티안 공작의 명령대로 제국군의 공성이 시작되었다.

최초로 시도한 작전은 공성 병기를 날려서 산성의 미로 자체를 박살내 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쏴라!”

투웅!

거친 소리와 함께 공화국의 투석기가 먼저 커다란 바위 덩어리를 날렸다.

콰직!

거기다 그치지 않고 먼 거리의 망루에서 쉬지 않고 화살이 날아들었는데 그 위력이 범상치 않았다.

“크윽…. 팔…. 내 팔!”

“씨발, 무슨 화살이 방패를…. 크윽!”

결국 공성 병기를 운용하던 병사들은 집중 표적이 되어서 제대로 된 공격도 하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안 되는군. 고저 차이가 방해를 하고 있어.”

“예. 높낮이 때문에 무조건 적의 공격이 먼저 닿습니다. 그리고…. 저 정확한 공성 병기의 조준도는 아마 하노버슈 공화국의 특수 공병일 겁니다. 공성 병기를 다루는 데 이골이 난 놈들이죠.”

“저 위력적인 화살은 코브르크 공화국의 특수 석궁일 테고 말이야.”

“예. 원거리에서 맞서는 것은 무리일 듯합니다.”

“어쩔 수 없군. 그럼 정면으로 한번 해볼까?”

그리고 세바스티안 공작의 명령에 따라서 대략 5,000의 군대가 움직였다.

그들은 각각 천 단위로 나눠져서 각각 다른 입구로 산성에 돌입했다.

산성의 입구 자체가 다섯 개였기 때문에 그중에 어디가 가장 약하고 가장 위험한지 알기 위해서 일단 정찰을 보낸 것이다.

무리하지 말고 위험하면 즉시 물러나도 좋다는 명령을 내리고 보낸 자들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적의 산성 안에서 무언가 소음이 들리는 듯했다.

“전투가 벌어졌군요.”

“한 번에 성과가 나온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우선은 저들이 귀환해서 정보를 가져오는 것이 우선일세.”

그리고 세바스티안 공작은 차분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사령관으로서 비정한 판단일 수 있지만 전쟁을 수행하고자 한다면 때때로 인간을 숫자로만 세어야 할 때가 있다.

저들이 산성을 돌파하지 못해도 좋으니 어느 정도의 정보만 가지고 귀환한다면 다음 돌입대가 그 정보를 이용해서 보다 깊숙하게 파고들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공략해 주마.’

세바스티안 공작은 서늘한 눈을 하고 산성을 바라봤다.

하지만….

두 시간 후.

세바스티안 공작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지크프리트 네 이놈.”

이를 갈며 산성의 꼭대기 부분을 노려보는 세바스티안 공작의 표정은 극도로 험악했다.

두 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저 산성 안의 소음도 완전히 사라졌다.

문제는 돌아온 이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저 산성을 향해서 5,000의 병력을 밀어 넣으면서 그는 마음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그들의 피해가 막심할 것이라고 예상도 했다.

하지만 설마 아무런 정보도 가져오지 못하고 전부 전멸해 버릴 줄은 꿈에도 몰았다.

“이번에는 1만, 아니 2만을 선두로 투입한다. 그리고 기사단도 움직인다.”

세바스티안 공작의 말에 참모들이 움찔하며 따르려 했지만 카텔 후작이 나서서 만류했다.

“위험합니다. 공작님. 그렇게 야금야금 병력을 밀어 넣는 것이야말로 적들이 노리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어쩌란 말인가?”

“지크프리트 놈이 작정하고 준비한 산성을 공략하고자 한다면, 앞뒤 가리지 않고 전 병력을 밀어 넣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저하고 공작님이 선두에 서서 길을 열어야 하겠죠.”

“그렇다면 그렇게 하지. 지금 당장 준비하게.”

“끝까지 들어 주십시오. 설령 그렇게 한다고 해도 과연 그게 통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놈은 우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저 미로를 만들었습니다. 당연히 우리가 들어왔을 때의 대응책도 마련해 두었겠죠.”

“으음….”

“앞에서도 말했지만, 지크프리트를 얕보면 안 됩니다. 놈은….”

카텔 후작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힘없는 목소리로 마저 말했다.

“놈은 진짜 전쟁의 천재입니다.”

“전쟁의 괴물이겠지.”

세바스티안 공작도 힘없는 목소리로 그 사실을 인정했다.

솔직히 이 전쟁을 시작하면서 승리를 당연시하며 움직였지만 적이 이 정도의 강적일지는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오는 게 아니었어. 그 친구들이 왔다면 차라리 나보다 나았을 텐데.’

세바스티안 공작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핵터 세바스티안 공작은 제국의 마스터를 분류할 때 5위로 분류한다.

그가 오랫동안 제국을 수호해온 최고령자이니 다른 마스터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순수한 실력으로 보면 그가 절대 이기지 못할 상대가 셋이나 있었다.

베이커 고담 후작.

도미닉 플로리안 공작.

크리스챤 슈바이커 공작.

이 세 명이라면 제국이 이런 치욕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특히 크리스챤 슈바이커 공작.

그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저런 산성의 미로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그 괴물 같은 놈이라면 그냥 단신으로 가서 닥치고 다 부숴 버렸겠지.’

같은 마스터가 봐도 한 차원 다른 경지에 있는 무력의 소유자.

그게 제국의 최강자 크리스챤 슈바이커 공작이었다.

참고로, 세바스티안 공작은 그런 슈바이커 공작의 스승이다.

슈바이커 공작이 30대 초반일 때 이미 경지를 추월당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쯧, 없는 놈 아쉬워해서 뭐하나?”

세바스티안 공작은 밉살스런 제자가 그리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공격 하는 게 무리라면… 남은 건 고립 작전 정도겠군.”

세바스티안 공작의 말에 카텔 후작이 처음으로 동감한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적의 토성이 강을 배후에 등지고 있기 때문에 꽤 버티긴 하겠지만…. 저렇게 복잡한 미로 같은 구조의 성에 물자를 많이 비축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음…. 일단 열흘 정도 가둬보지. 그리고 혹시 모르니 강의 상류에 정찰대를 보내 보게.”

“무엇 때문입니까?”

“저 물줄기를 끊거나 막을 수 있으면 해봐야지.”

“좋은 생각입니다.”

그렇게 제국의 고립 작전이 시작되었다.

“적은 더 들어오지 않는 건가?”

“예. 주군. 처음에 5,000의 정찰병을 밀어 넣은 후에는 포위망을 구축하고 더 이상의 공격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크프리트는 고스트 2조 조장의 보고를 들으며 쓰게 웃었다.

“너무 심하게 밟았군. 이럴 줄 알았으면 약간의 빈틈을 보여주는 건데 말이야.”

지크프리트는 다소 아쉬운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 산성은 지크프리트가 이 지형을 봤을 때 머릿속에서 번뜩이는 영감을 현실로 구현한 걸작이었다.

지형을 보고 이 전쟁의 마무리 과정까지 그림을 그렸을 때 가장 최후의 방어선으로 생각한 것이 이것이었다.

이 자리에 본진을 만들었을 때부터 이미 공사를 진행했고, 막상 만들고 나니 생각한 것보다 더 좋은 걸작이 나온 것이다.

산성의 방어를 완벽하게 살리기 위해서는 지크프리트 수준의 지휘력과 판단력이 필요하겠지만 일단 제대로 할 수만 있다면 2만의 병력으로 10만의 대군도 기꺼이 잡아먹을 수 있는 흉악한 괴물이 나온 것이다.

지크프리트 본인도 이걸 정면으로 공격하는 건 내키지 않을 정도였다.

더구나 지금 제국군의 군대는 정예를 상당수 잃고 대다수가 발랑스 왕국에서 강제로 징집한 병력이다.

지크프리트로서는 적들이 오지 않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어쩔 수 없지. 당초의 계획대로 간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지크프리트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쏴라!”

지휘관의 명령과 함께 화살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평범한 화살이 아니다.

코브르크 공화국 출신의 기마 궁병들이 사용하는 특수 석궁이다.

물론 그들이 타고 있는 말 역시 대륙의 3대 명마로 평가 받는 품종인 실피드 품종이고 말이다.

그들이 야밤을 틈타서 몰래 다가와서 화살을 날린 것이다.

“크윽….”

“일어나! 모두 일어나!”

“적습니다!”

제국군은 빠르게 대응했다.

“추격하라!”

기사단이 부랴부랴 말을 달려서 기마 궁병을 쫓았다.

하지만 뒤 늦게 쫓아서 거리를 좁히기에는 상대가 너무 빨랐다.

그들은 그대로 산성으로 후퇴했고 기사단은 급하게 정지했다

“정지! 정지하라!”

“서둘러 퇴각하라! 여기에 접근하면…. 큭!”

야밤이라서 자신도 모르게 너무 깊숙하게 쫓아온 기사단에게는 산성의 망루에서 대기 중이던 석궁병들의 화살이 쏟아졌다.

결국 기사단은 변변한 성과도 못 올리고 피해만 입고 후퇴해 버렸다.

어쨌든 기사단이 신속하게 대응한 덕분에 야습의 피해는 생각보다 적었다.

불화살을 날린 석궁병들 때문에 막사가 약간 불타기는 했지만 빠르게 진압했고 별 피해는 없었다.

“전열을 재정비하라.”

“빠르게 움직여라. 정리가 빨라야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다.”

지휘관들은 병사들을 독려하며 피해 상황을 파악하고 재정비를 서둘렀다.

그리고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고 병사들은 다시 잠에 들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야습이다!”

“적의 습격이다!”

병사들은 자리에서 다시 한번 벌떡 일어나야 했다.

또다시 공화국의 야습이 시작된 것이다.

여전히 본격적인 야습은 아니고 기마 궁병이 먼 거리에서 치고 빠지는 정도였다.

문제는 이걸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다는 것이다.

병사들은 화살을 피해 은폐하고 숨었다. 그리고 한 명이 중얼거렸다.

“이놈들 설마 이걸 밤새도록 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 말을 들은 주변의 병사들은 몹시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저 말이 현실이 될 것 같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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