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화
밀턴과 장시간에 걸친 토론을 하고 레이라 여왕은 밀턴에게 말했다.
[당신의 견해는 처음 들어보는 것이지만 일리가 있어요. 시대의 흐름에 맞서는 것보다는 맞춰서 흐르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죠.]
라고 말하며 그녀는 밀턴의 생각에 찬성을 했다.
위기와 기회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
밀턴은 이번 위기를 기회로 삼아서 이 나라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킬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한 준비를 하고 이 자리에 선 것이다.
밀턴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군중에게 말했다.
“공화주의라는 사상 때문에 왕국의 지배는 받아들일 수 없다. 이건가?”
“그렇다! 우리는 공화주의로 낙원을 건설하는 그날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결코 압제자의 핍박에 굴하지 않는다!”
“압제자는 물러가라!”
설령 밀턴과 레이라 여왕이 올바르고 유능한 군주라고 해도 상관없다.
공화주의는 군주를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 라는 것이 이 세계에서 공화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기본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서 밀턴이 군주의 권능을 내세워서 이들을 설득하려고 해봤자 양자의 주장은 끊임없는 평행선을 그릴 뿐이다.
하지만 밀턴은 그 선의 궤도를 틀었다.
“그대들이 하는 말은 일리가 있다.”
“압제자는…. 뭐?”
“지금 뭐라고 했지?”
군중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밀턴을 바라봤다.
거기에 밀턴은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평등하다. 신분과 계급으로 인간의 우열을 정하는 것은 이미 낡은 사고방식이다.”
밀턴의 말이 가지는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일국의 군주가….
신분 제도의 가장 정점에 서 있는 인물이 신분 제도를 부정하는 말을 한 것이다.
“빌어먹을….”
구석진 숲의 그늘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있었다.
바로 모든 음모를 뒤에서 꾸민 데이비드였다.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말했다.
“도대체 뭐 하는 짓이냐? 그냥 닥치고 싸워. 서로 개처럼 물어뜯고 죽고 죽이란 말이다.”
도대체 이게 뭔가?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
중간에 페일런 공작이 몇 번의 발버둥을 치기는 했지만 그 정도 반항 정도는 그에게 사소한 것이었다.
민중을 능숙하게 분기시켜서 10만, 아니 20만에 가까운 군중을 폭도로 만들었다.
그런데 단 한 명.
밀턴 포레스트라는 단 한명의 인물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단 한 명의 병사도 거느리지 않고 그저 맨몸의 인간일 뿐인데 아무도 그를 무시하고 지나가지 못하고 있다.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흔들리고 휘둘리고 있을 뿐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데이비드는 저 군중에게 충분하다 못해 흘러넘칠 정도로 증오와 악의를 불어넣었다.
그런 군중이 고작해야 한 명의 변설에 흔들린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이대로 가면 그의 계획은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던 와중에 밀턴이 신분 제도를 부정하는 듯한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데이비드는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리석게도 자충수를 두는구나.’
아마 이 자리에서 성난 군중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내린 선택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왕국의 정점에 있는 자가 신분 제도를 부정한다?
그런 거짓말이 성난 군중에게 먹힐 리가 없었다.
조금도 신뢰할 수가 없었다.
‘어리석은 놈. 이제 끝이다.’
데이비드는 밀턴의 파멸을 확신했다.
밀턴의 말에 잠시 술렁였던 군중 중에 누군가 말했다.
“믿을 수 없다.”
“그렇다. 그저 말뿐인 말을 어찌 믿는단 말인가?”
“그대는 우리의 공화국을 멸망시킨 장본인이 아닌가?”
군중의 성난 분노가 밀턴을 덮치려고 했다.
하지만 이때 밀턴은 오히려 묘하게 침착해졌다.
‘그 전설의 10분의 1 만큼만이라도 진심을 담을 수 있을까?’
미리 준비하고 연습도 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얄팍한 거짓말로 선동하기에는 이들의 안에 있는 신념이 너무 확고했다.
그런 이들의 마음에 와닿기 위해서는 화려한 변설보다는 진심을 담은 말을 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밀턴은 ‘그 전설’을 재현하기로 마음먹고 이 자리에 온 것이다.
그리고 밀턴은 분노한 군중에게 말했다.
“나는 공화주의를 찬성하는 것은 아니오. 왜냐하면 공화주의가 주장해온 이상향은 결코 닿을 수 없는 환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오.”
“거짓말이다.”
“우리들의 신념을 모독하지 마라!”
군중이 성을 내려고 했지만 그 전에 밀턴이 말했다.
“거짓이 아니오. 만약 공화국이 완벽한 이상향이라면 어째서 공화국의 깃발 아래서 그대들은 헐벗고 가난했던 것이오?”
밀턴의 말에 몇몇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특히 공화국 시절보다 생활이 나아졌음을 실감한 이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공화국이 완벽하고 평등한 국가였던가?
그 안에서 모두가 굶주리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갔던가?
그렇지 않다.
공화국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봤던 이들이기에 오히려 잘 알고 있었다.
군사력을 최우선시하는 정책 덕분에 국민들은 항상 무리한 세금을 부담해야 했다.
인간이 평등하다고 하지만 공화국의 요직에 있는 이들은 귀족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공화국이 완벽한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왕국에서 불합리한 압제를 당하는 것보다는 공화국이 말하는 평등한 세상이라는 이상향에 취해 있는 것이 더 좋았던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왕국에 충성을 다하라고 해 봐야 역효과일 뿐.
밀턴이 제시할 것은 전혀 다른 미래였다.
“신분 제도는 오랫동안 이 세계를 유지해 왔지만 이제는 너무 낡았습니다. 공화주의는 너무 완벽한 이상향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결코 도달하지 못할 환상의 세계를 현실의 인간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양쪽 모두 지금의 시대에는 맞지 않습니다.”
밀턴은 그렇게 운을 떼고 말을 이어갔다.
“내가 바라는 미래는, 전 국민이 국정에 참여권을 가지는 국가입니다.”
밀턴의 말에 사람들은 크게 웅성 거렸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국민이 국정에 참여하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그거야 말로 막연한 이상향 아닙니까?”
사람들의 물음에 밀턴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직까지는 그저 막연한 구상에 불과합니다.”
거짓말이다.
밀턴의 머릿속에는 막연한 구상을 넘어서 상당한 구체안이 들어 있었다.
왜냐하면 그런 나라, 아니 그런 세상에서 살다 오지 않았던가?
“다만 몇 가지 예를 들자면,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의회를 만들고, 그 의회의 의원을 국민이 투표로 뽑게 하는 것입니다. 즉 국민이 스스로 지도자를 뽑는 것이오.”
밀턴의 말에 군중은 크게 술렁였다.
“우리가 직접 뽑는다고?”
“그게 가능한 건가?”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밀턴이 계속 말했다.
“법을 관리하고 집행하는 관공서를 만들고 그 분야에 특화된 지식을 갖춘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우수한 인재를 뽑기 위해서 신분에 차별을 두지 않고 시험을 쳐서 뽑아야 합니다.”
신분에 차별을 두지 않고 시험을 쳐서 인재를 뽑는다는 말은 군중의 귀에 무척 달콤하게 들렸다.
“그 외에도 치안을 유지하는 관공서와 국방을 담당하는 관공서, 경제, 토목, 세율 등등. 여러 가지 분야를 나눠서 각 분야에 인재를 뽑아서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 능력만 있다면 국가의 요직에 오를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합니다. 저는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르려고 합니다.”
마침내 밀턴의 입에서 처음으로 민주주의라는 말이 나왔다.
예전부터 생각은 했지만 도무지 이 말을 입 밖으로 낼 용기가 없었다.
이 민주주의라는 사상이 이 세계에 가져올 파급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공화주의 이상으로 이 세상에 피를 뿌릴 수 있을 정도로 파격적인 사상이 민주주의였다.
민주주의는 밀턴이 살던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국가 기조였다.
단, 이것은 거저 이뤄지지 않는다.
무수한 사람들의 투쟁과 피로 이뤄지는 것이 민주주의였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이 단어를 입 밖에 낸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의 아수라장 같은 세상을 종식시키고 나라의 균형을 찾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필요했다.
민주주의라고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건 잘 알고 있다.
밀턴 스스로가 전쟁에서 무한 경쟁사회에 치여 살다가 과로로 사망하지 않았던가?
다만, 그렇다고 해도 이 세계보다 훨씬 더 앞선 세상의 기억을 가지고 희귀한 밀턴에게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한 가장 우수한 시스템이 민주주의였다.
왕권주의는 도박성이 짙다.
군주의 성향에 따라서 나라의 흥망성쇠가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공화주의는 너무 이상적이다.
그들이 말하는 평등한 세상이라는 것은 사실상 어떻게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겠다고 외치며 민중을 선동하는 행위는 커다란 민폐일 뿐이었다.
결국 밀턴은 고심 끝에 민주주의라는 카드를 꺼내기로 한 것이다.
다만, 이런 결심을 하고도 언제 어떤 형태로 꺼낼지를 결정 못 하고 있었지만….
이번 위기를 기회 삼아서 민주주의라는 카드를 꺼낸 것이다.
밀턴의 말을 들은 군중들은 술렁거리다가 말했다.
“그렇게 해서 당신이 얻는 게 무엇이오? 그냥 입에 바른 말만 하며 거짓으로 우리를 속이는 것 아니오?”
그의 말에 주변에서는 충분히 그럴 듯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밀턴은 좌중을 향해서 말했다.
“내가 얻는 것은 내가 꿈꾸는 세상 그 자체입니다.”
“꿈?”
“그게 무슨….”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 꿈이라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그저 수면 중에 일어나는 현상 중에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밀턴에게 꿈이라는 것은 바라는 미래, 소원,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 그 자체였다.
그런 괴리감을 두고도 밀턴이 꿈이라는 단어를 꺼낸 것은 한 가지 전설을 재현하기 위해서이다.
지구에서는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위대한 전설.
그 전설의 편린을 빌려오기 위해서 꿈이라는 단어를 꺼낸 것이다.
그 전설이란 바로….
“여러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
지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 중에 하나였다.
밀턴은 자기 스스로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계를 넘어서 위대한 위인의 말을 빌려오는 것은 밀턴에게도 가능했다.
전생에서도 그 연설의 영상을 몇 번이고 보고 감동 받았던 밀턴이었다.
그때 자신이 받았던 감동의 100분의 1이라도 이들에게 전할 수 있기를 바라며 밀턴은 말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진리를 우리 모두가 진실로 받아들이는 그런 세상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밀턴의 말에 모두가 웅성거렸다.
그저 단순하게 입바른 말이라고 하기에는 가슴에 와닿는 무게가 심상치 않았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귀족의 자제와 평민의 자제가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서 우정을 나누는 날이 언젠가는 오리라는 꿈입니다.”
가슴이 뛴다.
도대체 왜일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 밀턴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힘이 있었다.
듣는 이들은 물론이고 밀턴 본인도 자신의 말에 도취된 듯이 군중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군중은 밀턴의 걸음걸이 하나하나에 길을 비켜 주었지만 어느새 밀턴의 퇴로는 사라졌다.
만약 일이 실패하면 언제든지 레너드를 타고 후퇴하겠다는 생각을 했던 밀턴은 이 순간 스스로 퇴로를 없애고 군중의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의 한가운데에서 커다란 파문을 계속해서 일으켰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한때 칼을 마주했던 공화국의 국민과 왕국의 백성이 칼이 아닌 술잔을 마주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꿈입니다.”
어느새 밀턴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 연기였다.
아니 연기로 하기로 마음먹고 왔었다.
위대한 연설을 베낀다는 죄책감이 좀 들기도 했고, 과연 자신이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도 들었다.
하지만 말을 꺼내면서 밀턴은 어느새 자신의 안에 있는 진짜 꿈을 바라고 있었다.
자신도 몰랐던 마음이 말을 함으로 인해서 밀턴의 안에서 맹렬하게 존재감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우리의 자식들이 핏줄이나 신분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 받는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게 되는 날이 언젠가는 오리라는 꿈입니다.”
밀턴은 크게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가 함께 꿈꾸고 노력해야 할 신념입니다. 이러한 신념만 있다면 우리는 절망의 산을 깎아 희망의 돌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 된 신념 앞에서 함께 일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투쟁하여야 합니다.”
밀턴이 여기까지 말한 순간….
짝…. 짝짝….
누가 시작했을까?
한 명이 시작한 박수는 두 명, 열 명, 100명….
커다란 파문이 되어 번져갔고 이윽고 모든 이들이 박수를 치며 눈물을 흘렸다.
분노와 악의로 가득했던 군중은 밀턴의 연설에 감동과 환희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