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이상했다.
경지에 이른 후에 이런 일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 꿈, 아니 악몽 자체가 이상했다.
단순한 악몽이라고 하기에는 범상치 않은 악의와 적의를 느꼈다.
인간의 깊고 어두운 부분을 자극해서 정신적 근간을 무너트리는 듯한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서 검을 휘둘렀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녀가 검을 휘둘렀다는 것은, 무언가를 적이라고 인식하고 위기를 느꼈다는 것이다.
인간이 궁지에 몰리면 가장 믿을 수 있는 존재에 의존하는 법이다.
모론 후작에게 그건 바로 검이었다.
눈앞에 어떤 적이 있어도….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항상 자신의 편에 있으면서 절대적으로 배신하지 않고 응해주는 존재.
그녀에게 그런 존재는 검밖에 없었다.
덕분에 그녀는 악몽에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확고한 정신적 지주가 있고 심신이 굳건한 그녀였기에 어찌어찌 벗어날 수 있는 꿈이었다.
“왜 이런 꿈을….”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녀에게 문득 밖에서 소란스런 소음이 들려왔다.
“뭐지? 적의 야습인가?”
모론 후작은 서둘러 검을 들고 막사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신속하게 밖으로 나간 그녀가 목격한 것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한 광경이었다.
“아아악! 그만. 제발 그만!”
“용서해 줘. 내 잘못이 아니야. 정말 그렇게 될 줄 몰랐어!”
“죽어! 죽어! 제발 죽으란 말이야! 사라져 버려!!”
그건 한 편의 지옥도와 같았다.
엄중한 군기로 조련된 병사들이 괴성을 지르며 서로 싸우고 있었다.
심지어 그 광기는 병사들뿐만 아니라 기사들에게도 전염되었다.
기사들 역시 몸에 피갑칠을 하며 아군을 상대로 학살을 자행하고 있었다.
몇몇 멀쩡한 기사들이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해 봤지만 이 광기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게 도대체….”
아연실색한 표정을 하고 있는 모론 후작에게 정신이 멀쩡한 기사 한 명이 다가와서 말했다.
“후작님. 병사들이 집단으로 정신 착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사들 역시 상당수가 같은 증상을 보이고 있습니…. 읏?”
보고를 하던 기사는 자신을 향해서 섬광같이 날아오는 모론 후작의 참격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섬광이 지나간 후에도 그녀는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았다.
그 대신….
“크··. 으으으….”
보고를 하던 그녀의 뒤에서 나타난 다른 기사가 땅에 쓰러졌을 뿐이다.
깔끔한 일격 후에 검을 갈무리한 모론 후작이 말했다.
“상황 파악은 나중이다. 우선은 상황을 진정시켜야 한다.”
“예? 예…. 예!”
“지금 당장 정신이 멀쩡한 자들을 모아라. 모이는 즉시 이 미친 현장을 탈출하겠다.”
“예. 알겠습니다.”
“서둘러라. 그리고 방해하는 자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베어 버려라.”
“옛!”
그렇게 지시를 내린 후에 모론 후작은 본인도 검을 빼들고 광기의 현장을 정리하기 위해서 움직였다.
“이게 만일 누군가의 수작질이라면….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자신의 검에 아군의 피를 묻히게 된 모론 후작의 눈빛에는 서늘한 분노가 맺혀 있었다.
“대단하군.”
“그렇습니다. 설마…. 마법으로 이런 것이 가능할 줄이야.”
“대단해. 그리고….”
고스트의 조장들 중에서도 가장 과묵하다는 7조의 조장은 뒷말을 삼켰다.
하지만 그가 뒤에 하려고 하는 말은 부하들 모두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위험하다는 거겠지?’
암살과 잠행에 특화된 고스트 7조의 조원들은 대부분이 과묵하고 감정에 기복이 적은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이 이렇게 생각할 정도로 지금 엘리제가 한 일은 터무니없었다.
2만의 대군을 혼자서 괴멸 상태에 몰아넣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모든 것을 혼자서 한 일은 아니다.
그녀의 마법은 강력하지만 그 강력한 마법을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하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상당한 숫자의 제물이 말이다.
처음에 안개를 불러온 환상 마법에 2,000명, 그 후에 강이 불어나도록 보이게 한 환상 마법에는 무려 3,000명을 인신공양의 제물로 바쳐야 했다.
이전에 그녀가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 펼친 제물들은 지크프리트가 죄인이나 적의 포로들로 조달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필요한 제물의 규모가 너무 컸기에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지크프리트가 고삐를 풀어주자 그녀는 단 번에 천 단위의 제물을 요구한 것이다.
7조의 조장은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엘리제는 담담하게 아군을 제물로 바치면 된다고 말했다.
7조의 조장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엘리제는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1만 명 갈아 넣어서 2만의 적을 물리치면 이득이지. 안 그래?]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흔히 전쟁을 숫자 놀음이라고 하기는 한다.
얼마나 살리느냐? 그리고 얼마나 죽이느냐?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마치 2-1=1 이다.
라는 공식을 설명하는 것처럼 담담하게 말하는 것이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아무리 군령이라고 해도 이런 명령을 수행하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고스트는 지크프리트의 명령이라면 죽음도 기꺼이 불사하도록 세뇌된 자들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7조는 원래 암살이나 잠행 같은 은밀한 일들을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자들이다.
결국, 지크프리트는 엘리제의 고삐를 풀어 놓으면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고 예상하고 인선을 이렇게 배치한 것이다.
7조의 조장은 결국 엘리제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전쟁터라는 곳은 대량의 사망자가 발생해도 자연스럽게 은폐 공작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500명씩 별동대를 조직해서 자연스럽게 그들을 유인했다.
그리고 그들을 제물로 바치고 임무에 실패해서 전멸한 것으로 위장했다.
자신들의 전투를 철저한 게릴라 전투로 위장하며 적들과 용맹하게 싸우다 죽었다고 아군에게 알리며 그들을 제물로 바쳤다.
몇 번이고 대규모로 제물을 바치자 엘리제의 마법은 확실하게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2만의 대군을 통째로 현혹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환상 마법을 발현한 것이다.
거기다 결정타는 오늘밤이었다.
엘리제는 제물 이외의 다른 것도 같이 요구했다.
그것은 환각 작용을 일으키는 독초와 버섯 등이었다.
정확한 종류를 요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환각제와 마취제 종류의 마약류 약초를 최대한 많은 양으로 조달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제물로 쓸 인간 5,000명도 요구했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나자 계획은 진행되었다.
적의 진형을 향해 바람 방향을 잘 계산해서 환각제가 가득한 약초와 버섯에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가 스멀스멀 적들을 향해서 번져갔고, 적들에게 약효가 돌자 엘리제가 제물을 바쳐서 마법을 시전했다.
그녀는 은은하게 붉은빛이 감도는 마법진 위에서 빙글빙글 돌며 춤추고 노래했다.
같이 놀자. 같이 놀자.
마녀의 숲에서 같이 놀자.
향긋한 홍차를 우려 줄게.
소녀의 피로.
먹음직한 파이를 구워 줄게.
소년의 살로.
함께 마시고 함께 먹자.
마녀의 숲에서 같이 놀자.
그런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움과 섬뜩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녀가 마법을 사용할 때는 이게 무슨 효과가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의식이 끝나고 고스트 대원들이 적진을 정찰한 결과는 실로 놀라웠다.
2만의 군대가 집단으로 광기의 폭주를 일으킨 것이다.
모든 이들이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략 8할 이상의 인간들이 광기를 폭발시키며 동료들을 죽이고 있었다.
이미 적은 군대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내가 말했지? 이득이라고?”
엘리제가 어깨를 펴고 자랑스럽게 하는 말에 감정이 희미한 고스트 대원들조차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이들은 평소 마법의 대단함을 체험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복용하는 비약이 바로 마법의 산물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이라고 해도 마법의 힘이 이정도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건 도대체 무슨 마법입니까?”
마법의 위험성을 재인식한 7조의 조장이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 엘리제에게 질문을 했다.
그러자 엘리제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별것 아니야. 그냥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트라우마를 자극해서 마이너스적인 감정을 폭주시켜 인간의 이성을 무너트리는 것뿐이지.”
“…….”
중간에 모르는 단어가 조금 있었지만 7조의 조장은 이렇게 해석했다.
[사람을 미치게 할 수 있다.]
라고 말이다.
‘만약 이 여자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바라보는 7조 조장의 시선에 엘리제는 여전히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걱정하지 말아줘. 지크프리트 님에게는 이런 마법 소용없으니까 말이야.”
“…그게 정말입니까?”
“당연하지. 애당초 트라우마라는 것은 인간의 약점이야. 괴로웠던 기억. 수치스런 과거. 그렇게 쌓였던 상처들을 자극해서 이성을 무너트리는 것이 이 마법이지. 다만….”
엘리제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이게 모두에게 통하는 것은 아니야. 순수한 선인이라거나? 혹은 지극히 순수한 악인이라서 자신의 악행에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이 마법에 걸리지 않아. 그리고 정신력이 비정상적으로 강한 사람은 마법에 걸려도 자력으로 이겨내 버리지.”
그런 엘리제의 말에 7조의 조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마법에 걸리지 않은 자들은 그래서였던 겁니까?”
“맞아. 실제로 모론 후작인가? 그 예쁘장한 애도 이겨냈지.”
그제야 7조의 조장은 안심할 수 있었다.
지크프리트의 과거는 모른다.
선악의 유무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정신력이라면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굳건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 엘리제의 마법이 지크프리트에게 위험이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자, 이제 안심했으면 빨리 일하자고. 일. 설마 여기까지 만들어 줬는데 놓치는 건 아니겠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7조의 조장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탈출하는 적을 추격한다.”
“특히 모론 후작은 놓치면 안 돼.”
엘리제가 한마디를 덧붙이자 7조의 조장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죽여도 안 돼. 반드시 사로잡아야 해.”
마스터를 사로잡아 오라는 무리한 명령에 7조의 조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째서입니까?”
“으음…. 명령?”
“…….”
“해도 되지? 나? 지크프리트 님이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했는걸?”
지크프리트의 이름을 꺼내자 7조의 조장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명령이라면 받들겠습니다. 하지만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에이, 걱정하지 마. 너희들 잘할 거야.”
“상대는 마스터입니다. 죽인다면 모를까 살려서 잡는 것은 무리한 명령입니다.”
그러자 엘리제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말했다.
“남자가 자신감 없으면 인기 없는 법인데 말이야. 어쩔 수 없지.”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품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주었다.
“이게 뭡니까?”
“귀한 거.”
“…….”
싱글싱글 웃으면서 말하는 엘리제는 말을 이었다.
“이걸 사용하면 사로잡을 수 있을 거야.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지? 연막탄과 같이 집어 던지면 돼. 참 쉽지.”
“후우, 알겠습니다.”
7조의 조장은 한숨을 내쉬며 그것을 받았다.
‘그래. 명령은 명령이니….’
아마 독이나 마취제 같은 효과의 무엇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출발하려는 7조의 조장에게 엘리제가 말했다.
“아! 미리 말해 두겠는데, 만약 이러고도 실패하면….”
엘리제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나 화낼 거야.”
그 미소를 보는 순간 7조의 조장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장난처럼 하는 말이지만 저 말은 절대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