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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178화 (178/257)

제178화

정석대로라면 군의 이동 경로를 잡을 때 숲이나 협곡 같은 곳은 되도록 피하는 것이 옳다.

적의 매복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시간을 많이 지체한 모론 후작의 입장에서는 다른 무엇보다 시간이 가장 촉박했다.

‘다소의 위험은 감당할 수 있다.’

솔직히 그녀의 심정은 차라리 적이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제대로 된 전투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 시간만 잃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준비는 끝났나?”

“예. 시키신 대로 완수했습니다.”

엘리제는 지크프리트가 붙여준 부하들에게 지시 상황을 확인했다.

그녀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고 있는 것은 고스트 7조였다.

고스트 대원들 중에서도 개개인의 무력보다는 은밀한 임무를 자주 받고 움직이는 암살에 특화된 자들이었다.

제이크에게 붙여준 것이 무력을 우선시한 정예들이라면 엘리제에게 붙여준 것은 보안을 최우선으로 해서 보낸 인선이었다.

은밀하게, 그리고 몰래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을 붙여서 엘리자의 수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엘리자는 이 임무를 맡았을 때부터 그들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단, 그 지시는 단시간에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환상 마법을 이용해서 시간을 번 것이다.

실제 안개를 불러온다거나, 혹은 강의 폭을 넓히는 마법은 그녀의 실력으로 무리다.

하지만 그것과 같은 효과를 인간에게 심어주는 환상 마법은 그녀의 특기 중의 특기였다.

‘내가 원래 비앙카보다 유일하게 잘하는 마법이 환상 계열이었지.’

덕분에 그녀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번 시간 덕분에 준비는 모두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철저하게 적을 희롱하고 유린하는 것뿐.

“후후후후…. 좋아. 아주 즐거운 시간이 될 거야.”

엘리제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모론 후작은 군을 이끌고 숲에 과감하게 진입했다.

물론 정찰대를 선행시키기는 했지만 그 정찰은 기본적으로 적을 피해가기 위한 정찰이 아니라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위치만 파악하면 적이 있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밀어버릴 생각이었다.

‘이제 적이 무슨 수작을 부려도 소용없다. 그저 힘으로 깨부숴 버릴 뿐이다.’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이 있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답지 않게 과감한 생각이기도 했다.

그만큼 그녀가 시간의 촉박함에 쫓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휘관의 조급함은 알게 모르게 병사들에게 전해지며 불안감을 불러오고 있었다.

문제는 그녀 스스로는 그걸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모론 후작이 이끄는 군이 숲의 안으로 들어오고 첫날이 되었다.

이 숲은 규모가 상당해서 2만의 군이 통과하려면 적어도 이틀은 걸렸다.

시간에 촉박함을 느낀 모론 후작은 어떻게든 하루 만에 주파하려고 했지만 역시 무리였다.

결국 군은 숲에서 하룻밤 야영을 준비해야 했다.

모론 후작은 충분한 범위의 정찰망을 마련해서 적의 습격에 대비하게 하고 야영을 준비시켰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적의 존재가 없군. 적이 매복을 한다면 분명 이 숲이 최적의 지형일 텐데. 혹시…?’

모론 후작은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적은 우리와 맞설 생각이 없는 게 아닐까? 전투를 철저하게 피하고 어찌어찌 시간만 끌려고 하는 게 아닐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럴듯해 보였다.

최근에 갑자기 유속이 불어난 강은 둘째치고, 이전에 안개를 이용한 기만전술을 전투가 목적이 아니라 시간을 끌기 위한 작전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만약 그 짙은 안개를 살려서 전투를 하려고 했다면 마냥 허수아비만 세워 두고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모론 후작 자신이라면 전면에 허수아비를 세우고 적을 유인하는 미끼로 쓰고 측면이나 후방을 공격해서 적에게 큰 피해를 준다는 작전을 짰을 것이다.

하지만 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지 못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얘기가 돼.’

적인 지크프리트는 보기 드문 명전략가라고 했다.

그런 전략가가 자신의 심리를 파고들어서 시간을 끌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앞뒤가 맞아 떨어졌다.

“지나친 신중함은…. 적이 노리는 바일지도 모르겠어.”

모론 후작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막사에 마련된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내일부터 군의 진격 속도를 더 재촉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밤.

모론 후작은 꿈을 꾸었다.

경지에 이른 초인은 자신의 심신을 높은 단계까지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꿈을 꾸는 경우가 거의 없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날 그녀는 드물게도 꿈을 꾸었다.

그녀는 꿈속에서 어린 소녀로 돌아갔다.

그리고 거기서 건장한 체격의 성인 남자와 목검을 마주하며 대련을 하고 있었다.

소녀는 자신의 키보다 더 큰 목검을 들고 온 힘을 다하고 있었지만 눈앞에 있는 상대는 너무 크고 너무 강했으며, 무엇보다 어린 소녀를 상대하면서도 전혀 자비가 없었다.

“아악!”

그 남자의 목검에 어깨를 맞고 목검을 떨어트린 어린 시절의 모론 후작은 그대로 쓰러졌다.

그런 그녀를 향해서 남자가 말했다.

“못난 것! 이런 단순한 공격도 받아내지 못하다니? 그러고도 네가 내 자식이란 말이냐?!”

“죄…. 죄송합니다. 아버지.”

어린 모론 후작에게 소리를 지르는 남자의 이름은 칼빈 모론 후작.

선대의 모론 후작이면서 헤일리 모론 후작의 아버지였다.

아직 어린 소녀에게 아버지는 가차 없이 말했다.

“당장 일어나라! 전쟁터에서 적이 쓰러지면 기다려 주는 줄 아느냐!?”

“예. 아버지….”

그녀는 비틀거리면서 간신히 일어났다.

이것은 어린 시절 그녀의 일상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결코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게도 무뚝뚝한 편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한 번도 사랑이나 애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그녀가 딸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그녀의 아버지는 아들을 원했다.

제국에서 대대로 무가로 이름을 날린 모론 후작가의 후계자는 강하고 튼튼한 아들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딸을 낳았고, 설상가상 딸을 낳는 과정에서 죽어 버렸다.

그는 가족을 향한 애정보다는 가문의 명예에 대한 집착이 더 큰 남자였다.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어버린 아내에게 배신감을 느꼈고, 태어난 딸에게도 실망을 느꼈다.

후처를 들여서 새롭게 자식을 본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죽어버린 아내는 모론 후작가 못지않은 명문 가문으로 함부로 후처를 들여서 딸에게 불이익이 생긴다면 분명 가문간의 분쟁이 일어날 것이 뻔했다.

결국 그는 아들을 낳지 못하는 대신에 딸을 강한 기사로 훈련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자신의 딸을 여자아이로 생각하지 않고 순수한 후계자로 생각하며 엄격한 훈련을 시켰다.

그 훈련 강도는 성인 기사들이라고 해도 쉽지 않을 정도로 가혹했다.

거기서 뜻밖에 알게 된 것은 자신의 딸의 재능이 범상치 않았다는 것이다.

익스퍼트 최상급인 칼빈 모론 후작은 자신의 딸이 천재라는 것을 한눈에 알았다.

그리고 그는 딸에게 성인 기사들도 버거워 할 정도로 엄격한 훈련을 시켰다.

그것은, 사실 훈련이라기보다는 어린애에게 가해지는 가혹 행위에 가까웠다.

만약 모론 헤일리 후작이 천재가 아니었다면 절대 감당하지 못하고 부서졌을 것이다.

모론 헤일리 후작의 유년 시절은 항상 가혹한 훈련과 아버지와의 대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훈련에 소녀는 점점 강해졌지만, 그만큼 부녀의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시간이 흘렀고, 소녀는 여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제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기사가 되었고, 제국의 로열 기사단에 들어갈 정도로 강해졌다.

기사단 안에서는 여성인 그녀를 견제하는 남자들의 텃세가 이어졌지만 그런 남자들은 빠짐없이 그녀의 장갑을 받아야 했고, 결투에서 개망신을 당해야 했다.

이미 그녀의 검은 남자들이라고 해도 당할 사람이 드물 정도로 훌륭해 진 것이다.

그녀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고 더욱더 검을 갈고 닦았다.

이미 아버지의 재촉 따위는 없어졌지만 그녀는 자기 스스로를 재촉하며 철저하게 수련에 매진했다.

그 결과….

“오오오….”

“감축드립니다. 소공녀님.”

“제국의 역사에 길이 남을 일입니다. 소공녀님.”

그녀는 가문의 가신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선명한 오러 블레이드를 만들어냈다.

여성의 몸으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초인이 나타난 것이다.

제국은 그녀의 경지를 인정해 주었고, 그녀에게 새로운 성과 작위를 내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걸 거부하고 자신이 직접 모론 후작가를 이어받겠다고 선언했다.

여성이 작위를 이어받는 것은 드문 일이었지만 아주 없는 경우도 아니었다.

하물며 그 주인이 마스터이고, 원래 후작가의 핏줄임에야 반대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후작가를 위임받았고, 그렇게 된 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의 아버지를 유폐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네 이년! 천하의 불효녀 같으니라고! 네가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이제 선대로 밀려난 칼빈 모론은 딸에게 엄청난 분노를 터트렸다.

하지만 이제 그녀의 눈앞에 있는 것은 자신의 호통에 덜덜 떨던 어린 소녀가 아니라 당당한 한 명의 검호이며 이 제국의 마스터였다.

그녀는 친부의 증오를 한 몸에 받으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이뤄줄 뿐입니다. 강한 후계자가 가문을 더 강하게 이끌어 간다. 이게 당신의 이상 아니었습니까?”

“네가 감히….”

분노에 몸을 떨고 있는 아버지에게 모론 후작이 말했다.

“당신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이제 한적한 시골에서 무의미하게 여생을 보내기를 권해 드리죠.”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그대로 시골의 영지에 유폐시켜 버렸다.

얼마 후.

그녀에게는 한 가지 소식이 전해졌다.

선대 모론 후작인 칼빈 모론이 자결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한평생 권력을 손에 쥐고 살았던 그에게 있어서 권력을 내려놓은 삶은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친딸에게 그 권력을 빼앗겼다는 상실감이 그에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한 것이다.

그의 유서에는 딸을 향한 증오와 원망이 가득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친아버지의 죽음을 전해 들었을 때 모론 후작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심지어 장례식 역시 최소한 간소하게 치르고 자신이 참석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냉혈한이라고 비난했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쓰지 않는 척했다.

하지만 그때를 기점으로 원래 감정의 기복이 적었던 그녀가 더욱더 무뚝뚝해졌다.

그녀에게 아버지란 좋고 싫고를 떠나서 인생 전체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심지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이 그녀에게도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모든 회상이 끝난 지금 그녀의 앞에 홀연하게 선대 모론 후작이 나타났다.

“괘씸한 것. 천하의 패륜아 같은 것. 감히 친아버지를 죽여!”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하듯이 커다란 목소리로 고함을 치는 아버지를 보고 그녀는 순간 반사적으로 위축되는 자신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어린 시절의 자신이 아니다.

“웃기지 마! 당신이 나에게 한 짓을 생각해 봐! 한 번도 아버지다운 일은 한 적도 없으면서…. 단 한 조각의 사랑도 준 적이 없으면서 아버지로서의 권리만 찾겠다고!”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네가 누리고 있는 지휘와 능력. 그 모든 것은 내가 준 것이다. 내가 물려주고 갈고닦아 준 것이다.”

“닥쳐! 닥쳐! 나는 내 실력으로 성공했어. 당신 따위는 상관없어!”

모론 후작은 악에 받쳐서 소리쳤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검을 뽑아서 휘둘렀다.

촤아아악!!

“하아…. 하아….”

모론 후작은 숨을 가쁘게 내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꿈에서 깨어난 그녀는 목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뭐였지?”

꿈에서 깨어난 그녀는 이상함을 느꼈다.

‘악몽이라고?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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