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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173화 (173/257)

제173화

“앤드루스 제국의 핵터 세바스티안 공작이 인사 올립니다.”

한 남자가 일행의 가장 앞에 서서 대표로 인사를 올렸다.

허리를 가볍게 숙이기는 했지만 무릎을 꿇지 않았고 예의는 차렸지만 상당히 형식적인 수준이었다.

아무리 파병군을 이끌고 왔다고 해도 일국의 군주에게 보이기에는 다소 무례할 수 있는 태도이다.

하지만….

“오오…. 세바스티안 공작. 오랜만이오. 내가 왕자 시절에 제국에서 그대를 보았던 적이 있는데 기억이 나시오?”

니콜라스 국왕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환하게 웃으면서 자신이 먼저 친분을 만들려는 듯이 말했다.

“예. 기억하옵니다.”

“오오오…. 그게 벌써 30년 전의 일이거늘. 이렇게 우리나라의 국난을 해결하기 위해 찾아와 주어 진심으로 감사하오.”

“제국으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서로 말을 높이고 있기는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보면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는 명백했다.

사실 니콜라스 국왕이 이렇게 예의를 차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핵터 세바스티안 공작.

겉으로 보기에는 중장년으로 보였지만 실제 연령은 80을 넘긴 고령의 노인이었다.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고 신체가 젊음을 유지하고 있기에 중년으로 보일 뿐이었다.

앤드루스 제국의 마스터 중에서도 최고령의 마스터이지만 그만큼 연륜이 깊고 인맥이 넓은 인물이었다.

현재의 황제 이전에 선대, 그리고 선선대의 황제 시절에도 활동한 적이 있을 정도로 제국의 상징 같은 남자였다.

거기다 지금 이 대전 안의 거물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니콜라스 국왕은 직접 옥좌에서 일어나 대전 안에 인물들에게 한 명 한 명 다가가서 말했다.

“모론 후작. 그대도 왔구려.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답소.”

“감사합니다.”

니콜라스 국왕이 가장 먼저 말을 건 사람은 유일한 여성이었다.

헤일리 모론 후작.

그녀 역시 나이는 40대였지만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며 신체가 절정기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20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눈부신 금발에 푸른 눈동자, 백옥 같은 피부와 조각 같은 이목구비까지….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며 신체가 완벽하게 바로 잡힌 그녀의 미모는 제국의 제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눈이 부셨다.

하지만, 그녀의 냉랭한 태도와 차가운 심성 때문에 제국에서 가장 차가운 얼음의 꽃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여인이었다.

니콜라스 국왕은 그녀의 차가운 말에 살짝 실망했지만 그래도 티를 내지 않고 다음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버켈 후작. 그대도 오셨구려. 하하하…. 여전히 보기만 해도 듬직하오.”

“훗, 감사합니다.”

니콜라스 국왕의 칭찬에 유일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이 남자의 이름은 마티아스 버켈 후작.

원래 용병 출신으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고 제국에서 작위를 받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미 용병의 신분이 아니지만 세상에서는 그를 용병왕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용병들이 되고 싶은 워너비인 것이다.

성격이 화통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대하는 데 격식이 없었지만 한 번 척을 지면 엄청나게 까다롭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의 어깨를 듬직하다는 듯이 두드린 니콜라스 국왕은 다음 남자에게 가서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크흠….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소.”

“그렇군요.”

“그때 내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섭섭하지만 카텔 공작이 제국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것을 보니 마음이 놓이는구려.”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말을 건넨 사람은 라이언 카텔 공작, 아니 이제는 후작이었다.

한때 스트라부스 왕국의 수호신이자 공작이었던 그는 스트라부스 왕국의 붕괴 이후 몸을 피했다.

그리고 맨 처음으로는 발랑스 왕국에 들어가서 공화국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니콜라스 국왕은 그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공화국과 먼저 전쟁을 할 용기는 없었기에 그가 제시한 조건을 들어주지 않았고, 그 대신 작위와 영지 그리고 막대한 부귀영화를 약속했다.

하지만 그건 라이언 카텔이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나라가 무너진 설움과 특히 맥카시의 배신에 대한 원한이 사무쳤던 라이언 카텔 공작은 그대로 발랑스 왕국을 떠나서 제국에 투신했다.

그리고 거기서 후작의 작위를 받고 자리를 잡았다.

한 가지 조건과 함께 말이다.

[만약 공화국과의 전쟁이 벌어진다면 내가 선봉에 설 것을 약속해 주십시오.]

이 조건을 대가로 그는 제국의 후작이 되었고, 약속대로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온 것이다.

니콜라스 국왕에게 있어서는 놓쳐서 아까운 인재였지만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굉장히 듬직한 인물이었다.

“기대가 크오. 카텔 공작.”

“이제는 후작입니다. 전하.”

“음…. 그렇군.”

약간의 무안함을 끝으로 모든 인사를 마친 니콜라스 국왕은 핵터 세바스티안 공작에게 말했다.

“세바스티안 공작. 그대에게 전권을 위임하겠소. 부디 간악한 공화국을 물리치고 우리나라에 평화를 가져다주시오.”

아무리 상대가 거물이라고 하지만 니콜라스 국왕은 주저 없이 전권을 넘긴다는 말을 해버렸다.

그 역시 젊은 시절 앤드루스 제국에서 유학을 했기 때문에 역시 친제국주의 성향인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맡겨 주십시오.”

물론 세바스티안 공작은 당연하다는 듯이 전권을 받았다.

드디어 발랑스 왕국을 무대로 제국과 공화국간의 전쟁이 시작되려고 하는 것이다.

세바스티안 공작은 파병을 오면서 이미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왔다.

여기에 발랑스 왕국의 안에서 다시 한번 병사를 모집하니 순식간에 20만의 대군단을 만들 수 있었다.

최근에 정예 병력을 10만이나 잃어버린 발랑스 왕국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10만이라는 숫자를 뽑아내기 위해서 세바스티안 공작은 강제 징집을 실시했다.

수도와 그 인근의 영토에서 싸울 수 있는 성인 남성들은 닥치는 대로 징병한 것이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소년병부터 시작해서 기력이 쇠약해진 노인까지….

남자라는 남자는 거의 다 징병해 버렸다.

거기다 발랑스 왕국의 귀족들에게 군자금이 필요하니 협조를 하라 공문을 내리고 그들의 재산을 직접 징발했다.

한마디로 전쟁 이후에 발랑스 왕국이 어찌되든 상관하지 않고 쥐어짤 수 있을 만큼 최대한 쥐어짠 것이다.

니콜라스 국왕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세바스티안 공작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하지만 그는 착각하고 있었다.

세바스티안 공작은 발랑스 왕국을 지켜주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이미 제국은 발랑스 왕국을 버리기로 결정을 내렸다.

공화국의 독이 너무 퍼졌고 민중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반란을 일으키고 있고, 귀족들의 부패도 심했다.

제국의 입장에서 발랑스 왕국을 되살리기 위해 돈과 인력을 투입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았다.

길버트 황제는 세바스티안 공작에게 파병군의 총사령관을 맡기며 그 점을 확실하게 말했다.

지금 제국군은 발랑스 왕국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국에 위협이 되고 있는 공화국을 물리치기 위해서 온 것이다.

공화국이 이 이상 팽창하지 못하게 이쯤에서 한번 눌러줘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10만의 군대와 네 명의 마스터를 파견한 것이다.

거기에 아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발랑스 왕국을 최대한 쥐어짜고 있는 세바스티안 공작의 행위는 비정했지만, 냉정하게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옳은 행동이었다.

결과만 보면 지크프리트와 세바스티안 공작은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

둘 다 발랑스 왕국의 국민들을 자신들의 전쟁으로 몰아넣고 있으니 말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지크프리트의 경우 자신의 카리스마를 이용해서 자발적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고, 세바스티안 공작은 강제 징집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주민들의 협조성이 떨어졌다.

그로 인해서 약간의 뜻하지 않은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후우….”

세바스티안 공작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앞에 있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헤일리 모론 후작과 마티아스 버켈 후작.

이 두 명이 서로를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충돌할 것 같은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모론 후작. 다시 한번 말해 보겠나?”

세바스티안 공작의 한숨 섞인 말에 헤일리 모론 후작은 날카로운 안광으로 버켈 후작을 노려보며 말했다.

“저 쓰레기와 결투를 해야겠다고 말했습니다.”

모론 후작의 서슴없는 모독에 버켈 후작은 비웃음을 가득 머금고 말했다.

“좋지. 이번 기회에 어디 둘 중에 한 명 모가지 날아갈 때까지 해볼까?”

“죽여주마.”

모론 후작은 자신의 검에 손을 가져가며 스산하게 말했다.

둘이 당장이라도 칼부림을 하려고 하자 세바스티안 공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장 그만두지 못하겠나!?”

그가 노성을 터트리자 둘은 일단 서로 도발하던 행위를 멈췄지만 여전히 상대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둘을 보고 세바스티안 공작은 속으로 혀를 차며 생각했다.

‘쯧, 차라리 둘 중에 한 명만 데리고 올 것을 그랬나?’

헤일리 모론 후작과 마티아스 버켈 후작.

이 둘의 사이가 썩 좋지 않다는 것은 제국 안에서도 넓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이 둘은 성향 자체가 하늘과 땅만큼 다르기 때문이다.

먼저 헤일리 모론 후작은 여자의 몸으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고 후작위를 직접 이어 받을 정도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제국의, 아니 이 대륙의 모든 여기사들의 우상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여성의 몸으로 그런 자리까지 오르는 과정에는 무수한 차별이 있었다.

가문의 반대와 세간의 인식, 여기사를 예쁘장한 장식품 정도로 취급하는 남자들의 선입견 등등.

그런 차별 속에서 자신의 힘으로 마스터라는 찬란한 경지에 오른 그녀는 약간의 남성 혐오증이 있었다.

나이가 40이 넘었지만 결혼은 고사하고 사귀는 남자 한 명 들이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여자는 남자만큼 할 수 없다는 선입견을 싫어했고 제국 안에 여기사들을 모아서 직접 가르침을 내리며 여성들로만 이뤄진 기사단을 만들었다.

그게 그녀가 직접 이끄는 은빛 늑대 기사단이다.

제국의 여기사들이라면 누구나 입단하고 싶어 하는 기사단으로 경쟁률이 몹시 치열하다.

기사단 내의 여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그녀의 행동은 가끔 도가 지나쳐서 남자들을 향한 차별과 적대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남자들 사이에서 그녀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뒤에서 뭐라고 수군거리기는 해도 감히 그녀의 앞에서 뭐라고 하지는 못한다.

마스터의 앞에서 간도 크게 나불거릴 인간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마티아스 버켈 후작.

그는 용병 출신으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고 제국에서 작위를 받은 인물이다.

어떤 의미로는 헤일리 모론 후작보다 더 어려운 환경 속에서 본인의 실력만으로 성공을 거둔 케이스인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용병 출신이다 보니 귀족가의 예의에 어두웠고 때때로 언행에 실수가 드러나기도 했다.

하지만 모론 후작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마스터이며 제국의 후작이다.

감히 앞에서 대놓고 예의가 없다고 지적할 간 큰 인간은 ‘거의’ 없다.

그렇다.

둘 다 귀족 사회의 보편적인 상식과 벗어난 사고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걸 지적할 인간은 거의 없는 위치에 있는 인간들인 것이다.

같은 마스터인 서로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 둘은 첫 만남부터 크게 어긋났다.

버켈 후작이 제국에 귀화하고 그의 작위식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을 때 버켈 후작은 모론 후작을 처음 봤다.

그리고 술이 살짝 들어갔기 때문일까?

그녀의 늘씬한 몸매와 조각 같은 얼굴을 봤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행동했다고 한다.

[휘유~. 죽이는데?]

참가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약 10초 정도 쥐 죽은 것 같은 정적이 감돌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멈추고 악사들은 연주를 그만두고 춤을 추며 달콤한 밀어를 속삭이던 남녀들 역시 얼어붙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의 이목이 무표정하고 굳어 있는 헤일리 모론 후작에게 쏠렸다.

짙은 정적 후에 모론 후작은 자신의 손에 있는 와인잔을 차분하게 내려놓고 이렇게 말했다.

[소원대로 죽여주지.]

그리고 그날의 연회는 거기서 끝이었다.

두 명의 마스터가 격돌하는 것과 동시에 비명이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말릴 엄두도 못 내고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그 자리에 같은 마스터인 베이커 고담 후작이 중간에 말리지 않았다면 이 둘은 정말로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웠을 것이라고 했다.

그 후로 이 둘은 제국의 안에서 유명한 앙숙 관계가 되어 버린 것이다.

사실 이 둘을 같은 원정군에 파병한 것 자체가 무리였다.

다만, 서로 경쟁적으로 공을 세우는 두 사람이 먼저 참전을 희망했고, 둘은 서로 물러나지 않았다.

결국 이 둘을 모두 보내고 중간에서 이 둘을 조율할 수 있는 존재로 선택된 것이 핵터 세바스티안 공작이었다.

제국의 마스터 중에서도 가장 깊은 연륜을 자랑하는 그의 말은 이 둘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 당초 공화국과의 전쟁에서 선봉을 약속했던 라이언 카텔 공작까지 더해지자 이 파병군에는 네 명의 마스터가 포함된 것이다.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마스터의 숫자는 여덟.

그중에 절반이나 이 전쟁에 투입된 것에는 그런 속사정이 있었다.

그리고 세바스티안 공작은 사사건건 부딪히는 이 둘을 중재하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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