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177화 (177/257)

제177화

제이크와 버켈 후작이 격돌한 그 순간 반대편에서 헤일리 모론 후작 역시 적과 마주했다.

단, 그녀가 마주한 적은 제이크와는 성향이 전혀 달랐다.

제이크와 버켈 후작의 격돌은 양군의 정예들이 모여서 정면에서 힘의 우열을 가리는 승부였다.

하지만, 그녀가 마주한 상대는 제이크처럼 당당하게 상대해주는 그런 적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난관에 봉착해 있던 것이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모론 후작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녀의 눈앞에는 적이 있다.

분명 적이 있지만….

그 적을 쉽사리 공격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적의 규모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끄는 2만의 병력과 적의 병력 사이에는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10미터만 걸어가도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이 짙은 안개 때문에 적의 병력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다만, 어렴풋하게 보이는 적의 병력 규모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결국 섣불리 공격했다가는 군의 통제가 벗어날 염려가 있다고 판단한 그녀는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렸다.

길어야 반나절만 지나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경악스럽게도 이 안개는 3일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더 짙어졌다.

이제는 병사들이 상식을 벗어난 이상한 자연 현상에 공포심을 느끼고 동요될 정도였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군의 통제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고 느낀 모론 후작은 일단 움직이기로 했다.

예정과 다르지만 더 이상 정체 모를 자연 현상 따위에 발목을 잡힐 수는 없었다.

“전군, 저속으로 전진한다. 선두는 보병, 방진을 탄탄하게 하고 후열에 궁수를 배치하라. 기사단은 나와 함께 후방에 머문다.”

그녀의 명령에 따라서 2만의 정예병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전군, 저속 전진!”

지휘관의 호령에 따라서 2만의 정예병들이 천천히 전진했다.

열과 오가 완벽한 것은 물론이고 보병들의 발걸음까지 완벽하게 통일되어서 그 소리가 지축을 두드리는 북 소리처럼 들렸다.

‘…아무런 반응이 없군.’

모론 후작은 후열에서 적들의 움직임을 살피며 눈살을 찌푸렸다.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는 몰랐지만 거리가 가까워지니 약간의 위화감이 들었다.

이쪽에서 움직임을 시작했다면 저쪽에서도 뭔가 움직임이 보여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적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이건 마치….

“설마?”

“왜 그러십니까? 후작님.”

부관의 물음에 모론 후작은 아무런 대답 없이 다음 명령을 내렸다.

“전 병력 정지! 궁병은 화살을 메겨라!”

그녀의 명령에 병사들은 다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1열, 발사!”

그녀의 명령과 동시에 화살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안개 때문에 정확도는 꽤 떨어졌지만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인지 화살은 무난하게 적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그런데….

“망할….”

그 상황을 본 모론 후작의 인상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기사는 그런 모론 후작의 인상을 살피며 말했다.

“후작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속았다.”

그리고 모론 후작은 스스로 말을 몰아서 앞으로 나아갔다.

모론 후작의 돌발 행동에 주변의 호위 기사들 역시 따라나섰고 그녀들은 마침내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이것은…?”

“이런…. 이런 수작에 속았단 말인가?”

용맹스런 은빛 늑대 기사단의 기사들은 분기를 참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들이 지난 3일 동안 적이라고 판단하고 대치했던 적은, 그저 허수아비에 그럴듯한 깃발을 세워 놓은 가짜들이었다.

모론 후작은 그걸 적으로 판단하고 지난 3일 동안 안개가 사라지기만 기다렸던 것이다.

거기다 그녀들을 더욱더 화나게 하는 것은 그녀들이 군기라고 생각했던 것에 적혀 있는 글귀였다.

- 어서 와. 내 숲에 온 것을 환영해. 같이 놀자.

무슨 뜻인지 모를 말이었지만 그녀들은 그것을 명백한 적의 도발이라고 받아들였다.

“교활한 것들….”

“어쩜 이렇게 비겁할 수가 있지?”

“후작님. 당장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저희가 후작님을 능멸한 놈들의 목을 쳐 버리겠습니다.”

은빛 늑대 기사단의 기사들은 크게 분노했다.

그녀들은 전원이 헤일리 모론 후작의 열렬한 추종자들이다.

여성의 몸으로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한 모론 후작을 동경하고, 그녀처럼 되는 것을 목표로 해서 그녀가 조직한 은빛 늑대 기사단에 들어온 여성들이다.

개중에는 가문의 반대에 부딪혀 성을 버리고 들어온 여인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 만큼 헤일리 모론 후작에 대한 충성심은 절대적이었다.

자신들의 우상이 모독당했다는 것을 알자 그녀들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하지만 분노한 그녀들과 달리 정작 모론 후작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만큼의 허수아비를 만들려면 며칠은 걸렸을 거야. 그렇다면 적은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짙은 안개가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이런 준비를 했다는 건가?’

이 작전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진군 경로에 안개가 서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자연을 예측하고 조종하는 적.

그렇게 생각하니 모론 후작은 적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걸 입 밖으로 내지는 않고 그저 담담하게 명령했다.

“가서 군을 추슬러라. 진격로를 다시 잡겠다.”

“예. 후작님.”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아군의 사기가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 스스로가 적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기억해 두었다.

“후후후…. 귀엽기도 해라.”

모론 후작의 군이 움직일 때 한 명의 여인이 그 모습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짙은 안개도 그녀의 시야만큼은 가리지 못했고, 멀리 떨어진 거리도 장애가 되지 못했다.

그녀는 마치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모론 후작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지켜볼 수 있었다.

그녀는 어린애의 장난기를 머금은 것 같이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비앙카와 같은 붉은 머리카락에 황금색 눈동자.

그리고 그녀와 완전히 똑같은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는 그녀는 지크프리트의 숨겨진 심복 중에 한 명인 엘리제였다.

버켈 후작을 상대로 지크프리트가 내민 카드가 제이크였다면, 모론 후작을 상대하기 위해서 보낸 인물이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사실 같은 비장의 카드라고 해도 제이크와 엘리제는 차이가 크다.

제이크의 경우 언젠가는 세상에 드러내고 대외적인 위력 과시를 위해서 활동해야 할 인물이다.

하지만 엘리제.

그녀는 존재 자체가 지크프리트의 급소 중에 하나다.

마법사들이 금기로 취급하는 사악한 마법을 사용하고, 인체 실험도 꺼리지 않았다.

지크프리트가 그런 엘리제를 후원해서 만들어낸 것이 바로 고스트들이 사용하는 비약이었다.

그녀의 존재가 알려지면 국가의 사상을 넘어서 지크프리트의 존재 자체가 이단으로 찍힐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

그렇기에 제이크와 달리 엘리제는 영원히 그 존재 자체를 숨겨야 할 인물이었다.

그런 엘리제에게 일군을 맡겨서 전투에 내보낸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뜻한다.

하나는 제국의 전력을 지크프리트가 충분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것.

자신의 지략에 자신을 가지고 있는 지크프리트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국이 쉬운 상대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최선을 다해서 싸워야 할 상대로 보고 있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엘리제를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렇게 강대한 제국이라고 해도 엘리제를 보내기만 하면 얼마든지 억누를 수 있다고 확신을 가진 것이다.

그만큼 지크프리트는 엘리제의 능력을 믿고 있었다.

그 근거가 도대체 무엇일까?

사실 전략을 논하는 것에 있어서 엘리제의 능력은 초보자를 약간 벗어난 정도였다.

그나마 아주 문외한이 아닌 것도 정식으로 배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지크프리트가 옆에서 하는 것을 보며 어깨 너머로 배운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것만 놓고 보면 일군을 이끌고 제국의 마스터인 모론 후작이 이끄는 병력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심지어, 그녀에게 붙여준 병력의 80퍼센트는 징집병이다.

정예들만 고르고 골라서 붙여준 제이크 쪽과는 사정이 많이 다른 것이다.

하지만, 지크프리트가 그녀를 믿고 일군을 맡긴 것은 전략을 넘어선 그녀의 능력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적이 모르는 마법이라는 희귀한 능력과 사람을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조종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교활함.

정면으로 전략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면 지크프리트 본인도 결코 엘리제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지크프리트는 그녀에게 일군을 맡기면서 한마디만 했다.

[마음껏 하도록.]

[그래도 돼요?]

[안 그러면 하지 않을 것 아닌가?]

[후훗…. 확실히 이건 계약 범위 밖이죠. 좋아요. 그 대신….]

엘리제는 자신의 붉은 입술을 핥으며 요염하고 위험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나 정말 마음대로 할 거예요. 나중에 다른 말하기 없어요.]

[좋다.]

그런 대화를 마치고 그녀는 군을 이끌고 헤일리 모론 후작을 상대하기로 한 것이다.

작전 지시는 고사하고 전략의 목적도 설명하지 않았다.

지크프리트가 한 일은 딱 하나.

감당할 수 없는 교활한 짐승의 족쇄를 풀어준 것뿐이다.

그리고 그거면 충분했다.

모론 헤일리 후작이라는 거물을 잡아내기에는 말이다.

엘리제는 손을 뻗어서 모론 후작을 쓰다듬듯이 행동하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같이 놀자. 마음껏 예뻐해 줄 테니.”

그리고 그녀는 홀연하게 모습을 감췄다.

함정에 속아서 시간을 허비했다는 것을 깨달은 모론 후작은 군의 진격 속도를 높였다.

이 시점에서 버켈 후작은 제이크에게 격퇴를 당했지만 그 사실을 알 길이 없는 그녀는 자신도 진격을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버켈 후작이 좌우에서 압력을 넣어주지 않으면 삼면에서 포위하는 효과가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런 야만인한테 질 수는 없지.’

이런 그녀의 마음도 진격 속도를 재촉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부관, 지도를 가져와라.”

“예.”

모론 후작은 눈살을 찌푸리며 사전에 받아온 지도를 다시 확인했다.

발랑스 왕국에서 극비에 취급할 정도로 지형지물이 상세하게 표기된 군사 지도를 펼친 그녀는 다시 한번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지도에 따르면 그녀의 눈앞에는 그렇게 넓지 않고 강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작은 물줄기가 흐르고 있어야 했다.

지도의 정보에 의하면 분명 그랬다.

수량도 그렇게 많지 않아서 장마 전의 여름에는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작은 강이라고 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것은….

“이게 작은 강이라고? 발랑스 왕국 놈들은 크기 개념도 없나?”

지금 모론 후작의 눈앞에 있는 것은 폭이 50미터는 훌쩍 넘을 것 같은 거대한 강이었다.

폭도 넓었지만 유속도 꽤 빨라서 사람이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섣불리 도하를 시도하다가는 병사들을 대량으로 잃을 수도 있었다.

‘이래서는 군의 진행 방향을 바꿔야 하지 않는가?’

모론 후작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발랑스 왕국의 길잡이를 불러와라.”

“예.”

은은한 노기를 서린 모론 후작의 말에 당장 발랑스 왕국에서 붙여준 길잡이가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후작님.”

많이 긴장했는지 덜덜 떨면서 말하는 길잡이에게 모론 후작이 싸늘하게 말했다.

“왜 불렀는지는 알겠지?”

“예. …예. 그….”

“변명을 해 봐라. 설마 길을 잘못 들었다는 어설픈 변명은 아니기를 바라지.”

모론 후작의 말에 길잡이는 몸을 덜덜 떨었다.

모론 후작이 마음만 먹으면 자기 목이 떨어지는 건 아주 쉽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길은 절대 잘못 든 것이 아닙니다. 제 목숨을 걸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절박함이 느껴지는 길잡이의 말에 모론 후작이 다시 물었다.

“그럼 뭐지? 지도의 정보가 틀렸나?”

“그것도 아닙니다. 저는 이 지방 출신입니다. 하지만 맹세코 제 평생에 걸쳐서 이렇게 물이 많이 찬 것은 처음 봅니다.”

“처음 본다고?”

“예. 그렇습니다. 저도 영문을 모를 일입니다.”

길잡이의 말에 모론 후작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짜증나는군.”

모론 후작의 작은 한마디에 은빛 늑대 기사단원 한 명이 즉각 반응했다.

그녀는 허리의 검에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바른 대로 말하지 못하겠느냐?!”

“정…. 정말입니다. 제 목숨을 걸고….”

“네 목숨 따위를 비하면 파리만도 못한 것이다.”

그리고 은빛 기사단의 단원은 검을 뽑으며 말했다.

“전시의 임무 실패는 군법으로 다스려야 할 것이다.”

그러자 길잡이 남자는 기겁을 하며 머리를 바닥에 박고 애원했다.

“살…. 살려 주십시오. 저는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결코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닙니다. 이건…. 저도 잘…. 정말입니다. 제발 믿어 주십시오. 후작님.”

다 큰 성인 남자가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면서 애원하는 모습은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절실한 모습을 보아하니 정말로 억울해 보이기도 했다.

모론 후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됐다.”

그 말에 기사는 검을 거두었고 길잡이는 죽다가 살아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모론 후작은 길잡이 남자를 향해서 말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강은 도저히 건널 수 있는 강이 아니다. 우회할 수 있는 길 중에 가장 가까이 있는 길이 어디인가?”

그 말에 길잡이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리다가 말했다.

“북쪽으로 약간 돌아가면 조금 좁지만 상인들이 쓰는 길이 있습니다. 다만….”

“다만 뭐냐?”

“그 길은 숲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매복의 위험이 있습니다.”

길잡이의 말에 모론 후작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거기가 가장 가까운 길이냐?”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쪽으로 안내하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