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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172화 (172/257)

제172화

당당하게 외치며 나타난 베르크 후작은 지크프리트를 검 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 적장은 이름을 밝혀라!”

“공화국군 총사령관. 지크프리트다.”

크게 고양된 베르크 후작과 달리 지크프리트는 지극히 담담하고 평온했다.

온몸이 적병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크프리트의 감정에는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지크프리트가 이름을 밝히자 베르크 후작이 이를 갈며 말했다.

“비열하게 개전 신호도 없이 기습을 가하다니?”

“개전 신호?”

“의뭉 떨지 마라! 공화국의 장수는 모두 비열한 미개인이더냐?”

“…….”

지크프리트는 어이가 없었다.

‘개전 신호라고? 설마 처음에 진형을 바꾸던 게 그걸 믿고 그랬던 건가?’

논리적으로 까자면 하나부터 열까지 까줄 수 있었다.

전쟁터에서 상대방에게 예의를 바라며 아군의 위험을 자초한다?

지크프리트는 자기 휘하에 그렇게 정신 나간 놈이 있다면 당장 목을 날려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굳이 설득하지도 않았다.

변명을 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닥치고 덤벼라. 당장 죽여주지.”

지크프리트에게 베르크 후작은 어차피 이제 곧 죽을 인간이니 말이다.

“이 건방진 야만인이!”

베르크 후작은 모독감에 얼굴을 붉히며 뛰쳐나갔다.

가까이서 보니 기세가 당당한 것이 제법 강해보이긴 했다.

하지만 베르크 후작은 자신의 실력에 자신을 가지고 덤벼들었다.

“죽어라. 지크프리트!”

“시끄럽군.”

그리고 마주 달려가는 지크프리트의 검에 처음으로 오러가 일렁거렸다.

그 일렁거림은 검을 휘감다가 어느새 뚜렷한 형태를 갖췄다.

“헉!?”

지크프리트의 검에 마스터의 상징인 오러 블레이드가 나타난 순간 베르크 후작은 경악했다.

“오…. 오러 블레이드? 마스터라고?”

그제야 자신의 오산을 깨달은 벨르크 후작이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지크프리트의 매서운 검격이 날아들었고 베르크 후작은 급하게 검을 들어서 그 공격을 막았다.

콰아아앙!!

“크아악….”

단 한 번의 돌격이었지만 베르크 후작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밀려났다.

단 1합을 교환했을 뿐인데 팔이 저릿저릿하고 뱃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크프리트의 검에 서려 있는 선명한 오러 블레이드를 보고 주변의 다른 병사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제까지 자기 측근을 제외하면 철저하게 자기 경지를 숨겼던 지크프리트였기에 아군에게도 이것은 큰 파문을 일으켰다.

“마…. 마스터?”

“설마 총사령관님이 마스터의 경지였다고?”

“하…. 하하하….”

자기편이긴 하지만 과연 어디까지 괴물인 걸까?

대륙을 들었다 놨다 하는 신묘한 책략뿐만 아니라 개인의 경지마저 지고한 수준에 이르렀다니?

공화국의 병사들은 새로운 마스터의 등장에 얼떨떨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들은 더욱더 고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지크프리트 총사령관님 만세!”

“총사령관님의 뒤를 따르자! 왕국 놈들을 다 쓸어버리자!”

“우오오오오오!!”

아군이 한껏 고양되는 것을 보며 지크프리트는 피식 웃었다.

‘효과가 좋군.’

그동안 정보를 숨겨왔던 만큼 극적인 순간에 공개한 것이 큰 효과를 발휘한 것 같았다.

병사들이 더 가열차게 발랑스 왕국군을 몰아붙이는 것을 보고 지크프리트는 다시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고 말했다.

“다시 간다.”

“잠…. 잠깐 기다…. 크윽.”

지크프리트는 상대방이 태세를 바로 잡기 전에 저돌적으로 공격을 날렸다.

콰앙! 카아앙!

한 번의 공격이 있을 때마다 베르크 후작은 크게 휘청거렸다.

그건 마치 연이은 파도에 점점 무너져 내려가는 모래성 같았다.

완전히 무너져 버리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일 뿐이었다.

“후작님…. 크윽!”

“이 빌어먹을 놈…. 커억….”

베르크 후작이 직접 양성한 기사단은 그런 후작을 도우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지크프리트가 실력을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그의 뒤를 받쳐주던 고스트들 역시 실력을 발휘했다.

고스트 안에서도 비약을 마시지 않고도 오러를 발휘할 수 있는 강자들이 앞으로 나서서 적의 기사단을 맡았다.

양쪽의 전력은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도 그리고 실전 경험을 따져도 고스트 대원들이 압도적이었다.

특히 압권인 것은 제이크였다.

실력을 숨기고 겉으로 보기에는 익스퍼트 중급 정도로 위장한 제이크였지만 그가 혼자서 상대 기사들을 다섯 명을 너끈하게 상대하고 있었다.

그는 그러면서 만에 하나라도 지크프리트가 위험하면 뛰어들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군.’

일방적으로 적을 몰아붙이는 모습을 보고 제이크는 안심했다.

자신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 보였다.

결국, 베르크 후작을 도울 여력이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고립무원 속에서 베르크 후작은 지크프리트를 상대로 분투했다.

“헉…. 헉…. 헉….”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무려 30합이 넘는 공방을 버텨낸 것이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희망? 투지? 분노?

아니다.

지금 베르크 후작이 버티고 있는 이유는 그저 생존 본능이었다.

눈앞에 있는 강적을 상대로 자기 목숨을 살리는 것에만 집중을 하다 보니 전쟁의 상황 같은 것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저 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움직였을 뿐.

하지만 처절한 생존 본능에 힘입은 분투도 결국 한계가 왔다.

숨은 턱까지 차올랐고 검에 맺혀 있는 오러도 아슬아슬해졌다.

그 와중에 지크프리트는 일말의 동정도 없이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이제 끝이다.”

“잠…. 잠깐….”

스팟!

전쟁터에서 멈추란다고 멈추는 바보가 있겠냐만서도 지크프리트에게 그런 걸 바라는 건 한층 더 무리다.

지크프리트는 베르크 후작의 목을 베고 그 목을 높게 들어 올리며 외쳤다.

“발랑스 왕국의 미하일 베르크 후작의 목을 쳤다!”

“와아아아아!!”

“지크프리트 총사령관님 만세!”

“공화국이여 영원하라!”

병사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고 그 순간을 기해서 발랑스 왕국의 병력은 더 이상 맞설 생각도 못하고 앞다퉈서 항복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대승이었다.

단 한 번의 전투.

하루도 걸리지 않은 전투.

그런 전투에서 발랑스 왕국군은 10만의 정예 병력을 잃었다.

적의 병력이 더 많았던 것도 아니고 뭔가 획기적인 작전에 속은 것도 아니다.

그저 순순한 정면 승부를 벌인 결과가 이렇게 나타난 것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길 정도로 커다란 패전을 겪은 발랑스 왕국은 큰 충격에 빠졌다.

지크프리트의 이름은 그들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10만의 병력이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밀려나 버리다니?

지크프리트, 그놈은 괴물이란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찌 이런 일이 생긴단 말인가?

발랑스 왕국의 고위층은 그저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부정하고 싶은 악몽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악몽이 희망이 되는 자들이 있었으니….

바로 발랑스 왕국 안에서 일어난 공화주의자들이었다.

“지크프리트 님이 오신다! 우리들 민중을 압제자의 발길질에서 구해주기 위해 오고 계신다!”

“압제자를 몰아내자! 우리에게는 위대한 공화국의 군신이 함께한다.”

“우오오오! 위대한 공화국의 군신이시여. 우리를 보살피소서!”

밀턴은 종종 공화주의자들을 광신도에 비유하고는 했었다.

그리고 지금 발랑스 왕국의 공화주의자들은 그 말이 딱 들어맞는 상태였다.

원인은 얼마 전에 국경 지대에 있었던 대회전 때문이었다.

10만의 대군을 적은 숫자로 하루 만에 압도적으로 물리쳐 버리다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성과였다.

전설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의 전과였다.

거기다 지크프리트가 마스터라는 정보까지 더해지자 소문은 살에 살이 붙어서 이제는 전설의 한 장면처럼 과장되어 버렸다.

지크프리트가 일검을 휘두르자 발랑스 왕국군의 병사가 1,000명씩 사라졌다는 말도 있었고, 베르크 후작이 그런 지크프리트의 기세에 겁을 먹고 비굴하게 엎드려서 싹싹 빌다가 죽었다는 말도 있었다.

지크프리트가 내부에서 조작을 할 것도 없었다.

간절하게 희망을 원하던 공화주의자들은 스스로 지크프리트에 대한 끝없는 환상을 가지고 그를 우상화시켰다.

지금 발랑스 왕국의 공화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지크프리트에 대한 경외감은 거의 신앙의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공화국의 군신(軍神).

이전에도 전쟁터에서 명전략가로 이름을 날린 지크프리트였다.

하지만 그 진가를 조금 더 드러내자 명전략가는 단번에 신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지크프리트가 노리던 바였다.

전략적인 효율을 무시하고 자신이 마스터라는 경지까지 드러내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발랑스 왕국의 안에서 힘든 싸움을 하고 있던 공화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이런 지크프리트의 행보는 희망의 등불이었다.

자신들을 보호해 주고, 압제자를 물리쳐 주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해 줄 것 같은 존재.

절대적 카리스마의 탄생.

지크프리트는 단 한 번의 전투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연하게 부각시켰다.

그리고 그 효과는 국경을 넘어가자 확연하게 드러났다.

국경을 넘어선 지크프리트에게 발랑스 왕국의 공화주의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어설픈 무장을 하고 지크프리트의 군에 가세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다.

심지어 무장을 하지 않고 참가한 어린애와 여자들도 있었지만 지크프리트는 이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신체가 강건한 남성들만을 받아들여 무장시켰다.

마치 이런 사태를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지크프리트는 여분의 무장을 잔뜩 가지고 왔었다.

국경을 넘은 시점에 5만이었던 지크프리트의 군세는 국경을 넘고 순식간에 10만으로 불어났다.

그리고 군에 직접 투입하지 못하는 여자와 아이들은 후방으로 후송하면서 따로 할 일을 주었다.

후방에서 군수 물자의 생산에 힘쓰는 것 역시 중요한 임무라고 설득하며 비전투 인원을 거기에 투입한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큰 도움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전쟁은 돈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건비를 아낄 수 있는 노동력의 확보는 상당한 예산 절감을 가져올 수 있었다.

단 한 번의 전투를 마치고 국경 안으로 들어온 지크프리트는 더 이상의 전투를 하지 않고도 발랑스 왕국의 영토를 일부 점령하고 그 군세를 두 배로 불렸다.

그런 지크프리트의 행보에 발랑스 왕국은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들이 믿었던 베르크 후작은 단 한 번의 전투에 전사했고 10만의 병력을 말아먹었다.

그 후에 다른 영주들은 겁을 먹고 지크프리트와 맞서지도 않고 도주했으며 영지에 남은 영지민들은 앞다퉈 지크프리트를 환영하며 열렬하게 투신했다.

이보다 더 최악일 수 있을까?

발랑스 왕국의 입장에서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발랑스 왕국에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앤드루스 제국에서 온 사신단이 도착했습니다.”

“오오오…. 드디어?”

발랑스 왕국의 국왕 니콜라스 테론 발랑스는 대전에서 반색을 했다.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의 희소식인가?

제국의 사신이 도착했다는 것만으로도 막혀 있던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당장 들라 하라.”

국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대전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세 명의 남성과 한 명의 여성이 대전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들어오자마자 대전은 크게 술렁거렸다.

“이럴 수가?”

“저분이 오셨단 말인가?”

“하…. 하하하…. 공화국의 머저리들은 이제 다 죽었군.”

발랑스 왕국의 고위 귀족들 대부분은 젊은 시절 제국에서 유학을 했던 이들이다.

그래서 제국의 소식에 밝으며 특히 고위층의 얼굴과 이름 정도는 훤하게 꿰고 있었다.

당연히 지금 대전 안으로 들어온 이들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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