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184화 (184/257)

제184화

“백작님. 정찰병들이 관도의 좌우에 적들의 존재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역시 그런가?”

전령이 가져온 보고를 받은 보리스 백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고로 매복이라는 것은 은밀성이 생명이다.

존재가 알려진 매복 병력은 오히려 반대로 역이용할 수도 있다.

“전군에 지시를 내려라! 중장보병을 선두로 해서 천천히 전진한다. 후방 병력은 대기하라!”

“옛!”

보리스 백작의 명령대로 두꺼운 갑옷과 방패로 무장한 중장보병이 최선두로 나섰다.

“대열은 4열 종대! 앞뒤의 간격을 최대한 좁혀라!”

“옛!”

정예는 정예라고 해야 할까?

지휘관의 명령에 중장보병들은 하나의 생명체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발걸음까지 맞춰서 육중한 존재감을 과시하며 천천히 접근했다.

“온다. 진짜 와.”

“긴장하지 마. 우리는 지시대로 하기만 하면 돼.”

“그래. 충분히 할 수 있어.”

공화국의 방어 진지 안에 있는 것은 아직 실전 경험이 전무한 신병들이었다.

공화주의에 감화되어 자발적으로 참전한 이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투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크프리트는 중요한 전투의 초전에 이들을 앞장세웠다.

그렇다고 그냥 화살받이로 내세운 것은 아니다.

이런 신병들이라고 해도 수행할 수 있는 명령을 두 가지 내려 주었다.

그중의 하나가 매복계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이미 보리스 백작에게 간파당한 상태였다.

사실 숙련된 지휘관이라면 중장보병이 따로 떨어져서 접근해오는 것을 봤을 때 매복이 발각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했을 테지만?

이 신병들에게는 그런 판단력과 경험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저 초조하게 적들이 준비된 포인트로 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오면….”

육중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과감하게 전진하는 제국군의 중장보병을 보며 신병들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이제 약간만 더 끌어들이면 매복병이 화살로 적을 공격할 것이다.

그런데 그때….

“보병! 갈라져!”

“옛!”

지휘관의 짧은 명령 하나에 보병들이 힘찬 대답과 함께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4열 종대로 전진하던 중장보병들이 2열로 좌우로 쩍 갈라지더니 좌우를 바라보는 횡대의 형태가 된 것이다.

그리고….

“공격!”

“우오오오오오!!”

지휘관의 명령과 동시에 중장보병들이 관도의 좌우에 있는 숲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숲속에서 대기 중이던 매복병들이 깜짝 놀랐다.

“헉! 적…. 적이다!”

“쏴! 쏘란 말이야.”

“으아악!”

관도의 좌우에 매복되어 있던 병력은 대부분이 궁병이었다.

우거진 숲을 방패로 삼아 매복의 효과를 확실하게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배치한 것이다.

그리고 보리스 백작이 전진시킨 중장보병은 궁병에게 있어서 가장 최악의 병종이었다.

두꺼운 방어력에 화살이 잘 먹히지도 않고 일단 육탄전이 가능한 거리에 들어가면 궁병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관도의 좌우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보리스 백작이 다음 움직임을 보였다.

“돌격! 내 뒤를 따르라!”

그는 직접 선두에 서서 기사단을 이끌고 적에게 돌격을 시도했다.

중장보병이 묵직한 존재감으로 적의 시선을 끄는 사이 그는 보병들 사이에서 기사단과 함께 돌격 준비를 마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중장보병이 갈라진 틈을 놓치지 않고 한 줄기의 화살처럼 기마 부대가 돌격했다.

“어…. 어어어?”

“온다. 적이…. 매복은….”

“안 돼! 이미… 크악!”

신병들이 아차 하는 순간 보리스 백작이 이끄는 기사단이 급조된 목책을 박살내며 적진에 돌입했다.

“내가 앤드루스 제국의 듄 보리스다!”

보리스 백작은 직접 선두에서 무위를 뽐내며 적들을 유린했다.

매복이 실패하고 적의 기사단에 방어 라인이 무너졌다.

이미 패색이 짙어진 이 전쟁에서 신병들은 어어 하는 순간 점점 죽어가고 있었다.

그때….

“후퇴! 후퇴하라!”

“전군 후퇴하라!”

공화국군의 지휘관들이 후퇴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방어 진형의 보병들은 물론이고 관도의 좌우에서 불리한 싸움을 하고 있던 매복병들까지 모두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지크프리트에게 받은 두 번째 명령이었다.

상황이 불리해지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전원이 정해진 포인트로 후퇴하라고 말이다.

승리보다는 병사들의 생존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내린 명령이었다.

당연히 적은 추격을 한다.

하지만….

“쏴라!”

후퇴하는 공화국 병사들을 추격하는 기마대를 견제하고 있는 것은 공화국군의 진짜 정예들이었다.

신병들이 무사히 후퇴할 수 있도록 지크프리트가 심어 놓은 일종의 안배였다.

“큭….”

“이놈들이….”

후퇴하는 공화국군을 추격하려던 보리스 백작은 살짝 당황했다.

미처 몰랐는데 이 진형의 뒤편에는 또 하나의 방어 라인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방어 라인을 지키는 병사들은 앞에 있는 병사들과 달리 상당한 정예들인 듯 했다.

‘기세를 살려 무작정 돌격하다가는 병력에 손실이 있을 수 있다.’

판단을 내린 보리스 백작은 즉시 아군에 명령을 내렸다.

“대열을 추슬러라! 기사단은 뒤로 빠지고 보병이 앞에 선다! 궁병은 대응 응사하라!”

보리스 백작이 진형을 다시 다스리고 반격을 시작하자 일시적으로 공화국 병사들에 대한 추격은 사라졌다.

그리고 아군이 무사하게 빠지자 2차 방어 라인에 있던 적들도 일사분란하게 뒤로 빠졌다.

“백작님! 적이 후퇴합니다.”

“알고 있다.”

“추격하시겠습니까?”

“…아니, 일단 적의 진지를 함락시켰으니 일단 멈춘다.”

보리스 백작은 어쩐지 꺼림칙한 느낌을 받아서 적을 추격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어쨌든 이겼다.’

적의 숫자가 좀 적기는 했지만 이긴 전투에서 무리를 하다가 실패할 수는 없었다.

적의 진지를 점령한 보리스 백작은 그대로 군을 정돈하며 후방에 따라오고 있을 중앙군에 전과를 보고했다.

“보리스 백작이 승리했다고 합니다.”

“적의 병력 규모는?”

“대략 5,000에서 1만 정도라고 합니다. 아군의 피해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나쁘지 않은 전과로군.”

세바스티안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생각해 보면 이 전쟁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들어보는 승전보였다.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거기다 참모들은 은근히 들으라는 듯이 보리스 백작의 전공을 치켜세웠다.

“과연 용맹과 지모를 겸비했다고 평가 받는 보리스 백작입니다.”

“우리 제국군의 기상을 제대로 보여 주었군요.”

“역시 우리 예상대로 적의 본진에는 전력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 공격을 망설인다면 오히려 적에게 큰 기회를 줄 뻔했습니다. 그럼 낭패였겠죠?”

참모들이 들으라는 듯이 하는 말은 전부 라이언 카텔 후작을 향해서 한 말이었다.

봐라. 네 말이 틀렸다.

우리 말이 맞았다.

라는 말을 대놓고 하지는 못하니 이런 식으로 비꼬는 것이다.

“…….”

거기에 카텔 후작은 담담한 표정으로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다.

‘흥, 할 말이 없으니 조개처럼 입을 다무는 건가?’

‘자신의 잘못을 끝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야.’

‘졸렬한 인간 같으니라고.’

참모들은 그렇게 속으로 카텔 후작을 비웃었다.

첫 승리 이후 보리스 백작은 빠르게 군을 진격시켰고, 그의 앞에 다시 한번 적이 나타났다.

이전과 같은 수준으로 대략 5,000 정도의 규모였다.

다만, 경상으로 보이는 부상병이 약간 있는 것으로 봐서는 이전의 전투에서 후퇴했던 패잔병들이 합류한 것으로 보였다.

“용맹스런 제국의 용사들이여! 적을 물리쳐라!”

“우오오오오오오!!”

보리스 백작은 병사들의 사기가 오른 것을 살려서 적극적인 공격 명령을 내렸다.

첫 번째 전투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공세였다.

우선 적의 병력이 결코 정예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규모가 큰 것도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매복이나 함정 같은 간계는 머리 한구석에 생각해 두고 나머지는 적극적인 공격에 나선 것이다.

“쏴라! 겁먹지 말고 싸워라!”

“제국이라고 겁먹을 것 없다.”

“우오오오오!”

물론 공화국의 병사들도 열심히 맞서 싸웠다.

방어를 위해서 세워둔 목책을 장벽 삼아 장창병이 적을 견제하고 궁수들이 화살로 적을 공격하는 형태였다.

전형적인 방어형 전투법으로 단순하지만 효율은 좋았다.

“조금 버티는군. 하지만 미숙해.”

뒤에서 적의 분투를 지켜보던 보리스 백작은 그렇게 말하더니 기사단을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백작님.”

“음, 아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우리가 직접 뚫는다. 내 뒤를 따르도록.”

“옛!”

그리고 보리스 백작은 직접 기사단을 이끌고 눈여겨본 공격 포인트를 향해 돌격했다.

이런 단순한 작전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병사들의 질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예병들이라면 칼 같은 절도와 단결력으로 뭉쳐서 작전을 수행했겠지만 신병들이다 보니 아무래도 약간의 빈틈이 생겼다.

보리스 백작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직접 기사단을 이끌고 그 부분을 파고든 것이다.

“꺼져라!”

“아아악!”

“적…. 적이, 크악!”

보리스 백작은 직접 적의 방어진을 물리치고 기사단이 돌입할 수 있는 입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작은 구멍이 하나 생기자 구멍이 난 댐처럼 진형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공격!”

“공화국의 쓰레기들에게 제국의 위상을 보여 주어라!”

“와아아아아아!!”

사기가 하늘까지 오른 제국의 병사들은 거친 기세로 적을 공격했다.

그리고 공화국의 병사들은….

“후퇴! 후퇴하라!”

“전군 후퇴!”

진형이 무너져 내린 그 순간 바로 후퇴를 선택했다.

당연히 보리스 백작은 추격 명령을 내렸다.

“놓치지 마라! 제국의 적들에게 지울 수 없는 공포를 안겨 주어라!”

하지만 제국군의 추격은 오래 가지 못했다.

“쯧, 또 2중 방어 라인인가?”

보리스 백작이 이끄는 기사는 후방에 대기 중인 방어 라인을 보며 혀를 찼다.

전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뒤에 준비되어 있는 두 번째 방어 라인 때문에 적을 추격하지 못했다.

1열에 있던 신병들은 어설픈 기색이 보여서 쉽게 상대할 수 있었지만 2열의 적들은 상당한 정예로 보였다.

그저 기세를 살려서 접근하기에는 적지 않은 피해가 예상되었다.

결국 다시 대열을 정돈하고 상대해야 한다는 말인데….

“후퇴! 전군 후퇴한다!”

저 2열의 상대는 정면으로 싸우기를 거부했다.

그저 아군이 후퇴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벌고 난 다음에는 자신들도 빠르게 후퇴해 버렸다.

두 번의 전투가 벌어졌고 모두 제국이 이겼다.

하지만 적의 후퇴가 너무 빨랐고, 추격이 용의치 않아서 생각보다 전과가 높지는 않았다.

“쯧, 공화국 놈들 싸울 생각이 있기는 한 건가?”

보리스 백작은 이때쯤에 슬슬 초조함이 생기기 시작했다.

세 번째 전투.

역시 똑같은 형태로 관도에 방어형 진형을 만들어서 틀어막고 제국군을 기다리고 있는 공화국군이 보였다.

“멍청한 놈들.”

“생각이 없는 건가? 두 번이나 당해봤는데 똑같은 대응이라니?”

보리스 백작의 주변에 있는 참모들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실소했다.

하지만 보리스 백작 본인은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생각하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이놈들 혹시….”

“백작님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다. 우선 눈앞의 적을 물리쳐라! 전투는 정공법으로 하되 혹시 모를 함정은 최대한 주의하라!”

“옛!”

그리고 다시 세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결과는 앞의 두 번과 똑같았다.

정공법으로 양군이 부딪히고 병력의 질과 양이 우위에 있는 제국군이 이겼다.

하지만 적은 여전히 빠르게 후퇴를 선택했고 2중 방어 라인 때문에 적을 무리해서 추격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 전투가 끝나고 보리스 백작은 다급하게 참모진과 긴급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한마디를 했다.

“적은 살리아르의 기적을 재현하려고 하고 있다.”

그 말을 듣자 참모들은 탄성을 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과연….”

“그렇군요. 그래서 이런 방식의 전투를 하는 거군요.”

살리아르의 기적.

그것은 대략 700년 전의 전쟁에 기록된 전투였다.

지금은 존재하지도 않는 로시안이라는 왕국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그 나라에는 용맹한 왕이 있었는데 그 왕이 원정을 나가 있는 사이 동맹국이었던 국가가 협정을 깨고 로시안 왕국을 침공했었다.

그러자 나라는 큰 위기에 처했고 백성들이 불안에 빠졌다.

그때 그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것은 그 나라의 여왕이었던 살리아르 여왕이였다.

그녀는 백성들의 앞에 직접 나서서 병력을 모집했고 자신도 직접 전쟁터에 나가서 적의 침략에 맞서서 싸우기를 약속했다.

다만, 백성들을 급하게 모집했기 때문에 아군의 전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적과 싸우기보다는 철저하게 시간을 끄는 전법으로 일관했다.

적의 진격로에 방어형 진형을 차리고 최대한 싸우다가 조금만 불리해지면 바로 후퇴해서 후방의 진형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다시 그 후방의 진형에서 적과 맞서는 식으로 적의 진격을 최대한 방해했다.

그렇게 시간을 끌며 그녀는 적을 상대로 버티고 또 버텼고, 그녀가 버티는 사이에 용맹한 왕이 귀환해서 적을 물리쳤다.

결국 여왕의 헌신과 지혜로 국난의 위기를 벗어나자 왕은 사랑하는 여왕을 치하하며 그 전투를 살리아르의 기적이라고 부를 것을 명했다.

후세의 전략가들은 이것을 전쟁사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전투라고 부른다.

굳이 전략 전술을 공부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해도 귀족의 교양으로써 알아둘 정도의 유명한 전투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