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168화 (168/257)

제168화

거짓일 리가 없다.

자신들의 한가운데에 비무장으로 들어와서 눈물을 흘리며 연설을 하는 저 남자의 말이 거짓일 리가 없다.

저 남자가 꿈꾸는 세상을 이루고 싶다.

그런 세상에서 살고 그런 세상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다.

“당신과 같은 꿈을 원합니다.”

“나도 같은 꿈을 꾸겠습니다. 당신과 함께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당신과 함께하겠습니다.”

“나도….”

“나도 같이….”

사람들은 거대한 환호와 함께 너도 나도 밀턴의 꿈에 동참하겠다고 말했다.

레이라 여왕이 하는 것처럼 바람잡이를 심어둔 것도 아니고, 철저한 사전 준비로 여론을 조작한 것도 아니다.

그저 정면에서 마음과 마음을 마주해서 얻어낸 성과였다.

이 순간 밀턴은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이것이다.

이것이 바로 군주라는 자리를 차지한 이들이 해야 할 역할이다.

사람들에게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이끌어가는 것.

그것이야 말로 밀턴이 바라는 군주의 모습이었다.

멈추지 않는 떨림 속에서 밀턴에게 메시지가 들려왔다.

[군주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민심을 움직여서 국난을 해결했습니다. 특전이 주어집니다.]

[새로운 사상을 도입해서 시대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특전이 주어집니다.]

그 메시지 내용은 이제까지와는 좀 달랐다.

그리고 밀턴은 자신의 상태창을 확인해 보기도 전에 자신에게 직접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이건…. 이건 무슨 감각이지?’

겉으로 보기에 눈에 띄는 변화는 아니었지만 내면에서는 뭔가가 변했다.

머리가 좀 더 맑아지고, 사고의 폭이 넓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다 더 현명해졌다고 해야 할까?

거기다 밀턴의 내면에 있는 오러의 기운이 보다 더 강해지더니 이윽고 몸에서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이건 설마?”

밀턴은 자연스럽게 흘러넘치는 오러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주변에서도 그런 밀턴을 보고 저마다 경악했다.

“헉?”

“이게 무슨 일이지?”

“대공 전하께 빛이 나다니?”

사람들이 경악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한 명의 남자가 급하게 말을 달리며 소리쳤다.

“마스터의 각성이다! 대공의 곁에 접근하지 말고 떨어져라.”

그건 다름 아닌 페일런 공작이었다.

그는 지금 밀턴에게서 일어나는 변화가 뭔지 알고 있었다.

자신도 한 번은 겪어본 일이다.

익스퍼트에서 마스터의 경지로 올라가는 단계에서 발생하는 각성.

그것은 육체적인 수련보다는 정신적인 자극이 더 강했다.

분노, 환희, 좌절, 감동 등등….

그런 정신적인 자극이 육체와 정신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벽을 허물어 주고 심신(心身)을 일체화시키는 것이다.

마스터라는 경지는 익스퍼트보다 오러가 많은 이도 아니고, 검술이 더 뛰어난 이도 아니다.

다만, 몸과 마음의 어긋남을 없애고 완벽하게 자기 목적을 위해서 컨트롤할 수 있게 되면, 결국 오러도 기술도 더 강하고 완숙해지는 것이다.

그게 마스터들이 느끼는 익스퍼트와 마스터의 차이다.

말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애매한 감각이었지만 그래도 한 번 그 경지에 올라본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마스터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지금 밀턴도 드디어 그 경지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페일런 공작은 혹시라도 주변에서 밀턴을 건드려서 지금의 정신적인 깨달음을 방해할까 봐 서둘러 달려갔다.

다행이도 페일런 공작의 말을 들은 군중은 아무도 밀턴은 건드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눈앞에서 위대한 경지에 이르러는 밀턴을 존경하다 못해 경건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페일런 공작이 도착했을 때 밀턴은 지그시 감았던 눈을 뜨고 가볍게 호흡을 정돈하며 말했다.

“이런 거였구나….”

오르고 나니 알 것 같았다.

오르기 전에는 정말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막상 오르고 보니 너무나 선명하게 알 것 같았다.

이런 것이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한 이들은 모두 이것과 같은 느낌을 공유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몸에 오러를 슬쩍 움직여 보니 익스퍼트일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러가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마치 손과 발을 움직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이다.

오히려 이제까지 왜 이렇게 못했는지가 이해가 안 갈 정도였다.

그런 밀턴에게 페일런 공작이 다가와서 말했다.

“축하하네.”

“아…. 예.”

“아직 어색한가?”

“얼떨떨하군요.”

밀턴의 말에 페일런 공작은 자신의 허리에 매여 있는 검을 뽑아서 건네주며 말했다.

“그럼 한번 실감을 느껴보게.”

그 말에 밀턴은 검을 받아서 손에 쥐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자 모두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밀턴을 바라보고 있는걸 알 수 있었다.

‘기대에 부흥해 볼까?’

그리고 밀턴은 하늘로 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누군가 있을 것이다.”

뜬금없는 밀턴의 말에 주변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밀턴의 말이 이어지자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감히 무고한 민초를 공격하고 노예 상인으로 위장해서 국가에 분열을 획책한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청중은 밀턴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밀턴은 계속 말을 이었다.

“누군가 있을 것이다. 감히 페일런 공작이 화평의 의도로 부른 국민들의 대표를 더러운 칼날로 암습해서 분노와 증오를 부추긴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밀턴의 말에 좌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밀턴의 연설에 감화된 이들은 밀턴이 하는 말이라면 하늘에서 해가 떨어진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누군가 있을 것이다. 우리 국가에 증오와 악의를 퍼트려서 피가 흐르고 슬픔이 만연하기를 기대한 그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이제 밀턴의 말에 사람들은 공감하고 분노를 느꼈다.

누군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누군가 때문에 자신들은 분노했고 잘못했다면 무수한 이들이 피를 흘리며 죽었을 것이다.

“아마 그 누군가는 지금도 이 현장을 보고 있을지 모른다. 군중 속에 숨어서 위장해서, 혹은 어딘가에 멀리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밀턴은 검에 오러를 힘차게 불어넣었다.

파아아앗!

그것은 마치 성화를 밝히는 것처럼 환하게 빛나는 황금색의 오러 블레이드였다.

평범한 마스터의 오러가 푸른색과 흰색인 것에 비해서 밀턴의 오러는 찬란한 황금색의 오러였다.

그 황금빛이 민중에게는 자신들을 이끌어주는 망망대해 속에 등대의 불빛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밀턴이 마지막으로 크게 외쳤다.

“그 누군가에게 고한다. 네놈들이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로 뭉쳐서 맞설 것이다!”

“와아아아아아!!!”

“포레스트 대공 전하 만세!!”

“레스터 왕국 만세!!”

“민주주의 만세!!”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가 터져 나왔고 밀턴은 그 속에서 하나의 우상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뿌드득.

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이빨이 부서질 정도로 이가 맞물렸다.

밀턴의 말대로 ‘누군가’라고 지목을 받은 데이비드는 밀턴을 죽일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후우우…. 후우우….”

사람이 너무 분하면 말이 안 나온다고 하던가?

지금 데이비드의 경우가 딱 그랬다.

계획이 모두 망가졌다.

기껏 선동시켜서 멍청한 우민들을 폭주 상황까지 밀어 넣었다.

이제 북부에 피가 뿌려지고 시체가 쌓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미래라고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 단 한 명이 나서서 모든 것을 망쳐 버린 것이다.

“밀턴…. 포레스트….”

데이비드의 입에서는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과 흡사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증오의 시선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밀턴은 진작 찢어져 죽었을 것이다.

그만큼 밀턴을 바라보는 데이비드의 시선은 무시무시했다.

데이비드의 증오에는 심리적으로 깊은 원인이 있었다.

단순히 자신의 음모가 부서졌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밀턴이 군중들에게 한 연설과 그들을 하나로 감화시키는 과정 자체가 데이비드의 심기를 크게 거슬렀다.

데이비드가 악의와 증오를 심어 놓았지만 밀턴은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주었다.

자신은 절대 하지도 않을 거지만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밀턴이 정말로 싫었다.

자신과 정반대에 있는 존재.

어둠 속에서 음습하게 자기 욕구를 채우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사이코패스인 데이비드에게 있어서 밀턴은 하늘 높은 곳에서 빛을 뿌리고 있는 광명 그 자체였다.

질투와 증오심을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저러지 못한다.

노력이고 뭐고 간에 근본적으로 데이비드는 저렇게 될 수 없는 인간이다.

스스로가 인간에게 해로운 인간임을 잘 알고 있는 데이비드였다.

하지만, 인간인 이상 데이비드에게도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무거운 감정이 있다.

그게 바로 고독이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간에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생물이다.

그래서 데이비드는 지크프리트가 자신에게 쓰임새가 있다고 인정해 주었을 때 그를 평생의 주인으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주종 관계일 뿐.

데이비드에게 있어서 수많은 인간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밝히고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은 간절하게 원하지만 절대 손에 닿을 수 없는 것을 밀턴은 너무나 간단하게 손에 넣었다.

어찌 질투심이 안 나겠는가?

“죽인다. 네놈은…. 네놈은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이날을 기점으로 데이비드는 밀턴에게 맹목적인 증오심을 가지게 되었다.

“데이비드가 실패했다고?”

북부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받은 지크프리트는 살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예. 폭동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북부 지역의 민심이 급속도로 안정화되고 있다고 합니다.”

“놀랍군. 데이비드가 실패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지크프리트로서는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데이비드라는 존재는 야비함과 악의로 이뤄진 독 덩어리 같은 생물이었다.

처음에 발견했을 때 죽이기보다는 살려두고 쓰는 편이 더 유용하다고 판단한 것은 그런 존재가 워낙 드물기 때문이다.

인간을 맹목적으로 증오하는 인간이라니?

거기다 이 사악한 짐승은 교활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지크프리트는 죽이기보다는 길들여 써먹겠다고 결정했고, 실제 그 사냥개는 무척 쓸모가 있었다.

발랑스 왕국의 내부에서 사흘이 멀다 하고 일어나고 있는 민란이 바로 데이비드의 작품이었다.

사람에게 증오와 분노라는 독을 퍼트리는 것에 아주 특화된 짐승이었다.

이제까지 레스터 왕국의 내부에 데이비드를 밀어 넣지 않고 기다렸던 것은 그런 데이비드의 존재를 중요한 순간까지 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데이비드를 투입하면 레스터 왕국의 안에서도 대규모 민란이 일어날 것은 자명했다.

그런 분야에 관해서는 지크프리트 자신도 데이비드보다 더 잘할 자신이 없을 정도였다.

실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데이비드가 선동시켜서 일으킨 민란의 규모가 20만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런 민란이 한순간에 가라앉아 버리다니?

“페일런 공작에게 그런 능력은 없지. 레이라 여왕이 나선 건가?”

지크프리트의 예상에 보고를 하던 전령이 말했다.

“아닙니다. 밀턴 포레스트가 나섰다고 합니다.”

“밀턴? 그는 전쟁터 말고는 별로 쓸모가 없을 텐데?”

“하지만 정말입니다. 단신으로 성난 군중의 앞에 나타나서 연설로 성난 군중을 진정시켰다고 합니다.”

“…말도 안 돼.”

지크프리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전령에게서 직접 보고서를 뺏어서 그 내용을 읽었다.

거기에는 밀턴이 어떻게 나타났고, 무슨 말을 했으며, 마지막에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서 오러 블레이드를 만들어 냈다는 것까지 모두 적혀 있었다.

그중에서도 지크프리트가 주목한 것은….

“민주주의? 국민에게 참여권을 주는 국정 운영 시스템이라는 건가?”

밀턴이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는 정보보다 지크프리트를 집중시킨 것은 민주주의에 관한 기본 개념이었다.

‘이거 의외로….’

지크프리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는 이제까지 밀턴은 전쟁터에서 유능한 모습을 보이는 자신의 적수라고 판단했다.

처음에는 적수조차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몇 번의 전투 끝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터에서 자신을 그렇게까지 애먹인 상대는 밀턴 포레스트 한 명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이 연설이 사실이라면?

‘놈도 나와 같은 것을 꿈꾸고 있다는 건가?’

지크프리트는 군인이지만 스스로를 군주라고 생각했다.

이 어지러운 시대를 평정하고 그 위에 우뚝 서서 세상에서 가장 높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이들이 왕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고, 앤드루스 제국에는 황제라는 존재도 있다.

하지만 그들 모두를 무릎 꿇리고 이 세상에 유일한 절대 군주로 남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런 의미에서 지크프리트는 밀턴의 연설 내용에서 군주의 그릇을 발견했다.

그것도 그냥 그저 그런 국가의 지배자 정도가 아니라 시대의 방향을 결정하고자 하는 야심가의 그릇이었다.

“그래…. 그렇다 이거지.”

지크프리트의 눈이 스산해졌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영역에 같은 종류의 맹수가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된 맹수의 그것과 같았다.

그리고 지크프리트가 부하에게 말했다.

“데이비드에게 전서구를 날려 귀환 명령을 내려라.”

“데이비드는 아직 다른 수단이 남았으니 최선을 다해 보겠다고 연락을 했습니다.”

“소용없다. 그리고 필요도 없다.”

지크프리트는 서신을 와락 구기며 속으로 생각했다.

‘놈이 나와 같은 시대의 패권을 다투는 영웅이라면 데이비드 따위한테 당할 리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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