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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186화 (186/257)

제186화

“주군. 신호입니다. 적이 반전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딱 좋군.”

지크프리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지크프리트가 노리는 것은 적을 그냥 패배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전멸.

그걸 노리고 준비한 함정이 이것이었다.

그리고 보리스 백작이 자신을 노리고 군을 반전시킨 순간 이 함정은 완성되었다.

아무리 정예군이라고 해도 군의 진행 방향을 갑자기 180도 바꾸는 것은 어렵다.

그것도 한창 전투 중일 때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군이 후미를 잡혔을 때 크게 피해를 입는 것이다.

보리스 백작은 그 후미를 직접 정리하기 위해서 자신이 주력을 데리고 움직인 것이다.

거기다 후미에 나타난 것이 적의 총사령관이니 후미를 우선적으로 정리해야 할 명분은 더욱더 커졌다.

정석대로라면 정석대로의 대응이지만 결국 이것이 지크프리트의 노림수였다.

만약 보리스 백작이 후미를 무시하고 어떻게든 전방을 뚫고 빠져나가는 것을 선택했다면 막대한 피해를 입기는 해도 어느 정도의 병력은 온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선두에서 최후미로 움직이는 동안 군의 대열은 크게 흐트러졌고, 일시적으로 명령 체계마저 듣지 않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 버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정돈되겠지만 그걸 그냥 내버려둘 지크프리트가 아니었다.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지크프리트의 외통수가 펼쳐졌다.

“조준!”

지크프리트의 명령이 떨어지자 고스트 대원들 전원이 활을 매겼다.

단, 그냥 활이 아니라 화살촉에 기름을 먹인 헝겊을 감아서 불을 붙인 불화살이었다.

그리고….

“쏴라!”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불화살들이 하늘을 날았다.

“불화살?”

“설마?”

하늘로 날아오른 불화살에 제국군의 지휘관들은 불길한 상상이 들었다.

그리고 불화살이 떨어진 후 그들은 자기 상상이 맞았음을 알았다.

“불…. 불이다!”

“빨리 꺼. 제길 어서…. 크악!”

“으아아아아!”

불화살의 불은 순식간에 번져갔다.

그들이 있는 2진의 목책에는 기름이 잔뜩 먹여져 있었고 지면에도 불이 붙기 쉬운 마른 장작과 짚단 따위를 잔뜩 깔아둔 상태였다.

애당초 철저하게 준비된 화공이었던 것이다.

“진정하라! 우선 불을 끄고 전열을…. 크악!”

몇몇 지휘관들인 상황을 통제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지크프리트는 절대 이 상황을 통제할 수 없도록 적들의 전열이 흐트러진 타이밍에 화공을 펼쳤다.

거기다 불화살은 전방의 방어 라인에서도 날아오고 있었다.

더 이상 이 전장은 통제가 불가능했다.

“이럴…. 수가….”

보리스 백작은 자신이 완벽하게 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사방에서 타오르는 불길과 혼란에 빠진 병사들.

어떻게 해도 이 상황을 되돌릴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확실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완전히 놀아났다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계획된 화공이었다고? 그렇다면 나는…. 나는 도대체….’

보리스 백작은 내심 자신이라면 지략으로 누구와 견주어도 빠지지 않는 인물이라고 자평하고 있었다.

물론 터무니없는 착각이다.

그가 성실하게 전략 전술을 공부한 것은 사실이지만 진짜 전략가라는 것은 책만 읽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상당한 경험을 쌓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전략가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 가장 큰 문제는 상대에 있었다.

설령 보리스 백작이 현장에서 노련하게 경험을 쌓고 훌륭한 전략가가 된다고 해도 결과는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상대가 괴물이기 때문이다.

“어찌 이럴 수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려가는 절망 속에서 보리스 백작은 그저 주저앉아 버렸다.

보리스 백작 참패.

5만의 선봉군 전멸.

제국군의 본대에 전해진 소식은 충격이었다.

승승장구하며 앞길을 개척하고 있던 보리스 백작마저 죽어 버렸다.

사실 보리스 백작의 가치는 앞에 전사한 버켈 후작이나 모론 후작에 비할 바가 아니다.

다만 이 패배가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승리를 확신했던 전투에서 패배를 했기 때문이다.

공화국은 버켈 후작과 모론 후작을 상대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전력을 비웠다.

그러니 지금 서둘러 공격해야 한다, 라는 것이 참모들의 의견이었다.

라이언 카텔 후작이 방어를 주장했던 것과 정반대의 의견을 주장했던 참모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것은….

“지금이야말로 서둘러서 본진을 이끌고 공격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적들이 화공으로 보리스 백작과 선봉군을 전멸시키긴 했지만 그것은 바꿔 말하면 전력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망설이면 보리스 백작의 희생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세바스티안 공작님. 부디 바른 판단을 내려 주십시오.”

참모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총공격을 주장했다.

‘미친놈들….’

라이언 카텔 후작은 한쪽에서 팔짱을 끼고 그런 참모들을 지켜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머리로는 저 참모들도 지금 자신들의 주장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총공격을 주장하는 것은 자신들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이 전쟁은 이제 이겨도 이긴 게 아니다.

병력을 상당수 잃어버린 것은 물론이고 마스터도 두 명이나 전사했다.

이런 전쟁에서 패전을 하게 되면 이 전쟁에 참가했던 참모진들은 그 책임을 피할 수가 없게 된다.

지금 이들은 전쟁에 유리한 의견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자신들이 유일하게 면죄부를 얻을 수 있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아직 본진에는 세바스티안 공작과 카텔 후작이라는 두 명의 마스터가 있다.

병력도 아직 10만이나 남았다.

그리고 적들도 피해가 없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총공격을 선택해서 공화국군을 몰아내기만 한다면 이 전쟁은 어떻게든 승전이라는 형태로 포장할 수 있다.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피를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이기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딴 놈들이 제국의 인재라니? 확실히 제국은 너무 오랫동안 평화로웠군.’

카텔 후작은 이제 제국에 진저리가 나기 시작했다.

한편, 세바스티안 공작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카텔 후작.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세바스티안 공작이 질문을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카텔 후작의 발언권이 생겼다.

참모진들의 불안한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카텔 후작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마음을 먹었다.

‘일단 할 말은 다 해버리자.’

그리고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이번 원정은 실패입니다.”

단호하게 원정의 실패를 단정 짓는 카텔 후작에게 참모진들은 두 눈을 부릅떴다.

“더 이상 병력을 잃기 전에 후퇴하고 물러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참모들은 크게 흥분하며 말했다.

“누구 마음대로 실패라는 겁니까?”

“전쟁은 이제부터입니다.”

“당신이 그러고도 마스터입니까? 이 겁쟁이. 비겁자 같으니라고! 이래서 제국 출신이 아닌…. 읏.”

카텔 후작을 강하게 비난하던 참모 한 명이 자신의 목덜미에 닿아 있는 서늘한 칼날에 입을 다물었다.

“겁쟁이에 비겁자? 이 정도 모독을 당했으면 결투를 신청해도 괜찮은 거겠지?”

“으…. 으읏….”

마스터의 진득한 살기에 상대는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제국 출신이 아니라고 해도 카텔 후작은 마스터다.

기본적으로 귀한 인력이고 설령 그가 결투로 인해서 자신을 죽인다고 해도 제국에서는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다.

“요…. 요요…. 용…. 용서를….”

“알았다. 네 죽음으로 용서를 해 주마.”

카텔 후작의 눈이 싸늘해진 그때.

“그만두게 후작.”

세바스티안 공작이 나서서 카텔 후작을 말렸다.

그러자 카텔 후작도 살기를 거두었고 울상을 지었던 참모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더니 기절해 버렸다.

그의 바지 사이가 축축해진 것을 보고 카텔 후작은 피식 웃고 말았다.

‘어디를 가도 정치질에 여념 없는 놈들은 간이 콩알만 하군.’

과거 스트라부스 왕국에도 이런 놈들은 없지 않았다.

상대할 가치도 없는 소인배.

카텔 후작은 더 신경 쓰지 않고 세바스티안 공작에게 말했다.

“공작님. 이제 슬슬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야 합니다. 그래야 남은 병력을 무사히 보전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자네가 말했던 봉쇄책은 어떤가? 우리가 후방으로 물러나서 적을 막는 사이 레스터 왕국에서 공격을 한다, 라는 책략 말일세.”

“그건, 하다못해 우리가 적보다 병력의 우위가 있을 때 쓸 수 있는 선택지였습니다.”

“으음….”

선봉군 5만이 전멸해 버린 이상 이제 수비로 돌아선다고 해도 적의 공격을 버틸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원정이 실패한 건가? 하지만 그건….’

세바스티안 공작 역시 후퇴는 망설여졌다.

그의 경우 딱히 정치적으로 책임을 회피하고 싶다거나 하는 속된 마음은 아니었다.

사실 황제라고 해도 그에게 함부로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다만, 그가 후퇴를 망설이는 것은 한평생을 지켜온 제국의 가치 때문이었다.

만약 자신이 여기서 물러나고 이 원정이 실패로 끝난다면, 그때는 제국의 역사에 거의 300년 만의 패전으로 기록되어 버린다.

지난 세월 동안 굳건하게 이 대륙에 군림해온 제국의 위엄에 손상이 가는 것이다.

세바스티안 공작의 이런 속내까지 모르는 카텔 후작은 말을 이었다.

“애당초, 제국에서는 이번 전쟁을 너무 가볍게 봤습니다. 공화국과의 전쟁을 그저 변방의 소란을 잠재우기 위한 원정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 실수였습니다.”

라이언 카텔 후작은 이번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말했다.

제국에서 가용 가능한 모든 병력을 동원해서 공화국과의 전쟁에 임해야 한다고 말이다.

당연히 그 주장은 통하지 않았고, 원정군의 규모는 고작(?) 20만 정도였다.

20만이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제국의 전체 전력을 생각할 때 20만이라는 숫자는 결코 전력이 아니었다.

제국에서 마음먹으면 최소 50만, 좀 더 쥐어짜 낸다면 80만까지 병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

거기다 주변 제후국의 병력들까지 강제로 끌어들인다면 전쟁에 100만 단위의 대군을 쏟아부을 수 있는 국가가 제국이다.

“일단 원정군을 물려야 합니다. 그리고, 추후에 2차 원정을 올 때는 제대로 된 병력을 끌고 와서 공화국을 전방위 적으로 압박해야 합니다.”

카텔 후작은 이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를 말했다.

사실 밀턴의 책사인 세비안 백작이 이 자리에 있었다고 해도 이것과 같은 생각을 말했을 것이다.

이번 전투의 패배를 솔직하게 인정하며 다음 수를 준비하는 것.

전쟁을 큰 시야로 볼 수 없다면 이런 생각은 할 수 없다.

보통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는 무인들의 경우 자신의 무위 발전에 신경 쓰느라고 다른 분야에서 시야가 좁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라이언 카텔 후작은 그렇지 않았다.

스트라부스 왕국 시절부터 무수한 전쟁을 겪으며 살아온 덕분에 전쟁을 읽는 시야가 넓었다.

괴물 같은 능력치를 갖추고 있는 지크프리트를 논외로 치면, 라이언 카텔 후작이야말로 진짜 문무를 겸비한 지장(智將)일 것이다.

다만, 문제는….

“아니, 역시 후퇴는 있을 수 없네.”

아무리 좋은 의견이라고 해도 군의 사령부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공작님!”

카텔 후작이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자 세바스티안 공작이 말했다.

“자네 말이 합리적이라는 것은 알아. 하지만…. 역시 이 늙은이는 아직 패배를 인정할 수 없네.”

“…….”

카텔 후작은 그저 침통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결국 이 남자도 오만한 제국인이었나. 제길….’

후회하는 카텔 후작에게 세바스티안 공작이 말했다.

“그 대신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그리고 세바스티안 공작은 은밀하게 카텔 후작에게 한마디를 했다.

다른 참모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하는 그 말을 듣고 카텔 후작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심이십니까?”

“보험 정도는 준비해 둬야지.”

“그럴 거면 차라리 본국에…. 아니, 아닙니다.”

카텔 후작은 잠시 고심하다가 말했다.

“공작님의 말대로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군요.”

“자네한테 맡기겠네.”

“알겠습니다.”

그런 둘의 대화를 들으며 다른 참모들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 둘이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하긴 한데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카텔 후작이 먼저 막사를 나서자 세바스티안 공작이 말했다.

“전쟁은 이제부터다! 더 이상 적의 간계에 속지 않겠다. 본진의 전 병력을 이끌고 공화국을 공격하겠다!”

“옛!”

결국 총공격이 정해지자 참모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됐다.’

‘이기기만 하면 돼. 이기기만….’

당연히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 전쟁에 참가해서 심각한 피해를 입은 참모들은 승리가 간절했다.

너무 간절했기에 그들은 아직도 심각한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설령 제국군의 본진이 총공격을 한다고 해도 이긴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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