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화
“적의 일선에 변화가 있군요.”
“방패병 대신에 장창병이 앞에 나왔습니다.”
전령의 보고를 받으며 지크프리트는 피식 웃었다.
“우리가 한눈에 알 수 있도록 그렇게 바꾸고 있다는 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병사들의 훈련이 부족한지 병력의 배치를 전환하는 움직임이 더딥니다.”
전령의 보고에 지크프리트는 적을 보며 말했다.
“전쟁을 책으로 배운 지휘관과, 훈련이 부족한 병사인가?”
아마도 이쪽에 기마가 선두에 섰다는 알자마자 바로 선두를 장창병으로 바꾼 것이리라.
전략 전술의 기본에는 기마병의 돌격을 막는 방법으로 장창병을 내세우라고 적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전술이라는 것은 상황에 맞게 사용하지 않으면 그 의미가 없다.
이미 지크프리트의 병력은 진형을 다 갖추고 있다.
그런데 적이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부리나케 병사들의 진형을 바꾼다?
그 타이밍에 적이 들어오면 전술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만약 그렇게 진형을 급하게 바꾸려면 병사들의 훈련 정도라도 높은 정예들이어야 했다.
정예병이라는 것은 병사 개개인의 강함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기사도 아니고 병사들의 무력은 대부분이 거기서 거기다.
진짜 정예병이라는 것은 무수한 훈련과 연습으로 지휘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명령에 빠르게 반응하는 병사들을 말하는 것이다.
지시가 내려온 순간 의문을 가지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어리바리 대는 병사들을 가지고 급하게 진형을 바꾸는 것부터가 멍청한 짓거리였다.
“멍청한 짓거리를 봐주는 것도 한계군. 제이크.”
“예. 주군.”
“전군 돌격하라! 작전대로 움직인다.”
“옛!”
그리고 지크프리트의 명령이 공화국군 전체에 울려 퍼졌다.
“전군 진군하라!”
뿌우우우!
진군 나팔소리와 함께 공화국군이 앞으로 움직였다.
“개전 신호도 없이 공격이라고? 이런 야만인 놈들!”
망루 위에서 공화국군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던 베르크 후작은 분통을 터트렸다.
지크프리트는 베르크 후작이 생각 없는 멍청이라고 여겼지만 베르크 후작 본인은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지시를 내린 것이다.
이건 단순한 전투가 아니다.
소규모 전투도 아니고 양국의 군세가 다 합쳐서 15만에 달하는 대규모 대회전이다.
그렇다면 거기에 어울리는 전쟁의 예의와 형식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우선은 서로 개전을 알리는 신호를 보내고, 그 후에 양국의 기사들이 앞으로 나와서 일기토를 한다.
그 일기토에 이어서 이제 정면으로 양군이 충돌하는 것이 베르크 후작이 알고 있는 올바른 전쟁법이다.
그렇기에 안심하고 진형에 손을 보고 있었던 것인데 그 틈을 타고 비겁하게(?) 공격해 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상종 못 할 야만인들 같으니라고….”
베르크 후작은 이를 갈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는 몰랐겠지만 그가 알고 있는 전쟁의 예의(?)라는 것은 과거 왕국과 왕국 간의 전쟁에서 펼쳐진 것이었다.
전쟁 중에서도 귀족들이 최소한의 명예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만들어낸 일종의 예의였던 것이다.
당연히 공화국에서는 그딴 예의 존재하지도 않았다.
레스터 왕국이나 과거 스트라부스 왕국같이 공화국군을 상대해본 적이 많은 나라들은 이런 공화국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베르크 후작은 그런 걸 몰랐고 그가 알고 있는 전쟁은 절대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지크프리트의 평가대로다.
그는 정말로 전쟁을 책으로 배운 사람이었다.
“서둘러 전열을 가다듬어라! 기마대가 들이닥치기 전에 장창병에게 밀집 대형을 갖추게 하란 말이다!”
그는 전령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병사들의 움직임을 빠르게 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지휘관이 소리 지른다고 훈련 부족의 병사들이 갑자기 빠릿빠릿하게 움직일 리가 있는가?
오히려 혼란만 더 가중될 뿐이다.
“제길, 들어온다!”
“안되겠다! 빨리 창을 세워. 지면에 박아서 사선으로 세우란 말이다!”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 움직여라!”
결국 지형이 완전히 바뀌기도 전에 지휘관들은 장창병을 고정시켰다.
창의 자루 부분을 지면에 세우고 비스듬하게 사선으로 세우서 기마병을 견제하는 것이다.
비록 진형을 갖추지 못해서 빽빽한 장창의 숲이 되지 못하고 듬성듬성했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선 지휘관들의 판단은 옳았지만….
“쏴라!”
뛰는 놈 위에는 나는 놈이 있는 법이다.
지크프리트는 기마병이 돌입하기도 전에 뒤에 대기 중인 궁병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화살이 하늘 높게 날아올랐고 그 화살이 적의 제1진에 쏟아져 내렸다.
“크아악!”
“크악! 눈…. 내 눈….”
“아아악!”
방패를 소지하지 않고 있는 장창병은 기마병에는 강해도 궁병의 표적이 되었을 때는 쥐약이다.
거기다 지금 쏟아져 내린 화살비는 평범한 화살이 아니었다.
“후작님. 제1진이 화살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뭐라고? 궁병은 한참 뒤에 대기 중인데 어찌 여기까지…. 앗!?”
말을 하던 베르크 후작은 그제야 깨달았다.
상대는 공화국이다.
그리고 분명 소문에 들은 적이 있었다.
코브르크 공화국에는 보통의 활보다 훨씬 더 사거리가 긴 특수 석궁을 사용한다는 소문을 말이다.
소문을 들었지만 그런 적을 직접 상대해 본 적이 없으니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면 애당초 제1진에 장창병을 투입한 것은 역효과가 아닌가?
“큭…. 2진과 3진을 앞으로 전진 시켜라! 제1진이 무너진 틈을 메워라!”
베르크 후작은 1진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지시를 내렸다.
사실 무너지는 건 가정이 아니라 기정사실이다.
화살의 표적이 되어서 엉망이 된 적의 1진에 공화국의 기마대가 격돌했다.
그리고 그 최고 선두에는….
“내 뒤를 따라라! 처지는 자들은 군법으로 다스리겠다!”
그 선두에는 지크프리트가 있었다.
그는 평소와 달리 선두에서 용맹하게 검을 휘두르며 적의 전열을 파괴했고, 그 뒤로는 고스트가 뒤를 따르고 있었다.
“크아악!”
“으…. 으아아!”
“사람 살…. 커억….”
그들은 거침없이 검을 휘두르며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적들을 처참하게 유린했다.
지크프리트는 물론이고 고스트 대원들 역시 아직 오러를 두르지도 않고 순수한 육박전만으로 싸우고 있었다.
적의 진형이 여러 겹으로 중첩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초반에는 힘을 쓰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실 힘을 거의 쓰지 않아도 이런 있으나 마나 한 진형 따위는 얼마든지 돌파할 수 있었다.
지크프리트는 선두에 서서 적을 유린하면서도 날카로운 안광으로 전쟁의 전체적인 상황을 살폈다.
‘뒤에 보병은 잘 따라오고 있군. 마지막 불안 요소만 없애면 이대로 힘으로 뭉개버릴 수 있다.’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뒤에 따라오는 고스트 대원에게 말했다.
“군기를 올려라.”
“옛!”
그리고 지크프리트의 명령에 따라서 사령기가 높게 올라갔다.
지크프리트는 그 깃발 아래에서 아군을 향해서 크게 외쳤다.
“이대로 적을 물리친다! 전쟁을 모르는 애송이들에게 제군들의 힘을 보여주어라!”
“우오오오오오!!”
“공화국 만세!!
“지크프리트 총사령관 만세!!”
지크프리트는 사령관이 선두에 서서 용맹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아군의 사기를 크게 올렸다.
위험 부담이 크기는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사기를 진작시키기에는 이만한 것이 드물었다.
크게 고양된 공화국군은 그대로 적을 몰아쳤고, 발랑스 왕국군은 그런 공화국의 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무너졌다.
“제3진 돌파! 4진도 위험합니다.”
“우익이 무너졌습니다. 제5진의 예비 병력 투입합니다.”
“후작님. 후방에 대기 중인 예비 병력이 이제 1만도 남지 않았습니다.”
전령들의 위급한 보고를 받으며 베르크 후작은 이 모든 게 악몽 같았다.
굳이 전령의 보고가 없다고 해도 눈앞에 발랑스 왕국군이 무너지는 모습이 너무나 뚜렷하게 보였다.
“어찌…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저 놈들이 인간이긴 하단 말이냐?”
베르크 후작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야비한 수단에 당해서 기선을 제압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1진이 무력하게 당했지만 이내 2진과 3진을 투입해서 전열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선두에서 고스트를 이끌고 적을 꿰뚫는 지크프리트의 진격은 멈추지를 않았다.
그들의 진격에는 그야말로 거침이 없었고 그 앞을 가로막는 아군은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
맞서서 싸우다 죽는 이들보다 겁먹고 도망가다가 짓밟혀 죽는 이들이 더 많을 정도였다.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까지 압도적일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베르크 후작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 일이겠지만 지크프리트로서는 당연히 생각하던 대로였다.
10만의 대군이라고 해도 발랑스 왕국의 군대의 대부분은 평민을 징집한 병력이었다.
거기다 정규 병력들 역시 대부분이 전쟁을 경험해 본 적 없는 신병들이고 말이다.
거기에 비해서 공화국군의 병사들은 정예 중에 정예였다.
평소 엄중한 군사 훈련을 받아서 단련된 것은 물론이고 이들 대부분이 전쟁을 경험해본 병사들이었다.
공화국에서는 기본적으로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병사는 복무 경력이 몇 년이 되건 간에 신병으로 취급 받을 정도였다.
거기다 이들은 자신감 역시 절정에 달했다.
최근의 전쟁에서 스트라부스 왕국이라는 숙적을 무너트려 봤기 때문이다.
군사 강국이었던 스트라부스 왕국에 비하면 발랑스 왕국의 급조한 병력 따위는 오합지졸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선두에서 활약하는 총사령관이 사기까지 북돋아주니 양군의 차이는 더욱더 벌어졌다.
이제 발랑스 왕국으로서는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전 기사단은 나를 따르라! 적의 수뇌부를 잡는다.”
베르크 후작은 망루에서 내려가며 크게 소리쳤다.
이미 전술적으로는 어떤 지시를 내려도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없다.
병력의 질에서 어른과 아이 수준의 차이가 난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하지만,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적의 총사령관이 지금 최전선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총사령관을 직접 잡아내면 전황을 한 번에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
베르크 후작은 자신이 있었다.
그는 발랑스 왕국 안에서 손에 꼽히는 검호로 익스퍼트 최상급의 경지에 이른 기사다.
그리고 그가 직접 단련시킨 직속 기사단의 수준도 높았다.
전술에서 완전히 밀려 버린 지금 이제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실력뿐이었다.
다행이도 표적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필요는 없었다.
멀리서도 잘 보이도록 군기를 높게 들어 올리고 가장 선두에서 싸우고 있으니 말이다.
“기사단은 나를 따르라! 적의 머리를 친다!”
“옛!”
그리고 베르크 후작은 최후의 희망을 품고 말을 달렸다.
“주군, 적이 오고 있습니다.”
지크프리트의 곁에서 존재감을 죽이고 행동하던 제이크가 말했다.
“기사단인가?”
“예. 적의 총사령관이 직접 이끌고 있는 듯합니다.”
“미끼를 제대로 물었군.”
지크프리트는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그가 직접 선두에서 활약하며 군기를 높게 들어 올리게 한 것은 두 가지 목적을 노린 행동이다.
하나는 당연히 아군의 사기를 끌어 올리는 것이다.
이건 지극히 상식적인 행위다.
하지만 두 번째 행위는 다소 비상식적인 이유였다.
자신을 미끼로 해서 적의 주력 기사단을 유인하기 위해서였다.
병사들의 전투를 압도하고 있는 지금 유일한 변수가 있다면 그건 기사단 전력이었다.
가뜩이나 지크프리트는 밀턴과의 싸움에서 제롬이라는 기사가 번번이 튀는 활약을 해서 전열이 무너진 적이 있었다.
그때의 경험을 살려서 자신을 미끼로 사용한 것이다.
기사단이 혹시나 실력의 차이를 느끼고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일부러 오러도 쓰지 않고 싸우고 있었다.
그런 보람이 있어서 상대는 미끼를 덥석 물었다.
그것도 꽤나 월척이다.
그냥 주력 기사단만 오는 게 아니라 적의 총사령관도 함께 오고 있으니 말이다.
“실력이 자신이 있나 보군.”
지크프리트의 말에 제이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모르니 제가 상대하는 게 어떨까 합니다.”
염려가 섞인 제이크의 조심스런 말투에 지크프리트는 담담하게 말했다.
“버거우면 맡기지.”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있는 지크프리트였지만 무인으로서의 호승심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거야. 그리고 가능하면 내가 이겨야 효과가 극대화될 테고 말이야.”
“효과라니요?”
“나중에 설명해 주지.”
지크프리트는 제이크의 질문에 문답을 미뤘다.
왜냐하면 이제 적이 바로 지척까지 도달했기 때문이다.
“내가 발랑스 왕국의 미하일 베르크 후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