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166화 (166/257)

제166화

밀턴은 단 한 명의 군사도 거느리지 않고 갑자기 나타났다.

그런 밀턴의 등장은 폭도들은 물론이고 페일런 공작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간신히 늦지 않았군.’

밀턴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레너드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레너드가 명마라고 해도 너무 무리를 시켰다.

최소한의 병력만을 추슬러서 달려오고 있었던 밀턴이었다.

하지만 오는 길에 폭도들과 페일런 공작의 병력이 충돌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자 만사를 제치고 먼저 움직이기로 했다.

주변에서는 무모하다고 말렸지만 밀턴은 단호하게 뿌리치며 말했다.

[단 한 번이라도 무력 충돌이 일어나면 10년은 돌아가야 한다. 그걸 모르는가?]

그렇게 만류하는 가신들을 뿌리치고 밀턴은 한걸음에 달려온 것이다.

그리고 단신으로 폭도들의 앞을 가로막고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포레스트 대공이라고?”

“설마…. 정말인가?”

“인상착의는 맞는 것 같은데?”

분노에 가득차서 어떤 말도 통하지 않을 듯했던 공화주의 폭도들이 술렁거렸다.

사실 그들은 눈앞에 페일런 공작의 군대가 있다고 해도 멈추지 않을 각오로 왔다.

설령 무모한 도전으로 대량 학살의 참극이 벌어진다고 해도 자신들의 하나하나의 죽음이 공화주의 건설에 초석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순교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온 것이다.

하지만 그 앞에 밀턴이 나타나자 놀라움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분노를 잠깐이지만 잠재울 정도로 밀턴 포레스트라는 남자는 남다른 무게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무엇을 망설이는가? 적의 수괴가 눈앞에 있다.”

“죽여라! 압제자를 죽여라!”

“공화주의 만세!”

잠시간의 놀라움이 지나가자 다시 분노에 가득 찬 군중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집단이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내는 광기에 가까운 분노.

밀턴은 이걸 직접 체험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장난 아니군.’

왜 민심을 천심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커다란 의지가 찍어 누르는 듯한 저들의 외침에 밀턴은 당장이라도 짓눌릴 것 같은 중압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예상했던 일이다.’

밀턴이라고 아무런 대책 없이 여기에 온 것은 아니다.

확고한 해결책까지는 아니라도 일단 밑져야 본전이다, 라는 정도의 계획은 가져왔다.

“여차하면 레너드 너만 믿는다.”

밀턴은 말에서 내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만약 일이 틀어지면 체면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레너드에 올라타서 뒤에 있는 페일런 공작의 군대로 도망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최후의 퇴로를 정해둔 밀턴은 초연한 표정을 하고 성난 군중들에게 걸어갔다.

가슴이 꽤 떨렸지만 속으로는 어차피 밑져야 구기는 건 체면뿐이라고 생각하며 군중들의 앞에 걸어갔다.

그런 밀턴의 모습은 군중들의 앞 열에 있는 자들은 꽤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밀턴이라고 하면 전쟁터에서 대활약을 해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영웅이다.

그런 남자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담담하게 있는 것은 무리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졌을 때 밀턴은 검을 뽑았다.

스르릉.

“읏….”

“크윽….”

밀턴이 검을 뽑자 앞 열에 있던 이들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 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죽음은 이미 각오한 바였다.

그들은 이를 악물었고 밀턴을 노려봤다.

하지만 그 직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밀턴은 뽑은 검을 그대로 옆으로 던져 버린 것이다.

파격적인 행동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밀턴은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양손을 바닥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머리를 숙여 군중들에게 모두 들리도록 크게 외쳤다.

“미안합니다.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은 국가의 원수인 나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런 군더더기도 없는 순수한 사과였다.

지구로 치면 정치가들이 사고 쳤을 때 마다 종종 카메라 앞에서 보이는 일종의 쇼맨십이었다.

하지만 이 단순한 사과가 이 세계에서 불러오는 효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어…. 어버버버….”

“지…. 지금….”

“말도 안 돼. …꿈인가?”

분노에 가득 찼던 군중들은 크게 동요했다.

너무 놀라서 말을 잊지 못하는 자도 있었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풀썩 주저앉은 자도 있었다.

뒤편에 있어서 상황을 모르는 자들도 앞에서 전해 들은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고? 말도 안돼. 그냥 귀족도 아니고 포레스트 대공이 어떻게?”

밀턴이 지금 보여준 행동은 실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10만이 넘는 군중들의 발걸음이 멈출 정도로 말이다.

대공의 칭호를 쓰고 있기는 하지만 밀턴 포레스트라는 남자는 기본적으로 왕이다.

한 나라의 정점에 군림하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 세계에서 왕이라는 것은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다.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태어나서 그렇게 자라고 그렇게 평생을 살아가며 죽을 때까지 그렇게 존재하는 자들이다.

물론 공화주의자들은 왕이나 귀족 같은 지배 계급을 비판하지만 존재 자체는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

오히려 적으로서 비판하기 때문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권위와 위상에 관해서 잘 알고 있다.

적의 위치에 있음으로 인해서 더 강렬하게 보이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지배자.

군림하는 권력의 정점.

과거 오거스트 국왕이나 로렌스 공왕의 존재를 보면 알겠지만 개인의 능력이 무능하다고 해도 왕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무게감은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 왕이 군중의 앞에 무릎을 꿇고 사과를 했다.

이 세계의 민중들에게 이건 꿈에서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밀턴은 이 상황에서 민감하게 분위기를 읽었다.

‘기선을 잡았다.’

지금 군중은 밀턴의 파격적인 행동에 크게 당황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밀턴은 고개를 들고 민중들에게 말했다.

“최근 국내에 참담한 비극이 일어났고, 그 비극의 원흉이 본인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밀턴은 강하게 말을 끊고 말했다.

“준엄한 신의 이름과, 나의 명예와 나의 가족을 걸고 맹세하건대 모든 것이 오해요. 나는 노예 상인들과 결탁해서 자국민을 공격한 적이 없소.”

밀턴은 최대한 진실하게 들리도록 말했다.

물론 진실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걸 순순히 믿으라는 것은 무리였다.

“거짓말이다. 생존자의 증언이 있었다.”

“그렇다. 포레스트 대공이 노예 상인의 배후에 있었다는 것은 자명한 진실이다.”

“거짓말이다. 거짓말!”

군중들 중에 몇몇이 밀턴의 말에 반발하고 나섰다.

파격적인 행보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바로 밀턴의 말을 믿는 것은 무리였다.

그리고 유난히 열성적으로 거짓말이라고 외치는 자들은 바람잡이일 수도 있었다.

밀턴은 그런 여론이 군중들에게 확대되기 전에 말했다.

“그대들에게 묻겠다. 내가 자국민을 노예 상인들에게 넘겨서 무엇을 얻겠는가?”

그런 밀턴의 물음에 한 명이 부리나케 대답했다.

“당연히 돈을 위해서 그런 짓을 한 것이 아닌가?”

‘너 딱 걸렸다.’

밀턴은 자신의 질문에 즉답을 한 남자를 향해서 눈을 똑바로 뜨고 말했다.

“돈을 위해서라고 했나?”

“그…. 그렇다. …요.”

직접 지목을 당한 남자는 순간 크게 당황했다.

그에게는 불쌍하지만 그렇게 어리바리한 태도를 보인 순간 밀턴은 그 남자를 제물로 정했다.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만만한 상대를 지목해서 조목조목 논파한다.

그로 인해서 진실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진실에 가깝게 보이도록 어필할 수는 있다.

저 이름 모를 남자는 밀턴에게 그런 상대로 찍힌 것이다.

“그대는 혹시 아는가? 서부 연안의 항구 도시에 투입된 자금이 얼마인지?”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 겠습니까?”

기세에서 이미 잡혀버린 상대는 밀턴과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우물거리듯이 대답했다.

그리고 밀턴은 큰 목소리로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 북부의 토지를 합병하고 부흥시키기 위해서 서부 연안의 항구 도시에 들이부은 금액은 무려….”

밀턴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모두에게 똑똑히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1,200만 골드가 넘는다.”

밀턴이 부른 숫자에 사람들은 순간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 정도 큰 숫자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은 했다.

하지만 이건 예상을 한참 뛰어넘은 금액이 아닌가?

1,200만 골드면 어지간한 나라의 국가 예산에 필적하는 금액이다.

요즘에서야 북부 지역에서 나오는 철광석을 남부까지 수송하는 것으로 큰 이득을 남기고 있지만, 원래 서부 연안의 항구 도시 건설 사업은 공화국의 민심을 사로잡기 위한 투자 정책이었다.

그래서 초반에는 손익을 계산하지 않고 무한정하게 자금을 투입했었다.

그게 무려 1,200만 골드나 되었다.

밀턴은 좌중을 향해서 말했다.

“그 정도의 거금을 투자해서 항구 도시를 건설하고, 이 북부에 상업의 기틀을 다졌다. 그리고 최근에는 이 지역의 광석 자원을 대륙의 최남단에 있는 워터포트 왕국까지 수출하는 판로도 뚫었다.”

밀턴은 우선 자신이 만들어낸 성과를 말했다.

그리고….

“그런데 노예 상인? 그렇게 손가락질 받으면서 돈을 벌어야 할 정도로 왕실의 재정이 빈약하다 생각하는가?”

밀턴의 말은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확실히 서부 지역의 항구 도시는 엄청난 발전을 거뒀다.

그렇게 비정상적일 정도로 엄청난 발전 속도는 막대한 자금의 투자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이들 중에는 서부 지역의 항구 도시와 거래를 트고 있는 지역의 출신들도 있었다.

비록 직접적으로 자금의 지원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간접적인 특혜는 직접 체험을 했다.

판도가 다양해진 덕분에 광산에서 나오는 철광석과 구리 등의 가격이 예전보다 꽤 올랐다.

거기에 반해 비쌌던 곡물 가격이 크게 내려갔다.

최근 들어서는 일반 서민의 가정에서도 푸석한 보리빵이나 호밀빵이 아니라 하얀 밀빵이 식탁에 올라가는 가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 이들은 공화주의 사상을 버리지는 못해서 이 시위에 참여했지만 왕국에서 잘하고 있는 일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생활의 수준이 확 올라갔는데 그걸 어떻게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시위대에 참가했다.

왜 그럴까?

어째서 생활이 나아졌음에도 왕국에 맞서는 것을 선택했을까?

그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입에서 그 하나뿐인 이유가 나왔다.

“우리는… 공화주의자다.”

누군가가 쥐어짜듯이….

마치 억지를 부리듯이 꺼낸 그 한마디는 좌중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렇다. 압제자의 탄압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는 평등한 세상을 이룩하기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낙원 건설에 초석이 되자!”

“공화주의 만세!!”

“우오오오오오!!”

밀턴의 설득에 거의 꺼져가던 불씨가 다시 한번 불이 붙었다.

‘역시 만만치 않군.’

밀턴은 피부에 와 닿는 어마어마한 박력에 다시 한번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이래서 사상이 참 무서운 것이다.

민중을 도취시켜서 하나의 사상에 취하게 하면, 그들은 다른 무엇보다 그 사상만을 우선시한다.

종교, 신념, 정의 등등….

유형은 다르지만 그렇게 하나로 뭉쳐진 민중의 힘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시대를 뒤흔들고 역사의 흐름 자체를 바꿀 수 있는 힘이다.

나라 한두 개 정도 지도에서 지워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것이 민중이 하나로 뭉쳤을 때 발휘할 수 있는 힘이다.

지구에서 인류의 역사를 배운 밀턴이기에 이런 민중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잘 알았기에 레이라 여왕과 신중하게 의논을 해서 허락을 받아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