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2화
[같은 핏줄이라고 하기에는 차이가 너무 나는군.]
[포기해라.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하는 법. 너는 평생 그 아이를 이길 수 없어. 우선 그걸 인정해라.]
[이미 끝난 일이니 더 이상 미련 가지지 마라. 이미 정한 후계자는 돌이킬 수 없다.]
돌이키기만 해도 불쾌한 기억이 오랜만에 상기된 엘리제의 눈에는 어두운 증오가 가득 차올랐다.
“그래.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썩을 X년이….”
엘리제는 고스트 대원들을 향해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 너희들 닥치고 이년 따먹어.”
“거부한다고 말….”
“명령이다. 내가 누구한테 명령권을 받았지?”
7조 조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엘리제가 말했다.
그 말에 7조의 조장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도 몸을 움찔했다.
지금 이 전쟁의 지휘권은 엘리제가 가지고 있다.
그녀에게 지크프리트가 지휘권을 준 이상 그게 어떤 명령이든 간에 무조건 따라야 했다.
일단 규칙상으로는 그렇다.
망설이는 고스트 대원들에게 엘리제가 말했다.
“내 말 안 들려! 명령에 따르란 말이야. 이 고자 새끼들아!”
버럭 소리를 지르는 그녀의 히스테리에 몇몇 대원들이 7조의 조장을 바라봤다.
여기서는 결국 조장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7조의 조장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이건…. 반드시 주군에게 보고드릴 것이오.”
“그러든지? 어쨌든 지금은 저 개년부터 따먹어. 아주 걸레짝으로 만들어서 자존심의 조각도 남지 않게 더럽히고 유린해 버려.”
엘리제의 그 명령에 결국 몇몇 고스트 대원들이 움직였다.
그들 역시 내키지 않았다.
경의를 표해 마땅한 적에게 이런 모독적인 행위는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그때….
“큭…. 놀고들 있네.”
모론 헤일리 후작은 엘리제를 향해서 한마디 비웃음을 남기더니 그대로 남은 최후의 힘을 써서 움직였다.
더 이상 검을 들 힘도 없는 그녀였지만 몸을 굴려서 약간의 이동을 하는 것은 가능했다.
그런 그녀의 목적은….
“막아!”
엘리제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모론 헤일리 후작은 그대로 몸을 굴려서 적들이 만들어 놓았던 함정 속으로 몸을 던졌다.
푹푹푹!
그녀의 몸이 떨어지며 그 밑에 기다리고 있던 창날에 몸을 꿰뚫리고 말았다.
“큭…. 저 XX년이!”
엘리제는 히스테리를 터트렸다.
그리고 욕설만으로는 분이 안 풀렸는지 그대로 손을 휘둘러서 7조 조장의 뺨을 날려 버렸다.
짜악!
“XX새끼야! 너 알고 있었지? 그리고 막을 수 있었지?”
“……….”
7조의 조장은 고개를 돌린 채 묵묵하게 침묵했다.
하지만 그 침묵은 사실상의 긍정이었다.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자신들의 입장과 생각만 해도 속이 뒤집힐 것 같은 명령을 내리는 지휘관.
그런 모순 속에서 적은 유일하게 자신들의 명예를 지켜줄 수 있는 선택을 하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그걸 막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X 같은 새끼. 기르는 개 주제에 감히 주제도 모르고!”
짝!
다시 엘리제의 손이 휘둘러졌다.
그녀의 손은 몇 번이고 7조의 조장의 뺨을 때렸다.
자신의 호흡이 거칠어질 때까지 히스테리를 부리던 그녀는 거칠어진 호흡을 정리하고 말했다.
“좋아.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생각이 있지.”
그리고 엘리제는 고스트 대원들을 시켜서 모론 후작의 시체를 챙기도록 했다.
그리고 그녀는 죽어버린 모론 후작의 뺨을 툭툭 치며 말했다.
“죽어서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았어? 마녀가 왜 마녀인지 알려주지.”
그리고 그녀는 다른 고스트대원들에게 말했다.
“뭐 해? 전쟁마저 안 할 거야?! 저기 찌꺼기들 다 처리해!”
그녀의 명령에 고스트는 한쪽에서 아직 저항 중이던 은빛 늑대 기사단과 그 휘하의 병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음울하고 추잡하고 결코 기쁘지 않은 승리였지만 모론 헤일리 후작이 이끄는 군은 그렇게 괴멸되어 버렸다.
마티아스 버켈 후작 전사.
모론 헤일리 후작 실종.
공격의 양축을 담당하고 있던 두 명의 마스터가 죽어버렸다.
그리고 그들이 이끌던 병력 역시 괴멸되어 버렸다.
이것은 제국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공화국이 스트라부스 왕국을 무너트림으로 인해서 경계해야 할 적으로 인식된 것은 극히 최근이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제국이 작정하고 나서면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제국이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강함에 자부심을 넘어선 확신을 가지고 있던 제국이었다.
어른이 아이와 싸울 때 패배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처럼 공화국과의 전쟁에서도 당연히 승리할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시작부터 제국의 정예 병력 5만이 날아갔고, 두 명의 마스터를 잃었다.
여덟 명의 마스터를 보유하고 있는 제국이라고 해도 마스터가 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특히 모론 헤일리 후작과 마티아스 버켈 후작은 아직 젊은 나이에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이들이었다.
지금도 훌륭한 전력이지만 미래가 훨씬 더 기대되는 인재들이었단 말이다.
그런 자들을 둘이나 잃었다는 것을 뼈아픈 실책이었다.
“돌아가서 폐하께 드릴 말씀이 없군.”
세바스티안 공작은 보고서를 와락 구기며 침통하게 말했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자신의 실책이 크다.
그 둘의 사이가 좋던 나쁘던 간에 본군에 포함시켜서 관리를 해야 했다.
괜히 군을 나눠서 전방위적으로 압박을 한다는 선택지를 했기 때문에 적에게 각개격파를 당한 것이다.
“모두 나 때문이군. 빌어먹을….”
눈에 살기가 흘러넘치는 세바스티안 공작의 중얼거림에 좌중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이 분노한 거인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만큼 간이 부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유일하게 예외가 있다면….
“공작님의 탓은 아닙니다.”
본군에 잔류해 있는 마스터인 라이언 카텔 후작이었다.
그는 세바스티안 공작의 시선을 받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둘은 애당초 지크프리트를 너무 얕잡아 봤습니다. 최선을 다해도 이길까 말까 한 적을 상대하면서 자만심이 가득했으니…. 이건 예견된 결과였습니다.”
“자네가 군략 회의에서 말을 하는 건 처음 보는군. 카텔 후작.”
“어쩔 수 없죠. 지금 저 말고는 모두 숨 쉬기도 버거워 보이니까요.”
카텔 후작의 말에 세바스티안 후작은 자신이 살기로 좌중을 압박하고 있음을 알았다.
‘나도 수행이 한참 부족하구나.’
그는 한숨을 내쉬며 살기를 거둬들였다.
그러자 사방에서는 그제야 숨통이 트였는지 깊은 안도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세바스티안 공작은 카텔 후작을 보며 말했다.
“그대는 이미 버켈 후작과 모론 후작의 패배를 예상했었던 건가?”
“예. 그 둘이 전사할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상대가 상대이니까요.”
그리고 카텔 후작은 좌중에 있는 참모진에게 시선을 주며 말을 이었다.
“승리를 당연시하는 썩어빠진 정신으로는 절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카텔 후작의 시선은 마치 네놈들도 마찬가지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런 카텔 후작의 시선에 참모진들 중에 상당수가 움찔했다.
사실, 그 말에 찔리는 구석이 있기는 했다.
라이언 카텔 후작.
그는 원래 제국 출신이 아니다.
스트라부스 왕국이 멸망하면서 제국으로 망명한 남자였다.
일신의 무위가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제국에서도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그게 다였다.
결국 제국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일곱 명의 마스터보다는 약간의 차별 대우를 받았다.
이 전쟁이 시작되고 라이언 카텔 후작은 계속해서 말했다.
공화국을 이끄는 지크프리트는 절대 무시할 상대가 아니다.
군사 강국이었던 스트라부스 왕국을 상대로 불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만들어냈을 정도로 대단한 강적이다.
그러니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서 전쟁에 임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그런 카텔 후작의 주장은 일리가 있었지만 문제는 이것이 제국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마스터라고 해도 카텔 후작은 결국 외부인.
거기다 공화국에 커다란 패배를 겪은 스트라부스 왕국 출신이다.
앞에서 대놓고 말하는 이는 없었지만 그들은 카텔 후작의 경고를 패배자에게 각인된 공포심이라고 생각했다.
스트라부스 왕국에 한때 대륙에서 제2위의 군사 강국이었다고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건가?
자신들은 제국이다.
제국의 상황을 이미 망국이 되어 버린 스트라부스 왕국과 비교해서 말하는 것 자체가 제국인들에게는 몹시 거슬리는 일이었다.
결국 카텔 후작은 언제부터인가 그런 충고를 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는 스스로가 달변가가 아님을 알고 있었고, 또 자신을 무시하는 제국인들의 대응에도 짜증이 났던 것이다.
‘결국 한 번은 당해봐야 알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그냥 한발 물러나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제국인들에게 자신의 말이 먹히는 순간이 왔다고 느끼고 입을 연 것이다.
“하지만 카텔 후작님. 적들이 좌익과 우익을 거의 동시에 격파했다는 말은 적의 주력이 좌우에 분산되었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참모 중에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틈에 군의 진격 속도를 높여서 적을 처리해야 합니다. 적에게 시간을 끌면 좌우의 주력이 복귀해서 전투가 한층 까다로워질 것입니다.”
“그러니, 중앙군의 선봉을 맡은 나는 어서 돌격하라 이건가?”
“결코 후작님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지만…. 예. 지금은 그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입장이 아래다 보니 약간 꼬아서 하는 말이긴 했지만 결국 너는 네 할 일을 해라, 라는 내용의 질책이었다.
카텔 후작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른 이들도 똑같이 생각하나? 지금 내가 선봉군 5만을 이끌고 적을 공격해야 한다고?”
뭔가를 시험하는 듯한 카텔 후작의 말에 참모들은 잠시 생각하는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게 좋을 듯합니다.”
“아무래도 적의 주력이 빠져 있는 지금이 공격의 최적기겠죠.”
그런 참모들의 말에 카텔 후작은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게 제국의 참모진의 수준인가?’
암울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제국은 강하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대륙에서 가장 많은 마스터를 보유했고, 강력한 기사 전력과 정예 병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 전력을 능히 유지할 수 있는 영토와 인구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강한 제국이었기 때문에 역으로 약점이 생긴 곳도 있었다.
그게 바로 참모진이었다.
강력한 기사와 병사는 훈련으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전쟁에서 지략을 겨루는 참모는 책만 파고들어서 만들 수 없는 게 상식이다.
물론 가끔은 이런 상식을 넘어서는 괴물들도 있지만 보통 뛰어난 참모라는 것은 전쟁터에서 많은 경험을 쌓으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제국의 참모진은 그런 경험이 철저하게 부족했다.
제국에 감히 맞서는 적이 없다 보니 참모진들이 경험을 쌓을 기회도 없었고, 그들 대부분이 책으로 지식을 습득했을 뿐이다.
스트라부스 왕국 출신으로 공화국과 항상 전쟁을 치러왔던 라이언 카텔 공작의 입장에서는 이 애송이 참모들이 하는 소리가 전부 삐약 삐약으로 들릴 뿐이었다.
솔직히 이게 스트라부스 왕국에서 벌어진 일이었으면 개소리를 지껄이는 참모진들 목을 싹 날려 버렸을 것이다.
“하나만 물어보지.”
“말씀하십시오.”
“적의 본진에 주력이 빠져 있다. 라는 주장을 하는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주력을 대거 동원하지 않았다면 어찌 우리 제국의 마스터를 둘이나 쓰러트릴 수 있었겠습니까?”
“즉, 순전히 자네들의 예상이군.”
“예. 그렇기는 합니다만….”
뒤에 말을 흐리는 참모진을 보고 카텔 후작이 말했다.
“버켈 후작을 쓰러트린 인물은 제이크라고 하던가? 공화국에 새롭게 등장한 마스터라고 했다. 아마 지크프리트 놈이 아끼는 비장의 카드 중에 하나였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론 후작의 상대. 여기에는 첩보조차 불안하더군. 생존자가 적기도 하지만 적의 전투 방식조차 뚜렷하지 않았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여기서도 지크프리트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지.”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지크프리트, 그놈은 결코 자신의 주변을 무방비하게 놔둘 놈이 아니다. 대범한 듯 보이는 전략을 구사할 때도 항상 자신이 직접 주력 전력과 함께하고 있었어. 즉, 놈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말은 아직 공화국의 본군에는 충분한 전력이 남아 있다는 말이다.”
카텔 후작의 막힘없는 말에 참모진은 얼굴을 붉히고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것이야 말로 후작님의 예상 아닙니까? 저희하고 다를 게 뭡니까?”
“다르지. 네놈들은 승리할 것이라는 당연한 미래를 전제하에 달콤한 몽상을 하고 있고, 나는 공화국을 상대해본 경험으로 적을 판단하고 있다. 이게 같아 보이나?”
경험이 없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지적하는 카텔 후작의 말에 참모진들은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그중에 한 명이 도발적으로 말했다.
“후작님은 적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군요. 혹시 공화국이나 지크프리트가 두려우십니까?”
이건 도발적이다 못해 과격한 발언이었다.
잘못하면 모독으로 받아들여서 결투를 신청 받을 수도 있을 정도로 말이다.
말하고 나서 본인도 순간 아차 싶은 기색이 있었고 주변의 참모진들은 저 친구 어쩌려고 저러나? 라는 걱정의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카텔 후작의 대응은 너무나 뜻밖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