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화
모론 후작은 광기의 현장 속에서 최대한 멀쩡한 아군을 수습해서 현장을 이탈했다.
사실 정신이 멀쩡한 사람은 많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환각 작용이 약해지니 서서히 정신을 차리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이미 많은 아군이 상했고, 더 이상 이 광기의 현장에 있을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간신히 수습한 병력을 거느리고 직접 선두에서 아군을 이끌며 현장을 이탈했다.
“모두 내 뒤를 따라라! 뒤처지는 자들은 구할 수 없으니 절대 방심하지 마라!”
그리고 그녀는 직접 검을 휘두르며 아군을 이끌었다.
그 과정에서도 상당수의 아군이 상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말대로 이 이상 병력을 구원할 여유는 없었다.
결국 현장을 이탈했을 때 그녀가 이끄는 병력은 2,000도 되지 않았다.
참담한 패배였다.
아니, 이것은 패배조차 아니었다.
적과 한 번 싸우지도 않고 갑자기 병사들이 정신 착란을 일으켜서 군이 스스로 무너지다니?
대륙의 전쟁사에 길이 남을 정도로 어이없는 실태, 아니 추태였다.
항상 완벽한 경력을 자랑했던 모론 후작은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적이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그렇지 않고는 이런 일은 설명이 되지 않아.’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모론 후작도 이제 확신을 하고 있었다.
이건 적이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라고 말이다.
‘간첩? 식사에 환각제를 탄 걸까?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
그녀의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 순간….
“후작님, 전방에 적이 나타났습니다.”
기사 한 명이 외친 보고에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적이라고?’
2만의 병력이 10분의 1이하로 줄어들었지만 이 전쟁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조우한 적이다.
그동안 쌓인 울분을 토해내듯이 그녀는 외쳤다.
“전군 돌격! 기사단은 나를 따르라!”
적의 병력 규모를 파악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녀는 앞뒤 가리지 않고 선두에 서서 적을 향해 돌격했다.
그만큼 그녀는 분노에 차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은빛 늑대 기사단은 모론 후작의 명령에 신속하게 반응했다.
그녀를 뒤를 따라서 달려가는 은빛 늑대 기사단은 지친 상태였지만 충분히 용맹해 보였다.
하지만, 전쟁이란 때때로 용맹함이 무모함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있는 법이다.
“지금이다!”
“힘껏 당겨!”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와 함께 갑자기 지면에서 뭔가가 확 솟구쳤다.
그것은 지면에 얕게 묻어둔 두꺼운 로프였다.
좌우의 길목에 배치된 병력이 힘껏 잡아당기자 줄이 위로 올라갔다.
그 높이는 딱 기수의 목에 걸리는 높이였다.
“읏….”
모론 후작은 자신의 바로 앞에 나타난 두꺼운 로프에 급하게 머리를 숙였다.
아슬아슬하게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녀는 함정을 무사히 피했다.
하지만 그건 마스터 클래스인 그녀의 반사 신경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녀를 뒤따라오는 기사들 중에 몇 명이 함정을 피하지 못했고, 그 결과는 상당히 참혹했다.
“꺄아악!”
“아악!”
기마 차지를 하기 위해서 전속력으로 달리던 그녀들은 그대로 목에 줄이 걸려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뒤에서 따라오던 동료의 말발굽에 밟혀서 참혹한 결과를 맞이하고 말았다.
“멈춰! 멈춰어어!”
“전군 정지!”
몇몇 기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아군을 다독였지만 그때는 이미 군의 대열이 혼란에 빠진 상황이었다.
함정에 발이 멈추고 대열도 통제가 되지 않도록 혼란스러워졌다.
그리고 이런 결과야말로 적이 바라던 바였다.
“발사!”
적이 멈춰서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사이에 다음 공격이 시작되었다.
좌우의 매복군이 화살을 발사했고 거기에 은빛 늑대 기사단은 그대로 혼란에 빠졌다.
“큭…. 방패를 들… 윽!”
병사들에게 방패를 들라고 명령하려던 기사는 병사들에게 방패조차 없는 현실을 파악하고 신음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녀들은 깨달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병사들에게 어떤 명령을 내려야 할지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이건 그냥 최악의 상황이었다.
여기서 해야 할 일이 딱 하나 있다면 그건 어떻게든 흩어져서 도망가는 것뿐이다.
“큭…. 빌어먹을 공화국 새끼…. 크…. 크으으으으…”
심지어 화살에 맞은 병사들은 이상한 모습을 보였다.
갑자기 안색이 보랏빛으로 변하고 쓰러지는 병사들의 모습은 독에 중독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화살에 독이 발라져 있다! 모두 피해!”
“피해라! 화살에 맞으면… 크으으…. 윽….”
여기저기서 쓰러지는 자들이 속출했다.
“이…. 이런…. 이런.”
자신의 뒤에 따라오던 기사단과 병사들이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모습을 보고 모론 후작은 말을 잊지 못했다.
이걸 과연 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매복과 기습은 둘째치고, 함정과 독을 이용한 비열한 방법으로 적을 학살하는 방식은 철저하게 효율만을 추구하는 사냥에 가까웠다.
“비열한 것들! 정면으로 승부할 용기는 하나도 없느냐?!”
모론 후작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7조의 조장이 그녀의 정면에 나타나며 말했다.
“전쟁터에서 정정당당을 찾는가? 검으로 지고한 경지를 이룩했다고 하지만 여자는 여자군.”
“그 말 후회하게 될 것이다.”
모론 후작의 분노가 서렸다.
여자라서 안 된다. 라는 식의 말은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7조의 조장은 그걸 알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정보대로군. 많이 흥분했어.’
암살과 정보 수집에 특화된 고스트 7조의 조장이기에 그의 머리에는 적에 대한 시시콜콜한 정보가 많이 들어 있었다.
그랬기에 모론 후작에게 여자 운운하며 도발을 하면 분명 먹힐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녀는 말에서 내렸다.
마스터인 그녀의 신체 능력을 최대한 살리려면 말에서 내리는 편이 더 나았다.
그 증거로 그녀의 검격이 거침없이 7조의 조장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큭…”
지금 7조의 조장은 비약을 복용해서 자기 경지를 억지로 한 차원 끌어올린 상태다.
익스퍼트 최상급의 경지를 억지로나마 만들어 냈기에 모론 후작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버티기 급급한 것이었고, 이대로 가면 20여 합이 끝나기 전에 그의 목이 바닥에 떨어질 것이 뻔했다.
다만 그것은 ‘이대로 가면’이라는 가정하에서의 말이다.
날카로운 공격으로 일방적으로 적을 몰아붙이던 모론 후작은 갑자기 머리를 확 숙였다.
그러자 아슬아슬하게 머리카락을 스치고 무언가가 지나갔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공격이 날아온 것은 좌측에서 새롭게 나타난 적이었다.
고스트 대원 하나가 그녀를 노리고 옆에서 석궁을 발사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주변에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석궁을 장비하고 있는 고스트 대원들이 둥글게 둘러싸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는 포위망의 한가운데에 고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쏴라!”
조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녀를 향해서 동시에 화살이 날아들었다.
그냥 평범한 석궁이 아니라 코브르크 공화국에서 사용하던 특수 석궁이다.
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발사하면 기사의 판금 갑옷이라고 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강력한 무기였으며, 심지어 이 화살에는 독도 발라져 있었다.
까득….
모론 후작은 이를 악물고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지척에 화살이 다가온 그 순간….
“흡!”
짧은 호흡의 조절과 함께 그녀의 검이 엄청난 속도로 휘둘러졌다.
순간 그녀의 주변에 오로라같이 아름다운 장벽이 둘러싸서 주인을 감싸는 느낌을 받았다.
따다다다다다다당!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을 것 같은 그녀의 방어에 화살들은 모두 꺾여 땅에 떨어졌다.
하지만 적의 함정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던져라!”
다시 한번 명령이 떨어졌고 이번에는 무언가가 하늘로 휙 던져졌다.
쇠로 만들어진 쇠 그물이었다.
몇 개나 되는 쇠 그물이 넓게 펼쳐지며 그녀를 덮치려 했다.
순간 모론 후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건 평범하게 검으로 잘라도 소용없다.
그물의 남은 부분이 몸에 휘감기면 결국 행동의 제약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물이 자신에게 떨어지기 직전.
그녀는 앞으로 달려가서 적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쇠 그물의 공격을 벗어났고 오히려 적을 압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7조의 조장이 노리던 순간이었다.
쇠 그물이 허망하게 실패했지만 아직도 함정은 계속되었다.
애당초, 마스터 한 명을 잡아내기 위해서 준비한 함정이 여기서 끝날 리가 없다.
“15호! 16호! 적을 구속하라!”
7조 조장의 명령에 두 명의 고스트 대원이 무작정 모론 후작을 향해서 돌격했다.
하지만 그녀는 저돌적으로 덤벼드는 그들의 기세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어차피….
“의미 없는 짓이다.”
그녀의 검이 한 번의 빛살을 뿜어내자 방어를 도외시하고 달려든 대원 두 명의 가슴이 쩍 갈라졌다.
하지만….
“크르르륵…”
“으으윽….”
두 대원은 입에서 피를 토해 내면서도 마지막 집념을 발휘해서 모론 후작에게 달라붙었다.
한 명이 허벅지를 끌어안고 다른 한 명이 발목을 붙잡았다.
아주 잠시기는 하지만 순간적으로 모론 후작의 행동에 제약이 걸린 것이다.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7조의 조장이 외쳤다.
“19호!”
“옛!”
7조의 대원 중에서 가장 힘이 좋아 보이는 덩치가 나섰다.
그는 사람의 몸통만큼 커다란 워해머를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에 오러를 실어서 지면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흐앗!”
콰아앙!
그러자….
놀랍게도 지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름이 족히 10미터는 될 것 같은 거대한 구멍이 생긴 것이다.
“이탈하라!”
7조의 조장이 명령을 내렸고 고스트 대원들이 썰물이 빠지듯이 뒤로 떨어졌다.
이것이 7조가 모론 후작을 잡아내기 위해서 만들어낸 마지막 함정이었다.
함정을 만들고, 그 위에 탄탄한 판자를 얹어서 함정을 위장하고, 모론 후작의 의심을 지우기 위해서 자신들도 그 함정 위에서 그녀와 싸웠다.
그리고 잠시라도 그녀의 몸이 구속되는 순간을 노려서 함정을 발동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 함정의 밑에는 빼곡한 창날이 준비되어 있었으며 그 창날에는 강력한 마취약이 발라져 있었다.
원래는 극독을 사용해야 했지만 엘리제의 요청이 있었기에 마취약으로 바꾼 것이다.
‘먹혔다.’
7조의 조장은 성공을 확신했다.
마스터의 신체 능력을 모두 고려하고 만들어낸 함정이었다.
애당초, 정면 승부로 마스터를 잡아내려면 대원을 몇 명이나 갈아 넣어도 될지 안 될지 모를 일이다.
그러니 함정을 이용해서 적을 유인하고 거기에 아군의 희생도 종용했다.
고스트 대원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임무 성공률을 자랑한다는 7조의 평가는 이런 신중함으로 이뤄진 것이다.
실제로 모론 후작은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죽은 후에도 자신에게 끝까지 매달려 있던 두 명의 고스트 대원 때문에 동작이 한 박자 늦은 것이다.
‘성공했다.’
7조의 조장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함정을 설계하면서 설마설마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마스터 한 명을 사로잡은 것이다.
저 함정의 밑에 있는 마취제는 코끼리도 반나절은 움직일 수 없게 한다는 독한 약품이다.
아무리 마스터라고 해도 저기에 당한 이상 무력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7조의 조장은 함정의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 다가갔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실수를 했다.
너무 거물을 잡았다는 흥분감에 잠시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평소 부하들에게 늘 강조하는 부분을 말이다.
[방심은 절대 금물.]
함정의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 머리를 들이민 순간 그는 자신의 안면을 향해서 날아오는 날카로운 참격에 기겁을 했다.
쉬이이익!
“크윽….”
무언가가 그의 얼굴 한쪽을 베어 버리고 지나갔다.
그것은 함정의 밖으로 뛰쳐나오면서 모론 후작이 가볍게 날린 일격의 흔적이었다.
그녀는 지면의 위에 올라와서 싸늘한 눈을 하고 7조의 조장을 보며 말했다.
“아직 해볼 게 더 있나?”
그런 그녀의 모습은 멀쩡해 보였다.
마취제의 효과 따위는 전혀 없다는 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