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호오…. 정면으로 와 보겠다 이건가?”
제이크의 의도를 알아챈 버켈 후작은 잔인하게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 미소에는 적에 대한 놀라움과 자신이 얕보인 것 같은 느낌의 분노가 함께 있었다.
“해 보겠다 이거지? 건방진….”
“후작님,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 당연히 정면으로 받아준다. 전 기사단은 내 뒤에 모여라. 내가 가장 선두에 선다.”
버켈 후작은 좌우의 측면은 신경도 쓰지 않고 중앙에 모든 전력을 배치했다.
제이크의 진형이 정석적인 중앙 돌파라면 버켈 후작의 진형은 극단적인 중앙 일점 돌파였다.
보통 중앙 돌파를 할 때 좌우에 강한 병력을 배치하는 것은 돌파가 실패했을 때의 보험의 의미가 크다.
만약 적의 방어가 탄탄해서 생각한 중앙의 돌파가 어중간하게 막혀 버린다면 적이 좌우에서 날개를 펼치듯이 아군을 감싸서 포위망에 갇힐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제이크는 정석대로 좌우에 고스트 정예 부대를 배치했던 것이다.
하지만 버켈 후작은 모든 기사단을 중앙에 배치했다.
이것은 자신의 돌파가 실패할 것이라는 가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참하게 유린해 주마.”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짓는 버켈 후작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맹수 같았다.
이윽고 양군이 진형을 갖추었고, 서로 동시에 같은 명령이 내려졌다.
“전구우우운!!”
“돌격하라아아!!!”
명령이 떨어진 순간 지축이 울리며 양군의 정예들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버켈 후작이 이끄는 제국군 3만.
제이크가 이끄는 공화국군 역시 3만이다.
병력의 수적인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정면승부에서 승부를 가르는 것은 순수한 질의 차이였다.
가장 먼저 그 질의 차이가 드러난 것은 좌우의 측면이었다.
“죽어라!”
“뒈져 버렷!”
제이크의 지시를 받아서 좌우에 배치된 고스트 부대는 2조와 3조였다.
병력의 특성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고스트라는 부대는 상위 조일수록 그 수준이 높고 강하다.
즉, 2조와 3조는 고스트 부대 안에서도 두 번째와 세 번째로 강한 부대라는 말이다.
비약을 복용했을 때의 일이지만 2조와 3조의 조장의 실력은 익스퍼트 최상급과 마스터의 사이 정도에 있다.
그런 둘이 앞장서서 적의 측면을 치고 들어가자 제국군의 날개가 단번에 꺾여 버렸다.
“후작님. 좌우의 병력 손실이 심각합니다.”
“상관없다. 정면에 집중해!”
버켈 후작은 달리면서 상황을 보고 받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포위의 위험을 신경 쓰지 않고 병력을 이렇게 구성한 것은 자신이었다.
예상보다 측면이 무너지는 것이 좀 빠른 듯하기는 했지만 결과 자체는 예상했던 대로다.
‘중요한 것은 중앙을 돌파하면 될 일.’
이것이면 충분했다.
좌익과 우익을 모두 포기하고 중앙에 힘을 집중시킨 버켈 후작은 자신의 애검인 바스타드 소드를 뽑아 들었다.
그의 검에는 선명하게 오러 블레이드가 맺혔고 버켈 후작은 선두에서 더 힘차게 튀어 나가며 외쳤다.
“내가 마티아스 버켈이다. 이 XX 새끼들아!!”
제국의 고위 귀족치고는 품위 없는 발언이었지만 상관없다.
오히려 이런 흉흉한 기세가 적에게는 더 위압적으로 느껴질 테니 말이다. 다만….
“시끄럽다.”
상대편의 선두에서 검은색 망토를 휘날리며 튀어나온 남자는 아무런 위압감도 느끼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그가 꺼낸 기형적으로 커다란 투핸디 소드에서는….
“헉?”
“설마?”
마찬가지로 선명한 오러 블레이드가 맺혔다.
경악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버켈 후작은 이를 갈았다.
“이런 빌어 처먹을….”
그는 그제야 자신의 계산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콰아아아앙!!
두 남자가 격돌한 순간 엄청난 굉음이 울렸다.
또한….
“히힝….”
“푸히힝….”
양쪽이 타고 있던 말이 그대로 다리가 부러져 버렸다.
두 명의 마스터가 진심으로 휘두른 일격에서 파생된 충격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훗!”
“흡!”
둘은 말이 쓰러져서 깔리기 전에 재빨리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말에 내리자마자 둘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다 조져!”
“쓸어 버려!”
부하들에게 진격 명령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서로를 향해서 돌격하는 것이었다.
콰아앙!
그리고 다시 한번 충돌한 둘의 일격.
동시에 대장보다 늦었지만 양군의 정예들도 동시에 격돌했다.
“죽어라!”
“없애 버리겠다!”
사방에서 피가 튀고 고성이 난무했다.
희생양으로 일선에 화살받이 징집병을 세운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양쪽의 정예군이 가장 먼저 충돌했다.
실로 보기 드물 정도로 일절의 계략이 배제된 정면 격돌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먼저 치고 나온 것은 버켈 후작이 직접 단련시킨 버켈 기사단이었다.
원래 용병 출신들 중에 눈에 띄는 재능을 뽑아서 단련시킨 버켈 기사단은 상당히 강력했다.
무엇보다, 기사들처럼 고지식하게 싸우지 않고 필요한 수단은 다 사용한다는 점에서 전쟁터에서의 실전을 잘 알고 있었다.
강한 상대가 앞에 있으면 슬쩍 빠지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고, 적의 사각지대에서 교묘하게 일격을 날리는 것도 익숙했다.
거기다 이들을 상대하고 있는 고스트 부대원들은 4조와 5조다.
실력 면에서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좌익과 우익을 차지하고 있는 1조, 2조에 비하면 손색이 다소 있었다.
근소하기는 하지만 확실하게 실력의 차이가 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은 이들이 정상적인 상태로 싸울 때의 일이다.
적이 강하다는 것을 알자 4조의 조장이 즉각 명령을 내렸다.
“전력을 다해서 적을 물리쳐라! 한 걸음도 물러나지 마라!”
그 명령을 들었을 때 버켈 기사단의 기사들은 속으로 조소했다.
전력을 다한다?
그건 당연한 것 아닌가?
설마 지금 이 순간 힘을 숨기고 싸우고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그렇게 비웃음 섞인 의문을 품고 있는 버켈 기사단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조소는 이내 경악으로 바뀌었다.
“흡….”
“우웃….”
고스트 대원들은 품에서 작은 비약을 꺼내서 마셨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오러가 폭발하듯이 솟구치며 검에서 익스퍼트의 상징인 오러가 넘실거렸다.
“이럴…. 이건….”
“말도 안 돼….”
버켈 기사단으로서는 재난을 넘어서 재앙이었다.
충분히 밀어붙이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었는데 그 적들이 갑자기 강해진 것이다.
몇몇 눈치 빠른 이들은 고스트가 중간에 마신 비약이 수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생각을 이어갈 수는 없었다.
“쓸어 버려라!”
“옛!”
4조의 조장이 내린 명령과 동시에 고스트 대원들은 일시에 버켈 기사단을 밀어붙였다.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던 제일선은 순식간에 검은색의 파도가 일방적으로 적을 집어삼키는 광경으로 변해 버렸다.
“크윽…. 후퇴는 없다. 후작님이 승리할 때까지 버텨라!”
버켈 기사단의 부단장은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는 부하들에게 큰 목소리로 독려하며 상황을 뒤집으려고 애섰다.
사실 기사단의 전력이 아무리 밀린다고 해도 결국 버켈 후작이 이쪽에 합세하면 상황은 다시 뒤집힐 것이다.
다만, 그건 버켈 후작이 상대를 무조건 이긴다는 가정하의 일이었지만 말이다.
온몸이 땀에 비 맞은 것처럼 젖었다.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진정시키는 것조차 버거웠다.
몸의 여기저기에 결코 작지 않은 상처가 나 있었고 거기다 오러의 소모 역시 너무 컸다.
누가 봐도 패색이 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은 천하의 용병왕 마티아스 버켈 후작이었다.
그는 제이크를 노려보며 말했다.
“…빌어먹을, 넌 괴물이냐?”
독기가 가득 서린 시선을 받고 있는 제이크는 망토 자락이 약간 찢어지기는 했지만 비교적 멀쩡해 보였다.
대략 30합이 오갈 때까지 둘은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하지만 50합이 이르면서 서서히 양쪽의 실력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70합이 지나자 제이크가 일방적인 공격을 퍼붓고 버켈 후작은 거기에 간신히 버티기도 급급했다.
주변의 상황 따위는 챙길 여력도 없었고, 그저 자신이 살기만 해도 급급해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둘은 서로 간의 확연한 실력의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제이크는 거대한 투핸디 소드를 자연스럽게 늘어트리고 버켈 후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다.
‘고작 이건가?’
지금 제이크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실망감이었다.
마티아스 버켈 후작이라고 하면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아는 검호 중에 하나다.
용병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 실력 하나만으로 제국의 고위 귀족까지 올라간 그의 실력에 관해서 제이크는 기대가 많았다.
그런데…. 그 기대가 생각보다 충족되지 않았다.
오러의 양과 검술의 수준은 마스터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것이었지만….
그게 다였다.
모든 것을 초일류의 수준으로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더한 플러스알파를 갖추지 못한 것이다.
‘재능은 있지만 그게 다였군. 생각보다 시시해.’
제이크는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대치를 전혀 충족시키지 못하는 버켈 후작의 검에 실망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상대가 되어 검을 마주하고 있는 버켈 후작은 이런 제이크의 심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크…. 크크크…. 이 XX 새끼가!”
모독감과 분노로 점철된 버켈 후작이 맹수처럼 포효하며 제이크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빠르게 휘둘러지는 그의 검은 빛살이 되어서 제이크의 목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카아앙!
자신의 목에 검이 닿기도 전에 제이크의 팔이 먼저 움직였다.
버켈 후작의 바스타드 소드보다 최소 두 배.
아니 세 배는 더 커다란 투핸디 소드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제이크의 검속은 훨씬 더 빨랐다.
“어설퍼.”
거기다 속도뿐만이 아니었다.
제이크는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자신의 검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받아라.”
“크윽….”
제이크의 거검이 하늘에서 지면으로 떨어지며 선을 그었다.
투박할 정도로 거대한 검이 그렸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리하고 날카로운 그 궤적에 버켈 후작은 기겁을 하며 막았다.
하지만….
콰아아아앙!
“크으으으….”
양손으로 공격을 막은 버켈 후작은 전신의 뼈가 조각조각 나는 듯했다.
속도 면에서는 비등까지는 아니라도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파괴력 면에서는 그야말로 엄청난 차이가 났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맞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 부분에서 차이가 확 두드러졌다.
이제는 적의 공격을 막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말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무기빨? 아니야. 마스터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제이크가 쓰는 기형적으로 커다란 투핸디 소드는 원래 파괴력을 중요시한 무기다.
중량은 곧 파괴력으로 이어지는 법.
그래서 용병들도 자기 완력이 허용하는 한계 안에서 가장 무거운 무기를 애용하는 자들이 많다.
하지만, 그건 일반 용병이나 기사들의 논리고, 지금 이 둘은 마스터다.
마스터의 파괴력은 오러 블레이드에서 나온다.
극한까지 응축된 오러 블레이드는 고기를 써는 식기 나이프로 강철을 베어 버릴 수 있는 파괴력이 있었다.
그러니 무기의 중량 따위는 별 의미가 없다.
아니 그래야 정상이다.
그런데….
제이크는 그런 상식을 완전히 벗어난 파괴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중량 + 속도 + 오러 = ?
“다시 간다.”
답은 정상치 않은 파괴력이었다.
콰아아아앙!
“커어억….”
가로로 가볍게 휘둘러진 제이크의 검격에 버켈 후작은 공격을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낙엽처럼 날아가 버렸다.
“빌어…. 먹을….”
몸에 뼈가 몇 군데는 부러졌다.
내장이 상했는지 입에서는 쇠 맛이 섞인 피가 흘러 나왔다.
검에 맺혀 있던 오러 역시 다 떨어졌는지 이제는 맞서 싸울 힘도 없었다.
제이크는 그런 버켈 후작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승부가 났군. 전부 말이야.”
그 말에 버켈 후작은 주변 상황을 살폈다.
제이크가 말하는 전부는 자신들의 승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쟁터의 승패 역시 사실상 결정 나 버렸다.
초반에 양쪽의 측면에서 우위를 점했던 효과로 공화국군은 버켈 후작이 이끄는 정예 군단을 완벽하게 포위해서 잡아먹고 있었다.
거기다 중앙에서의 격돌 역시 공화국군이 우위를 점하면서 이제는 주변에 아군이라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제이크의 말대로 승부가 난 것이다.
결과는 완벽한 버켈 후작의 패배였다.
“큭…. 크크큭….”
버켈 후작은 허탈하다는 듯이 주저앉아서 실소를 했다.
“미치겠군. 어디 잔꾀에 당한 것도 아니고 정면 힘 대결에서 밀리다니….”
“…….”
“하나만 물어보지. 공화국군은 여기에 주력을 전부 배치한 것이냐? 내 반대편을 공략하고 있는 개년이나 중앙에서 대군을 움직이고 있는 꼰대를 무시하고 나를 최우선적으로 처리하려고 한 거냐?”
버켈 후작의 말에 제이크는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알 바 아니다.”
“큭…. 그래. 곧 죽을 놈이 알 바는 아니지.”
그리고 버켈 후작은 한숨을 내쉬며 홀가분한 얼굴로 말했다.
“자, 와서 내 목을 거둬가라. 이렇게까지 깨끗하게 당한 이상, 미련은 없다.”
버켈 후작의 말에 제이크는 양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시시하군.”
“뭐?”
“네놈은 정말 시시해. 정말로 네가 마티아스 버켈이 맞나? 어디 대역이 나온 게 아니고?”
기대에 미치지 못한 실망감에 짜증을 드러낸 제이크를 보고 버켈 후작은 이를 드러내고 말했다.
“실망해서 미안하군. 하지만 나보다는 낫지 않나? 너는 내 실력에 실망했을지 몰라도 나는 좌절했다고? 진짜 어디서 이런 괴물이 튀어 나왔는지….”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푸념하는 버켈 후작은 자신의 검을 바닥에 버렸다.
그리고 빈손이 된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제이크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편하게 해 다오.”
거기에 제이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역시 시시해.”
그리고 버켈 후작의 수급을 거두기 위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버켈 후작은 그런 제이크의 발소리를 들으며 눈을 지그시 감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제이크가 버켈 후작의 목을 날리기 위해서 검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지금!’
버켈 후작이 최후의 집념을 발휘해서 자신의 왼손을 휘둘렀다.
그의 왼손에는 아주 작은 나이프가 들려 있었고, 그 나이프에는 최후의 힘을 짜내서 만들어낸 오러 블레이드가 맺혀 있었다.
‘잡았다.’
버켈 후작은 회심의 일격이 성공했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는 평소 소매 안쪽에 감출 수 있는 아주 작은 나이프를 가지고 다녔다.
햇병아리 용병 시절에 자신의 스승이 알려준 기술이랄까?
정확하게 말하면 꼼수였다.
무장이 없는 것처럼 속이고 적을 방심하게 한 다음 소매에 숨겨둔 암기로 적을 암습한다.
그가 아직 햇병아리 시절에는 이 수법으로 강적들의 멱을 딴 적이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이런 꼼수가 필요 없는 강자가 되고서 쓸 일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그는 항상 소매 속에 이 작은 단검을 가지고 다녔다.
언젠가는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만일의 생각을 하며 말이다.
그리고 준비를 해 두기를 잘했다.
설마 이런 괴물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덕분에 살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이다.
애당초, 그는 용병이다.
작위를 받았지만 기사도 따위는 알 바 아니고 목숨보다 소중한 것 따위는 없었다.
명예?
그런 건 골빈 귀족 여인들의 치마를 들추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게 버켈 후작의 지론이었다.
철저한 준비와 포기하지 않는 집념이야말로 그의 진실된 모습이었다.
이 암습으로 제이크를 처리하고 그 후에 어찌어찌 빠져나가기만 한다면….
‘어?’
그때 버켈 후작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제이크의 목을 암기로 그어 버리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내가 하늘을 날고 있지. 아니 그보다 저건 뭐지?’
그의 눈에 언뜻 보인 것은 이미 검을 휘두른 제이크의 모습.
그리고 그 앞에 있는 목 없는 시체의 모습.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자신을 알 수 있었다.
‘저건 내 몸….’
그리고 그게 그가 생각하는 마지막 상념이었다.
동시에 버켈 후작의 목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러니까 말했지.”
제이크는 자신의 투핸디 소드를 갈무리하며 말을 이었다.
“시시하다고 말이야.”
그리고 제이크의 말보다 한 박자 늦게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아!!!”
“마티아스 버켈 후작의 목이 떨어졌다!!”
“공화국 만세!”
“제이크 대장님 만세!”
용병왕 마티아스 버켈 후작의 전사.
그리고, 공화국에 제이크라는 이름의 용사가 있음이 알려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