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5화
“700년 전의 낡은 전술인가?”
“공화국 놈들도 참 낭만이 넘치나 봅니다.”
“하하하하…. 그렇게 말이죠.”
참모들이 웃음을 터트리자 보리스 백작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웃음이 나오는가?”
싸늘한 백작의 한마디에 참모들은 분위기를 파악하고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보리스 백작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적들은 지금 주력 병력이 귀환하기까지의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이다. 실제 놈들의 목적대로 우리 군의 속도는 현저하게 느려졌다. 말로 주파하면 하루면 될 거리를 일주일 넘게 걸리고 있지 않나?”
보리스 백작의 질투에 참모들은 그제야 문제점을 인식했다.
“세 번의 전투 모두 크게 이기기는 했지만 적은 철저하게 병력을 보존하며 싸웠다. 전과 자체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백작님. 앞으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적의 의도가 시간을 끄는 것이라면 더 이상 거기에 놀아날 수는 없다. 앞으로는 아군이 피해가 다소 생긴다고 해도 무시하고 적을 추격하라. 적이 후방에 방어진을 정비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참모들에게 지시를 내린 후에 보리스 백작은 속으로 생각했다.
‘지크프리트라….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놈이군. 하지만 내가 네놈 머리 위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마.’
적의 의도를 읽었다는 것은 자신의 지략이 상대보다 한 수 위라는 증거다.
보리스 백작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승리를 확신했다.
“지크프리트님. 적들의 진군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전령의 보고를 받은 지크프리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전략 지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어지간히 둔한 놈이군. 두 번째 전투에서 바로 눈치채고 움직일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준비는 모두 끝났겠지?”
“예. 그렇습니다.”
“좋아. 그럼 작전대로 움직인다. 제국군의 선봉 병력 규모가 5만이라고 했던가?”
“예. 그렇습니다.”
“전멸시키기 딱 적당한 규모군.”
그렇게 말하는 지크프리트의 표정은 지극히 담담했다.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네 번째 전투.
여전히 공화국군은 목책을 앞에 두고 방어형으로 진형을 갖추고 있었다.
보리스 백작은 자신이 직접 선두에 서서 기사단과 함께 과감하게 돌격했다.
“전군 공격하라! 제국의 기상을 보여라!”
“우와아아아아아!!”
여러 번의 승리로 사기가 끝까지 오른 제국군의 병사들은 거칠게 적을 공격했다.
공화국군은 그런 제국군의 공격에 어느 정도 맞서는 듯했지만 기사단의 병력이 돌입해 오자 빠르게 후퇴를 했다.
“후퇴! 후퇴하라!”
“1열은 정해진 위치까지 신속하게 퇴각하라!”
그렇게 공화국군이 후퇴를 시작했고, 여기까지는 지난 세 번의 전투와 같았다.
다만, 이번이 전과 다른 것은 보리스 백작의 공격이었다.
“적을 추격한다! 2차 진형 공격!”
“옛!”
보리스 백작의 명령이 떨어지자 후방에 따라오던 병력 중에 한 무리의 병력이 앞 열과 교대하듯이 앞으로 나와서 보리스 백작의 뒤를 따랐다.
적의 2중 방어 라인을 상대하기 위해서 보리스 백작도 아군의 2군을 사전에 준비해둔 것이다.
1진이 적의 방어막을 부수고, 그 후에 있을 2차 방어 라인을 파괴하기 위해서 준비한 2진이 있었던 것이다.
“공격하라!”
“와아아아아아!!”
체력이 쌩쌩한 2진의 공격이 방어진형에 부딪혔다.
그러나….
“후퇴하라!”
2차 방어 라인 역시 너무나 허무하게 후퇴해 버렸다.
‘뭐지? 이놈들 왜 맞서지 않는 거지?’
보리스 백작은 적이 너무나 허무하게 물러나자 오히려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 의문은 이내 풀렸다.
“백작님. 적에게 세 번째 방어 라인이 있습니다.”
“과연, 이번에는 준비를 더 철저하게 했었던 건가?”
이전과 달리 적은 방어에 더 신경을 썼는지 3중으로 방어 라인을 만들었던 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보리스 백작은 이내 결심한 듯 단호하게 말했다.
“돌격하라! 제국의 힘을 믿어라!”
“와아아아아!”
그가 선택한 선택지는 강행 돌파였다.
거듭된 승전으로 병사들의 사기도 높았고 여전히 적은 아군보다 소수였다.
여기서 공격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온다!”
“모두 정신 차려! 이번에는 막아야 해!”
“알아. 안다고!”
제3진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은 바싹 긴장했다.
그들은 사실 1진에서 제국을 상대로 빠르게 후퇴했던 신병들이었다.
사실 이 전투가 벌어지는 내내 계속 패배하고 후퇴했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패배를 거듭한 이들의 표정은 최초의 전투 때에 비하면 훨씬 더 좋아졌다.
과도한 긴장이 사라졌고 단단하게 각오를 다진 모습이었다.
더 이상 신병의 불안함과 미숙함을 보이지 않았다.
지난 세 번의 전투.
비록 패배와 후퇴밖에 한 것이 없었지만 일단 전투를 경험했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플러스가 되었다.
그리고 애당초 후퇴를 전제로 한 작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패배감도 없었고 무엇보다 생존율이 높았다.
지크프리트는 지난 세 번의 전투를 신병들의 실전 훈련으로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신병들 사이에 2진에서 후퇴한 정예병들도 함께 자리를 잡았다.
“긴장할 것 없다.”
“총사령관님의 작전을 믿어라.”
“그럼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정예병들이 신병을 다독이며 자리를 함께하자 3진은 상당힌 두터워졌다.
“좋아. 와라 제국 놈들!”
“다 죽여 버리겠다.”
그리고 탄탄하게 준비된 제3진에 제국군이 달려와서 거칠게 부딪혔다.
“와아아아아!”
“죽어라!”
“크아아악….”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전투가 벌어졌다.
제3진의 방어진은 단순한 목책에 그친 게 아니라 비스듬하게 스파이크를 박아서 기병의 돌진을 저지하는 형태였다.
거기다 사이사이에 사람이 무릎까지 빠지는 함정을 파 놨는데 이것이 기병에게 무척 효과적이었다.
사람이라면 그저 휘청거릴 정도의 함정이었지만 달리던 말이 거기에 걸리면 그대로 다리가 부러지며 고꾸라졌다.
그리고 육중한 기마 병력이 그렇게 무너지면 주변의 전열도 크게 흔들리는 법이다.
결국 보리스 백작이 생각하던 것보다 돌격력이 약해진 제국군은 제3진에 부딪혀서 상당한 피해를 입기 시작했다.
“크아악….”
“제길…. 커억….”
거침없던 파도가 처음으로 바위에 부딪혀서 부서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국군의 규모는 무려 5만이다.
한 번에 그치지 않고 바위가 부서질 때까지 계속해서 공격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
“공격! 공격하라!”
“앤드루스 제국 만세!”
지휘관의 독려를 받으며 제국의 병사들은 끝없이 3차 방어 라인을 공격했다.
그리고 공화국군은 3차 방어 라인에서 온힘을 다해 적을 막았다.
“버텨라!”
“조금만 더 버텨라! 승기는 반드시 온다!”
“공화국의 저력을 보여줘라!”
제국의 거친 공격 속에서 공화국의 병사들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들은 하나의 희망을 보고 있었다.
일반 병사들에게까지 자세한 정보를 전해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공통적으로 전해준 것은 있었다.
[제3진에서 적을 한 시간만 막아낸다면 이 전쟁은 이긴다.]
지크프리트가 병사들에게 내건 공약이었다.
병사들은 그 말을 희망으로 삼아서 이를 악물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국의 후방 병력이 3차 방어 라인을 다 넘어갔을 때.
드디어 지크프리트의 작전이 시작되었다.
“와아아! 공화국 놈들을 다 죽여…. 커억!”
한창 고함을 지르며 달려가던 후방의 병사 한 명이 갑자기 쓰러졌다.
등 뒤에서 화살을 맞고 쓰러진 그 병사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뒤를 바라봤다.
그러자 거기에는….
“입구를 닫아라! 적을 후방에 가둔다.”
어느새 후방에 포위망을 펼치고 있는 공화국군이 있었다.
“백작님! 적이 후방에서 나타났습니다.”
“뭐라고!? 후방? 규모는?”
“그…. 그건 아직….”
“어서 파악해! 서둘러!”
보리스 백작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가뜩이나 전방의 적들이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것이 거슬렸는데 갑자기 후방에서 적이 나타나다니?
‘설마 포위 작전? 우리가 달려들기를 기다렸다는 건가? 하지만 그걸 어찌 예상하고?’
보리스 백작은 등줄기가 축축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후방은 우리가 지나온 길이다. 설령 일정 거리를 두고 매복을 했다고 해도 그렇게 다수는 아닐 것이야.’
그는 애써 긍정적인 추정을 하며 절망감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리고 부하가 가져온 소식은….
“적의 병력은 대략 1,000 정도입니다.”
“1,000? 역시….”
그 정도 병력으로 후방을 쳐서 큰 효과를 낼 수는 없다.
다소의 희생이야 발생하겠지만 그냥 무시해도 후방의 지휘관들이 알아서 잘할 것이다.
“최후미의 지휘관에게 병력 5,000을 통솔할 통제권을 준다! 자력으로 대응하라고 전하라.”
그렇게 지시를 내린 보리스 백작은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잠시 후에 전령이 가져온 정보는 전혀 다른 보고였다.
“백작님! 후방의 병력이 괴멸되었습니다.”
“뭐라고!?”
“최후미를 맡은 기사가 누구냐?”
“피엘 경입니다.”
피엘이라면 잘 아는 기사다.
익스퍼트 중급의 실력에 노련함을 갖춘 기사다.
그가 적을 막지 못했다니?
“피엘 본인은 어찌 되었나?”
“그…. 적과 일기토를 벌여서 전사했습니다.”
“뭐라고?”
도대체 몇 번째로 ‘뭐라고?’라는 말을 하는 것일까?
그만큼 보리스 백작의 머릿속이 복잡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전령에게 말했다.
“피엘을 죽인 이가 누구냐?”
“그…. 그것이…. 지크프리트라고 합니다.”
그 말에 보리스 백작은 머릿속에서 뭐가 뚝 하고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걸 가장 먼저 말했어야지! 이 병신 같은 새끼야!!!”
제국의 후방에서 1,000의 병력과 함께 제국의 후미를 공격한 지크프리트는 선두에서 직접 싸우며 제국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더 이상 경지를 숨길 필요도 없는 지크프리트가 마스터의 무위를 드러내고 공격을 하자 고작 1,000의 병력이라도 결코 무시할 수가 없었다.
“크아악.”
“제…. 제기랄.”
“기사… 기사 병력은 어디 있는 거…. 크악!”
거기다 무서운 것은 지크프리트만이 아니었다.
지금 지크프리트의 주변에서 그를 호위하듯이 따라다니고 있는 자들은 고스트 1조와 2조였다.
고스트 안에서도 가장 강한 정예들인 그들은 어지간해서는 결코 지크프리트의 주변을 떠나지 않는다.
이들이 비약을 복용하고 지크프리트의 주변에서 함께 적을 공격하자 제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주군, 적의 전열이 무너졌습니다. 돌입하시겠습니까?”
2조의 조장이 지크프리트에게 의견을 물어봤다.
그러자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현 위치를 고수한다. 적이 최악의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옛!”
지크프리트는 제국군의 후미를 강하게 공격하면서도 결코 깊게 들어가지는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작전을 위해서였다.
보리스 백작은 자신이 지크프리트의 전략을 읽었다고 생각했고, 더 뛰어나다고 자부했지만….
그건 터무니없는 착각이었다.
애당초, 보리스 백작과 지크프리트는 전략가로서의 차원이 다른 이들이었다.
보리스 백작은 책으로 전장을 배우고 연구한 인물이다
그는 적의 행동을 예측하고 그 의도를 거스르는 것을 승리로 이어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거기서 한 차원 더 높은 결과를 바란다.
적의 행동을 예측하는 게 아니라 적의 행동을 유도하는 것이다.
이 둘의 전쟁을 처음부터 복기해보면 안다.
지크프리트는 신병의 훈련을 겸한 철수 작전을 펼쳤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보리스 백작에게 살리에르의 기적이라는 기록을 떠올리게 했다.
전쟁의 경험이 적고 책으로 전쟁을 연구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자연스럽게 사고가 그쪽으로 흐르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리고 꾸준한 정찰의 결과 적이 진격 속도가 빨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준비한 함정을 팠다.
2중 방어 라인이 아닌 3중 방어 라인을 펼쳐서 적의 강공에 대비한 것이다.
이제 어리바리한 티가 좀 사라져 가고 있는 신병들과 정예병들을 3진에 집결시켜서 적을 막고 지크프리트 자신이 최정예군 1,000을 이끌고 적의 후미를 친다.
여기까지만 해도 이미 제국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이 모든 것이 지크프리트가 보리스 백작의 행동을 유도해서 만들어낸 결과였다.
마치 꼭두각시 인형을 조종하는 것처럼 심리와 작전이라는 실로 보리스 백작의 행동을 모두 유도했다.
그리고 이제 최후의 한 수가 남아 있었다.
지크프리트 자신이 후방에서 소수의 적과 나타났다는 것을 알게 된 보리스 백작은 어떤 선택을 할까?
전방의 방어진이 튼튼해서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 시점에서 후방에 소수의 병력과 함께 나타난 적의 총사령관?
‘내 목이 몹시 탐나겠지.’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지크프리트의 목을 취함으로써 이 전쟁의 승패를 가늠할 수도 있다.
선봉을 맡을 정도로 전공에 욕심을 내고 있는 인물이 이런 미끼를 무시할 리가 없다.
‘자, 선택하라. 최악의 악수를.’
지크프리트가 그렇게 생각한 그 순간….
“전 기사단과 주력 병력은 나를 따르라! 후방에 적 사령관을 잡는다!”
보리스 백작은 기사단과 주력 병력을 이끌고 후방으로 향하기로 했다.
이것이야말로 지크프리트가 노리던 마지막 외통수인 것도 모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