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0화
발랑스 왕국.
대륙의 중앙에 제법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한때는 대륙의 패권을 다툰 적도 있다고 하는 전통의 왕국이다.
물론 그런 영광의 시절은 이미 몇백 년 전에 끝났다.
현재의 발랑스 왕국은 두 가지 문제로 인해서 파탄이 나기 직전이다.
첫 번째 이유는 공화주의의 전파였다.
레스터 왕국과 달리 데이비드가 발랑스 왕국에 퍼트린 독은 제대로 먹혔다.
그 결과 수많은 민중들이 공화주의를 주장하며 신분 제도를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들고 일어났다.
그 덕분에 지금 발랑스 왕국은 지독한 내란을 겪고 있었다.
민란을 일으킨 평민들은 강력한 전력은 없었지만 끈질겼다.
무엇보다 그런 평민들의 토벌은 생산량의 저하로 이어졌기 때문에 발랑스 왕국의 지도층으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여기서 두 번째 문제는 발랑스 왕국의 지도층의 친제국주의였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발랑스 왕국은 한때 이 대륙의 패권을 다투던 강대국이던 시절이 있었다.
대륙의 정중앙에 해당하는 지역에 나라가 있다는 것 자체가 과거의 영광의 편린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이고 지금의 발랑스 왕국은 제국에게 철저하게 머리를 숙인 제후국일 뿐이었다.
과거 스트라부스 왕국이 군사 강국으로 이름을 날리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발랑스 왕국은 철저하게 제국에 기대서 나라를 운영했다.
제국과의 무역으로 돈을 벌고, 제국에게 조공을 바치고 정치적으로 협력을 얻었으며, 귀족들 스스로가 제국을 자신들보다 더 높고 고귀한 존재로 인식했다.
발랑스 왕국의 귀족들 사이에서 최고의 교육을 시키려면 제국으로 유학을 보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고, 실제 발랑스 왕국의 정치를 주름잡는 대부분의 인사들은 제국에 유학을 갔다 와서 귀국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친제국주의 성향이 강했고, 제국에 최대한 협력하는 것이야말로 자신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무리한 조공을 받치기 위해서 백성을 쥐어짰고, 그렇게 쥐어짠 세금의 대부분은 앤드루스 제국에 조공으로 들어갔다.
몇몇 생각 있는 이들이 그런 친제국주의자들의 행동을 비난했지만 소용없었다.
고위층은 이미 친제국주의 성향으로 가득 찼고, 그들은 발랑스 왕국이 제국의 눈 밖에 나지 않아야 나라가 오래 갈 수 있다는 명분으로 그런 짓을 오랫동안 해 왔다.
그런 나라이다 보니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고 공화주의라는 사상이 더 빠르고 과격하게 전염된 것이다.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이런 발랑스 왕국의 문제점을 정면으로 자극했다.
-발랑스 왕국은 오랫동안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였다. 심지어 그렇게 만들어낸 재화를 제국에 바치고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서 사용했다.
억압받고 탄압 당했던 민중들이여 단호하게 일어나라.
압제자의 칼날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들의 후손에게까지 굴욕과 치욕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면 지금이야말로 피를 흘려야 할 때이다.
그대들은 홀로 싸우지 않는다.
옆을 보아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형제가 있을 것이다.
뒤를 돌아보아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그대들을 도울 것이다.
지크프리트는 이 격문을 발랑스 왕국 안에 널리 퍼트렸다.
발랑스 왕국이 이제까지 저지른 폐단을 실제로 지적하며 민중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교묘한 격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들이 원군으로 가세할 것이라는 말은 민중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었다.
“지크프리트 총사령관이 온다!”
“위대한 공화주의의 영웅이 온다!”
“공화주의 만세!”
지크프리트는 이미 그 이름만으로도 전쟁터에서 영향력을 끼칠 정도의 거물이 되었다.
그가 직접 군세를 이끌고 발랑스 왕국의 국경을 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민중들은 한층 더 열광했다.
당연히 발랑스 왕국의 고위층은 이걸 좌시하지 않았다.
“반드시 여기서 공화국을 물리쳐야 한다. 전원 각오를 다져라!”
발랑스 왕국의 국경에서 지크프리트와 일전을 준비하고 있는 남자는 큰 목소리로 부하들을 독려했다.
그의 이름은 미하일 베르크 후작.
위아래가 모두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발랑스 왕국 안에서 그나마 가장 유능한 장군이라고 평가 받는 인물이다.
정쟁을 멀리하고 자신의 영지에서 기사단의 조련에만 심혈을 기울인 이 남자는 뼛속까지 기사 가문인 귀족이었다.
그는 자신의 기사단과 사병, 그리고 왕국에서 지원받은 병력까지 포함해서 총 1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지크프리트와 맞섰다.
다만, 수성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국경 지대의 주요 요새들 대부분이 내부적으로 민란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수성을 선택했다가 내부에서 공화주의에 감화된 민중이 동조하기라도 한다면 안팎으로 적을 상대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군을 거느리고 국경 지대에 진을 치고 적을 가로막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모두들 마음을 굳게 먹어라. 전쟁이란 사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옛. 주군!”
그는 측근 기사들을 독려하는 한편 속으로 생각했다.
‘버티기만 하면 된다. 이길 생각은 버리고 제국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기만 하자.’
그는 스스로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무가의 귀족답게 전략 전술의 공부를 많이 하기는 했지만 그는 실전 경험이 거의 전무했다.
갑자기 10만이나 되는 대군을 거느릴 능력이 있다고는 본인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거기다 상대는 그 군사 강국인 스트라부스 왕국을 무너트린 지크프리트다.
공화국의 인물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기로 유명한 그를 상대로 공연한 공명심을 내세울 정도로 그는 오만하지 않았다.
‘다행이도 아군의 병력은 적의 두 배에 달한다. 무리하지 않고 철저하게 정공법으로 맞선다면 이기지는 못해도 쉽게 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베르크 후작의 계획이었고, 현실적인 최선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범용하다고 했지만, 자신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인식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상당한 그릇이라고 봐야 했다.
내부 사정이 엉망진창인 발랑스 왕국의 안에서 이 정도 인물이 남아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어지간한 적이라면 계획대로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어지간한 적이라면 말이다.
“주군. 적이 가시거리 안에 들어왔습니다.”
“좋다. 전군에 지시를 내려라. 먼저 공격하지 말고 철저하게 수비로 싸운다. 알겠나?”
“옛. 주군!”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베르크 후작 역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 시켰다.
‘겁먹지 마라. 할 수 있다. 나라를 지키는 것이다. 미하일 베르크.’
지크프리트는 적이 가시거리에 들어오자 잠시 군을 멈추고 태세를 정비하게 했다.
그리고 본인이 조금 앞으로 나아가서 적의 진형을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 잠시 살펴본 후에 그는 곁에 있는 제이크에게 말했다.
“적장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
“발랑스 왕국의 미하일 베르크 후작이라는 자입니다.”
“들어본 적 없는 인물이군. 어쨌든, 꽤 꼼꼼한 성격인 모양이야.”
지크프리트는 적의 진형을 살피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건 거의 거북이군. 노골적으로 잔뜩 웅크리고 있어.”
진형을 멀리서 보기만 했지만 지크프리트는 이미 적의 병력 배치와 그 의도를 꿰뚫고 있었다.
방어 라인을 몇 겹으로 탄탄하게 준비하고 어디까지나 방어에만 치중하겠다는 의도였다.
‘아마도, 제국의 원군이 도착할 때 까지 버티겠다는 거겠지? 그렇다는 것은 발랑스 왕국으로 파병을 한 앤드루스 제국군은 이미 도착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될까?’
지크프리트는 베르크 후작의 의도를 훤하게 읽는 것은 물론이고, 그로 인해서 후방의 정보까지 읽어냈다.
그리고 아무리 탄탄한 진형이라고 해도 지크프리트는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군을 둘로 나눠서 우회시켜 양동을 한다던가?
혹은 그 양동을 미끼로 해서 적이 스스로 나서게 한다던가?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크프리트의 머릿속에서는 효율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일곱 가지 작전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그 작전을 모두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래서는 곤란하지. 이 전투는 효율적으로 이기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얼마나 강한 임팩트를 남기느냐가 관건이다.’
이번 전투 하나만을 이기기 위해서라면 효율적인 작전이 주요하다.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보다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 전쟁은 발랑스 왕국이라는 무대 위에서 제국을 상대로 싸우는 전쟁이다.
그때를 위해서 보다 강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고전은 물론이고 잔꾀를 부리는 모습조차 선택지에는 없었다.
“제이크.”
“예. 주군.”
“전군에 지시해라. 진형은 C-AB 진형이다. 적의 방어막을 무력화시키겠다.”
“예. 알겠습니다.”
“또한 선두에는 제이크 네가 직접 선다.”
“…·그 말씀은?”
“더 이상 감출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그런 지크프리트의 말에 제이크는 기대감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후작님. 적들이 전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보고 있다.”
베르크 후작은 임시로 만들어둔 망루에 올라가서 적의 진형을 보고 중얼거렸다.
‘기병이 앞에 있고 보병이 뒤에, 그 뒤에는 궁병…. 전형적인 돌격 진형인가?’
베르크 후작은 적의 진형을 보고 이를 드러내며 중얼 거렸다.
“기병이 앞이라… 그렇게 우습게 보이더냐?”
지금 베르크 후작이 이끄는 발랑스 왕국의 군세는 10만의 대군이다.
그런 대군이 몇 겹으로 탄탄하게 방어막을 구축하고 적을 마주하고 있었다.
정석대로라면 적은 숫자로 정면에서 승부를 거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설령 병력의 질과 전략에 자신이 있다고 해도 정면 승부를 하자면 보병이 앞에 서야 했다.
두꺼운 방패와 갑옷을 걸친 보병을 앞에 세우고 그들이 전열의 어딘가에 빈틈을 만들면 그 부분에 기마 부대가 파고들어서 적진을 흩트리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런데 지금 공화국의 진형은 기병이 앞에 서고 그 뒤에 보병이 섰다.
기마병이 먼저 적의 진형에 구멍을 내고 그 뒤에 보병이 따라오며 적의 전열 자체를 붕괴시키는 공격 패턴인 것이다.
공격이 성공했을 때의 파괴력은 이쪽이 더 크다.
보병이 앞에 서고 기마병이 뒤에 따르는 경우의 목적은 적진의 전열을 무너트리고 전쟁을 유리하게 전개하는 것이지만, 기마병이 앞에 서고 보병이 뒤에 따를 경우의 목적은 적진을 완전히 붕괴시켜 버리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단, 이건 기마병이 앞에서 적을 무조건 허물어트린다는 전제 조건이 갖춰진 상태에서만 가능한 진형이다.
‘완전히 얕잡아 보는군.’
베르크 후작은 순간 속에서 뭔가 울컥하며 치솟아 올랐다.
병력의 질은 공화국군이 더 높을지 몰라도 아군의 숫자는 두 배다.
거기다 진형을 탄탄하게 갖춰두기까지 했다.
이것을 기마 부대의 정면 돌격으로 뚫어 내겠다니?
자신감을 넘어서 적이 자신을 얕잡아 보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후우우우….”
베르크 후작은 자신의 인중까지 치밀어 오른 분기를 심호흡 한 번에 정리해 버렸다.
‘흥분하지 말자. 내가 무명(無名)인 것이야 당연한 일.’
베르크 후작은 분노와 호승심을 버리고 철저하게 본연의 목적에만 충실하기로 했다.
수비를 탄탄히 하고 제국군의 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된다.
적이 얕잡아 보고 있다면 오히려 더 잘되었다.
몇 겹으로 탄탄하게 준비한 이 방어진에 적이 부딪힌다면 계란을 바위에 던지는 격이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냉정하게 대응하기만 하면 된다.
“최일선의 보병을 방패병 대신에 장창병으로 바꿔라. 기마 부대의 돌격에 대비한다.”
“옛!”
그는 냉철하게 지시를 내렸다.
어디까지나 교과서적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