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3화
“물론 두렵지.”
“…예?”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카텔 후작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공화국에 조국을 잃었고 패주했다. 지크프리트라는 놈이 얼마나 전쟁의 귀재인지 몸소 체험을 했었다. 적에게 패배하고 나서도 적을 경계하지 못한다면 그놈은 전쟁터에 설 자격이 없는 놈이다. 적어도 지휘관으로는 절대 존재하지 말아야 하지.”
“그건 너무 소극적인 생각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후작님이 패배했을 때의 일은 스트라부스 왕국 시절의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대 앤드루스 제국입니다. 그 차이를 간과하신 듯합니다.”
정신 차릴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참모진을 보고 카텔 후작은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
“모두들 자만심이 하늘에 닿았군. 현 상황을 보라! 제국에서 동원한 원정군 10만 중에 절반이 날아가고 마스터를 두 명이나 잃은 이 상황에서도 그런 낙관론이 나오는가?”
카텔 후작의 통렬한 나무람에 참모진들은 할 말이 없다는 듯이 침묵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에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카텔 후작은 아직까지 외부 인사였다.
제국에서 작위를 받기는 했지만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제국 안의 지지 세력이나 파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마스터라는 경지 하나만으로 그 존재를 인정받기에는 제국은 너무 거대하고 콧대가 높았다.
불쾌한 참모진들의 기색을 읽어낸 카텔 후작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렵군. 이런 놈들을 데리고 전쟁을 수행해야 한단 말인가? 그것도 지크프리트 그 괴물을 상대로?’
카텔 후작은 후작대로 답답했다.
조국의 복수를 위해서 제국에 몸을 투신했지만 결코 제국을 이용만 하려는 것은 아니다.
전쟁터에서 복수를 할 기회를 준다면 남은 인생은 제국에 헌신할 의욕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대우를 받으면서 전쟁의 수행조차 발목을 잡히고 있는 상황이니 어찌 답답하지 않을까?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세바스티안 공작을 향해 말했다.
“공작님. 공작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군을 이끌고 본진을 공격해야 하냐고 생각하느냔 말입니다.”
카텔 후작의 말에 세바스티안 공작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우리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냐. 라는 것일세.”
“무슨 뜻입니까?”
“쉽게 정리하지. 참모진들은 공격을 주장하고 있는데 중앙군의 선봉을 맡고 있는 자네는 거기에 반대하고 있어. 안 그런가?”
“맞습니다.”
“그래. 내가 여기서 묻고 싶은 건 우리가 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느냐는 거야. 자네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세바스티안 공작의 말에 카텔 후작은 잠시 망설였다.
‘말해도 될까?’
사실 머릿속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한 계획은 있었다.
하지만 그걸 쉽게 말할 수는 없었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이 제국군의 수뇌부가 과연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들어줄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바스티안 공작에게 정면으로 질문을 받은 이상 이제 얼버무릴 수도 없었다.
카텔 공작은 마음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우선, 선택해야 할 것은 공격이 아니라 방어입니다.”
“방어?”
“예. 우리의 목적은 공화국의 침략에서 발랑스 왕국을 지키는 것. 그렇다면 승리보다 더 절실한 것은 패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소극적인….”
“어찌 그렇게 나약한 말씀을 하십니까?”
참모들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이 들고 일어났다.
하지만 세바스티안 공작은 손을 들어서 참모진을 진정시키고 말했다.
“일단 계속 들어보지.”
그렇게 허락이 떨어지자 다시 카텔 후작이 말을 이었다.
“예. 우선 군을 후방으로 물려서 방어 거점으로 쓸 만한 요새에 병력을 집중시켜서 수도로 가는 길목을 차단합니다.”
“그렇군. 그 다음에는? 그렇게 시간을 끌면 알아서 적이 물러날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아닙니다. 지크프리트는 물러날 것입니다.”
“…왜지?”
“왜냐하면 놈은 지금 후방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적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누군가?”
“레스터 왕국의 밀턴 포레스트.”
카텔 후작의 입에서 밀턴의 이름이 나오자 좌중이 술렁거렸다.
“밀턴 포레스트?”
“레스터 왕국의 대공으로 취임했다는 그 남자 말인가?”
“공화국과의 전쟁에서 선전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전 대륙에 가장 급부상한 이름 중에 하나가 밀턴이었다.
아마 지크프리트와 더불어서 쌍벽이라고 할 정도로 이름값을 올렸다.
다만, 제국에서는 밀턴의 이름 정도는 들어봤지만 결코 그 능력을 높게 파악하지 않았다.
제국과 레스터 왕국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렇다 할 교류도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밀턴의 존재는 최근 들어서 이름을 조금 날리고 있는 타국의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스트라부스 왕국 출신으로 북부의 전쟁에 몸을 담갔던 라이언 카텔 후작에게 있어서 밀턴 포레스트라는 이름의 무게감은 상당히 묵직했다.
스트라부스 왕국이 멸망하고 복수를 위해서 망명할 나라를 고를 때 앤드루스 제국 다음으로 생각했던 것이 레스터 왕국이었다.
왜냐하면 그 레스터 왕국에 지크프리트를 유일하게 이긴 적이 있는 남자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전의 1차 이념 대립 전쟁에서도 레스터 왕국은 패전국에 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토를 세 배는 더 크게 불렸고 북부의 강대국으로 거듭했다.
다만, 저울질을 했을 때 아무래도 전통의 강호인 제국 쪽이 더 무게감이 있었기에 차점으로 미뤄뒀을 뿐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제국을 선택한 것이 틀린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들고는 하지만 말이야.’
잠시 푸념을 했던 카텔 후작이었지만 다시 말을 이었다.
“우선 발랑스 왕국에서 전선을 뒤로 물려서 적을 끌어들이고 방어를 탄탄히 합니다. 동시에 레스터 왕국에 사신을 보내서 공화국을 공격하게 하면 지크프리트는 발랑스 왕국에서 군사를 물리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적을 공격하는 것은 바로 그때가 될 것입니다.”
만약 지크프리트가 지금 카텔 후작이 하는 말을 들었다면 간담이 서늘해졌을지도 모른다.
지금 카텔 후작이 한 말은 지크프리트가 생각했던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전쟁을 앞에 두고 레스터 왕국이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데이비드를 시켜 뒷공작을 시도했던 것이다.
다만, 그 뒷공작이 실패했고, 이제 지크프리트는 가급적 이 전쟁을 빠르게 수행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져 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카텔 후작의 작전대로 제국군이 후방으로 물러나서 시간을 끌고, 그사이에 레스터 왕국이 움직인다면?
그때는 지크프리트라고 해도 이 원정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레스터 왕국이 공화국의 영토를 잠식하는 것은 결코 좌시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밀턴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지크프리트 본인이 직접 나서야 했다.
카텔 후작은 이 상황에서 제국군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를 제시한 것이다.
단, 문제가 있다면….
“카텔 후작님은 아무래도 제국군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듯합니다.”
“방어를 굳히고 적이 물러날 때까지 기다리자니? 어찌 그렇게 소극적인 작전을 펼치려 하십니까?”
“거기다 레스터 왕국에 도움을 청해요? 제국의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치욕임을 모르십니까?”
바로 이것이었다.
카텔 후작이 말한 작전은 앤드루스 제국의 참모들이 어디까지나 자존심을 접어야 선택이 가능한 것이었다.
과거 스트라부스 왕국이 건재할 때도 그랬지만 기본적으로 제국은 타국에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국의 전력이 부족해서 외국에 참전을 종용한다?
외교적으로 무척 실리적이고 효율적인 이 선택지가 제국인들에게는 굴욕과 치욕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래서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내가 너무 지나쳤나?’
사실 카텔 후작이 바라던 것은 어떻게든 후퇴 작전이 받아들여지는 것 까지였다.
시간을 끌기만 하면 레스터 왕국은 알아서 움직일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말이다.
전쟁이 길어지면 밀턴 포레스트나 레이라 여왕이 텅텅 비어 있는 공화국군의 뒤통수를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괜히 레스터 왕국에 사신을 보내야 한다는 말을 했나 싶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을 말이다.
“세바스티안 공작님! 지금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자존심을 숙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대 앤드루스 제국입니다.”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부디 결단을!”
참모진들의 외침 속에서 세바스티안 공작은 결정했다.
“적을 공격한다! 단, 라이언 카텔 후작은 선봉에서 물러난다.”
“옛!”
결국 중앙군의 공격이 결정되었고 선봉군의 장수에서 제외된 라이언 카텔 후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제국을 선택했나?’
아무래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게 될 것 같았다.
제국군의 본군 15만이 진격 속도를 올렸다.
비록 제국에서 데리고 온 원정군 10만 중에 5만이 괴멸되었지만 발랑스 왕국에서 징집한 10만의 병력이 추가되어 있었기에 그 병력은 충분히 압도적이었다.
그 압도적인 군세를 상대로 지크프리트는 5만의 군세로 적을 맞이해야 했다.
그나마 상당수의 정예를 제이크와 엘리제에게 내주었기 때문에 5만 중에 4만이 징집병인 상황이다.
하지만 제국군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지크프리트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겼다.”
그의 눈에는 이미 승리가 보이고 있었다.
카텔 후작이 사실상 경질된 이후 제국군의 선봉을 맡게 된 것은 듄 보리스 백작이었다.
그는 익스퍼트 상급의 경지를 이루었으며 동시에 참모로서의 교육도 수료하였다.
스스로 문무를 겸비하고 있다고 자부할 정도로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는 선봉군 5만을 맡게 되었을 때 몹시 만족스러웠다.
“당연히 제국군의 선봉은 전통 있는 제국의 인물이 맡아야 하는 법이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백작님.”
“라이언 카텔 후작은 일신의 무위는 어떨지 몰라도 군을 이끄는 통솔력이 떨어지니까요.”
그의 주변에는 보리스 백작가의 가신들이 그의 참모진으로 함께하고 있었다.
보리스 백작은 이번 기회에 큰 공을 세워서 가문을 한 차원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제국의 선봉군의 핵심 부분에 가문의 가신들을 대거 투입했다.
기사, 참모, 그리고 병사들 역시 가문에서 끌고 온 사병들을 투입시켰다.
기본적으로 이 전쟁에서 승리 이외의 미래를 보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백작님. 정찰병이 적의 척후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호오? 예정보다 더 빠르군.”
“아무래도 적이 생각보다 전진 배치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래서 적의 규모는?”
“예. 병력 규모는 대략 5,000 정도로 파악되고 있으며 방어형 진지를 꾸리고 있습니다.”
“고작 5,000? 적에게 그보다는 많은 병력이 있을 텐데?”
“일단 정찰병의 보고로는 그렇습니다. 직접 확인하시겠습니까?”
“그래야겠군.”
보리스 백작은 스스로 군의 선두로 나서서 적의 진형을 살폈다.
확실히 정찰병의 보고대로였다.
적은 목책과 방벽을 이용해서 방어형 진형을 꾸리고 있었지만 진형의 규모를 봐서는 그렇게 대규모 병력은 아니었다.
‘저걸로 우리를 막겠다고? 그건 불가능해. 그렇다면….’
보리스 백작은 적을 얕잡아 보고 무작정 돌격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전령에게 은밀하게 지시를 내렸다.
“공격 진형을 갖추는 동시에 적진에 사자를 보내서 항복을 권고해라.”
“예. 알겠습니다.”
전령이 지시를 받고 움직이자 옆에 있는 가신 한 명이 말했다.
“백작님. 적들이 항복을 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나도 알고 있다. 일단 시간을 번 것뿐이다.”
“예?”
“즉시 소규모 정찰을 보내서 이 관도의 좌우를 정찰해라. 매복이 있을 수 있다.”
“아…. 과연!”
가신은 즉시 지시대로 움직였다.
보리스 백작은 매복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소수의 병력으로 적을 유인해서 끌어들이고 좌우에서 매복으로 덮친다. 단순하지만 효율적이지. 나라면 그렇게 하겠다.’
보리스 백작은 전쟁의 경험은 없었지만 전략 전술에 대한 공부만큼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결코 적의 행동을 무심하게 생각하지 않고 항상 적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전략의 기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보리스 백작의 예상이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