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181화 (181/257)

제181화

‘어떻게 이럴 수가….’

7조의 조장은 몰랐겠지만 진상은 이렇다.

함정이 발동하고 떨어지는 동안 모론 후작은 자신의 발밑에 창날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의 발치에 달라붙어 있는 적들 때문에 이 함정에서 빠져 나갈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게 판단을 내린 순간….

그녀는 직감적으로 움직여서 활로를 찾았다.

자신의 발치에 매달려 있는 적의 시신 두 개를 발판으로 삼아서 함정을 피한 것이다.

푹푹푹!

날카로운 창날이 시신에 박혔지만 그녀는 시신의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함정을 피할 수 있었다.

머리로 생각하기보다는 위기의 순간 판단력이 그녀를 구한 것이다.

심혈을 기울여서 준비한 함정이었지만 그것보다 모론 후작의 대응력이 위였다.

그리고 이제 7조에서 준비한 함정은 더 이상 없었다.

남은 것은 순수한 힘의 승부인 상황이 된 것이다.

모론 후작은 함정 밖으로 나와서 뒤편에서 아직 싸우고 있던 병사들을 향해서 외쳤다.

“포기하지 말고 싸워라! 적들의 정예 병력은 내가 전원 제거하겠다!”

절망적인 순간에 건재함을 자랑하는 마스터의 목소리.

그것은 확실하게 군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효과가 있었다.

“후작님은 무적이시다!”

“전원 검을 들어라! 공화국의 악적들을 공격하라!”

“제국 만세!!”

많이 상하기는 했지만 은빛 늑대 기사단을 주축으로 그들이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론 후작은 자신의 주변에 있는 고스트들을 보며 말했다.

“이제 너희들만 정리하면 되겠군.”

그러자 7조의 조장이 이를 갈며 말했다.

“우리가 없다고 해도 저 압도적인 상황이 뒤집힐 것 같은가?”

“그래.”

담담하게 대꾸하는 모론 후작의 말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7조의 조장을 향해서 말했다.

“너희들이 아마 고스트지? 지크프리트의 심복이라고 하는?”

“그렇다면?”

“너희들이 나한테 집중하는 사이 정예 병력이 아군을 포위 섬멸했다면 이미 우리 군사들이 버틸 리가 없어. 그런데 숲에 숨어서 화살 공격만 하고 있지. 이게 뭘 뜻하는 걸까?”

“…….”

모론 후작의 말이 점점 핵심에 접근한다는 것을 알자 7조의 조장은 말을 멈췄다.

그 침묵에 오히려 확신을 가진 모론 후작은 자신감을 가지고 말했다.

“너희들 빼고는 모두 징집병인 거야. 아니면 정예병이 있어도 지극히 소수일 테고 말이야. 아닌가?”

“으음….”

7조의 조장은 침음성을 내뱉었다.

모론 후작의 말은 진실이었다.

엘리제가 제물을 다량으로 요구했기 때문에 징집병을 우선시해서 전장에 밀어 넣었다.

또한, 기밀의 유지를 위해서 그들을 철저하게 500 단위로 나눠서 격리 운용했다.

그렇다 보니 지금 저기서 화살을 날리고 있는 자들은 정예병도 아니었고, 다수도 아니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모론 후작을 잡아내는 동안 그녀의 수족인 은빛 늑대 기사단의 발목을 잡아 주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동원한 이들이었다.

그리고 모론 후작을 잡아내는 것에 실패한다면….

“내 병력은 정예다. 기습의 효과가 언제까지 갈 거라고 생각하나? 화살이 다 떨어지는 순간이 저 잡병들의 최후다.”

계속해서 정답이었다.

은빛 늑대 기사단은 어느새 진형을 갖추고 화살에 대응하고 있었다.

독화살이 치명적이긴 해도 결국 화살 하나에 고집된 패턴에 대응하는 것은 쉬웠다.

독하게 마음먹으면 아군의 시체를 방패로 삼아서라도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화살이 떨어지면 그때는 상황이 반전될 것이다.

“나는 그 전에 너희들을 정리하면 그만이지. 비록 이 전쟁에서 승리는 무리라고 해도 아군을 위해서 너희들 정예를 괴멸시키는 정도의 체면은 세워야겠지.”

모론 후작은 그렇게 설명을 끝내고 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자, 이제 설명은 끝났다. 이견이 없다면 죽어 줘야겠다.”

그리고 모론 후작은 가장 먼저 7조의 조장을 정리하기 위해서 다가갔다.

물론 다른 대원들이 그걸 지켜보고 있을 리는 없었다.

“전원 공격!”

“대장님을 후송하라!”

부상을 입은 7조의 조장을 후방으로 빼돌리기 위해서 다른 고스트 대원들이 모론 후작에게 달려들었다.

함정에 기대지 않고 정면으로 돌격하는 그들을 보며 모론 후작은 눈을 스산하게 떴다.

“건방진 것들.”

그녀의 검이 허공에 빛의 궤적을 그었다.

보는 사람을 매료시킬 정도로 아름다운 빛살이었지만 그 빛은 피를 뿌리고 생명을 거둬갔다.

암습과 정보 수집에 특화된 7조는 고스트 안에서도 개개인의 무력은 떨어지는 곳이다.

비약을 먹는다고 해도 조장 한 명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익스퍼트 중급이나 하급 정도에 그쳤다.

아무리 결사의 각오를 다진다고 해도 그런 실력으로 마스터에게 달려든다는 것은 불을 향해 날아드는 나방과 같았다.

“크악….”

“커억…. 으윽··.”

“지크프리트…. 님…. 만세….”

대원들이 빠르게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7조의 조장은 눈에 핏발이 섰다.

“이…. 이놈….”

고스트 대원들 대부분은 세상에 버림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지크프리트에게 구원 받았다 생각하고 그들에게 충성을 다하지만 한편으로는 동료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외부와 고립된 정예 부대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끈끈한 전우애를 생성해 내기 마련이다.

특히 7조의 조장은 그런 경향이 강해서 그에게 있어 대원들은 자기 살붙이와 같았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죽음조차 필요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게 7조다.

하지만 저건 아니다.

절대 저렇게 무의미하게 학살당하는 것을 참을 수는 없었다.

“모론 헤일리이이이이!”

7조의 조장은 얼굴 반쪽이 날아간 상태로도 분노를 터트리며 달려갔다.

그 답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그만큼 분노가 크다는 증거였다.

“이제 오는가?”

모론 후작은 고스트 7조를 혼자서 상대하면서도 7조 조장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이 무리의 우두머리이며, 또 가장 강한 강자였다.

그녀가 신경 쓰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나름 강자로 보이는 적이긴 하지만 결코 자신의 상대는 아니었다.

거기다 이미 당한 일격으로 한쪽의 시야가 날아간 상태라면 얘기는 더 쉽다.

‘이걸로 끝이다.’

모론 후작은 상대가 자신의 거리에 접근하는 그 순간 베어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상대가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어 자신을 향해 집어 던졌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반사적으로 베어 버렸다.

이미 검을 휘두를 준비를 하고 있었던 만큼 피한다는 선택지보다는 베어 버린다는 선택지가 우선적으로 작동한 것이다.

그것이 모론 후작의 실수였다.

퍼어엉!

작은 주머니 같은 그것은 모론 후작의 검에 닿자 매캐한 연기를 일으키며 터져버렸다.

‘독?’

직감적으로 좋지 않은 느낌을 받은 모론 후작은 급하게 뒤로 물러나며 입을 막았다.

빠른 판단 덕분에 그녀는 정체불명의 연기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윽….”

세상에는 피부로 접촉하기만 해도 효과를 보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런 약물은 작정하고 많은 양을 발라야 효과를 내지만 지금 이건 예외다.

순수한 약학으로 만들어낸 물건이 아니라 엘리제가 자신의 마도 지식을 이용해서 만들어낸 시약의 일종이다.

그 효과는 강력하고 빠르게 나타났다.

“크윽…. 윽….”

모론 후작은 그대로 비틀거리더니 지면에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뭐지? 이건….’

그녀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평범한 독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체온이 급격하게 오르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리고 그녀가 한평생을 살면서 절제하고 멀리해 왔던 본능적인 충동이 솟구치고 있었다.

“비…. 비열한….”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고 말하는 모론 후작의 모습에 7조의 조장이 오히려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도대체 무슨 약을 쓴 거지? 마스터를 이렇게 쉽게 무력화시킬 수 있다니?’

사실은 엘리제가 준 약물이 워낙 수상해서 어지간하면 쓰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궁지에 몰리고 부하들이 죽어가는 와중에 더 이상 쓸 수 있는 수단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하긴 했지만 사실 이렇게까지 효과가 좋을 줄은 몰랐다.

7조의 조장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한쪽에서 엘리제가 나타나서 말했다.

“아아아…. 이제야 끝났네. 왜 이렇게 오래 걸린 거야?”

그녀가 나타나며 투덜거리는 말에 7조의 조장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이 약은 뭡니까?”

“응? 그거?”

엘리제는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좋은 거지. 아주 좋은 거.”

“장난하지 말고 말해 주십시오.”

“후후후…. 별것 아니야. 남자에게는 듣지 않고, 여자에게만 듣는 일종의 호르몬 촉진제라고 할까? 쉽게 말하면 최음제지.”

“…….”

7조의 조장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자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런 지저분한 약을 준 겁니까?”

“응. 뭐 불만 있어?”

“그건….”

7조의 조장은 할 말이 없었다.

사실 그는 암살과 염탐이 주 임무였고 그 과정에서 독이나 함정도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모두 지크프리트라는 주군의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손을 더럽히지 않으면 도자기를 빚을 수 없듯이, 지크프리트라는 위대한 영웅의 그늘에서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는 것이 고스트 7조였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 기습이나 암습을 하면서도 거기에 거부감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성에게 최음제를 먹이다니?

그렇게 지저분한 행각은 꿈에도 해본 적 없었다.

“크윽….”

분노에 치를 떠는 7조의 조장에게 엘리제가 말했다.

“헤에…. 화 많이 났나 봐?”

“안 날 것 같습니까?”

“알았어. 알았어. 화 풀어. 대신 네가 제일 먼저 하면 되잖아?”

순간 7조의 조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했소? 지금?”

“응? 네가 먼저 하라고. 왜? 싫어.”

“이…. 미친년이….”

7조의 조장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자 분노를 금할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더러 최음제에 중독된 여성을 겁탈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도 모론 헤일리 후작을 말이다.

여성의 몸으로 마스터의 경지를 개척한 그녀는 설령 적이라고 해도 경의를 표할 가치가 있는 적이었다.

그런 여인을 겁탈하라니?

자신의 명예뿐만 아니라 주군인 지크프리트의 명예에도 먹칠을 할 일이었다.

“그런 미친 짓은 절대 할 수 없소.”

“뭐? 왜에에…?”

7조 조장의 말에 엘리제는 오히려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론 헤일리 후작이라고 하면 검의 길을 걷는 자들이 모두 경애하는 영웅이요. 설령 적으로 만나서 최선을 다해 싸웠다고 해도, 전투 이외의 수단으로 그녀의 명예를 훼손할 생각은 없소.”

“에이…. 딱딱한 소리 하지 마. 그게 오히려 좋은 것 아니야? 그렇게 하늘 위의 구름 같은 여자가 지금 너희들 품 안에 떨어진 거라고. 마음껏 더럽혀 버려. 그건 틀림없이 최고의 쾌락을 보장해 줄 거야. 내가 장담할게.”

“거절하오! 그것은 주군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오!”

7조의 조장은 강경하게 나왔고 엘리제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뭐? 아 진짜…. 다른 사람들은 어때? 너희들도 이렇게 꽉 막힌 소리 할 거야? 이 정도면 남자들이 보기에 끝내주지 않아? 그런데 그냥 둘 거야?”

엘리제의 말에 다른 고스트 대원들도 그냥 경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사실 고스트가 아니라 다른 공화국의 군인이라면 엘리제의 말을 들었을지 모른다.

인간은 생각보다 나약하고 이기적이라서 특정 상황에서 명분이 주어지면 몹시 잔인해지고 욕망에 취약해질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엘리제가 반인륜적인 범죄를 종용하고 있는 존재는 고스트다.

지크프리트의 숨은 오른팔로 오랜 세월 동안 암약하며 강철의 규율과 충성으로 다져진 정예 중에 정예다.

명령을 내린다면 이보다 더한 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실제 다른 고스트 부대가 데이비드의 명령을 받아서 멀쩡한 마을을 불태우고 민간인을 다 죽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필요에 의한 목적이 아니라면 절대 명예를 져버리지 않는다.

진짜 정예군이라는 것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정신력 자체도 강한 군대를 말하는 것이다.

“이 고자 새끼들아! 다 짤라 버려!”

엘리제가 버럭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그 말에 한쪽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큭…. 크큭…. 쓰레기… 같은 지휘관보다는…· 나은…. 부하들이군.”

거기에는 온몸에 들끓는 충동과 싸우고 있던 모론 후작이 있었다.

그녀는 정신이 멍한 와중에도 들을 말은 다 듣고 있었다.

엘리제는 그녀의 조롱을 듣고 인상을 팍 구기더니 그대로 다가가서 모론 후작의 머리를 발로 밟아 버렸다.

“크윽….”

모론 후작은 머리가 짓눌린 상황에서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엘리제는 진심으로 분노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웃어?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온단 말이지? 응?”

엘리제는 모론 후작을 보고 이를 갈며 말했다.

“나는 말이지…. 너 같은 애들이 정말 싫거든. 여자 주제에 자신의 능력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어서 나 잘났다고 어깨 펴고 다니는 여자들을 보면 말이야.”

퍽!

“이가!”

퍽!

“갈려서!”

퍽!

“벌레처럼!”

퍽!

“밟아 죽이고!”

퍽!

“싶단 말이야! 이 XX년아. 알겠어?!”

엘리제는 광기를 터트리며 모론 후작의 머리를 밟고 또 밟았다.

모론 후작은 거기에 반항도 거의 못하고 있었지만 그녀 역시 독기만큼은 엘리제에게 지지 않았다.

“열등감 끝내주는데…. 큭…. 누구한테 비교당한 적이라도… 있나 봐?”

“…….”

그런 모론 후작의 말은 엘리제의 역린을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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