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5화
결혼식은 무사히 진행되었고, 아이린은 정식으로 레스터 왕국의 왕비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난 백작가에서 션 페일런은 미친 듯이 수련에 매진했다.
그저 모든 것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수련에만 모든 것을 매진한 것이었다.
번민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그 수련에 션 페일런의 경지는 일취월장했다.
그리고 익스퍼트 최상급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 그는 왕실의 부름을 받았다.
그의 실력이 소문남에 따라서 왕실 기사단에서 영입 제의가 온 것이다.
원래 기사가 가문에서 다른 가문으로 적을 옮기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다.
하지만 왕실로 적을 옮기는 것은 예외다.
그것은 오히려 영광된 일이고, 자기 가문에서 왕실 기사단의 일원을 배출했다는 것은 일종의 명예였다.
슈에일라 백작은 션 페일런은 기꺼이 왕실에 인도했고, 그렇게 그는 왕실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출신을 배려한 왕실에서는 그를 아이린 왕비의 후궁을 경호하는 임무에 배치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번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가혹하게 수련을 했지만 그는 결국 연모하는 여인의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후궁의 경호를 맡으면서 아이린 왕비는 션 페일런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공적인 용무가 없다면 대화도 하지 않았고 우연히 마주칠 일이 있어도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그런 그녀의 냉정한 태도가 션 페일런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고마웠다.
그날 밤에 있었던 그녀의 눈물보다는 차갑고 냉정한 그녀의 태도가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이다.
그리고 어린 아들과 함께 미소 지으며 행복해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때 자신의 행동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아이린 왕비는 아들에 이어서 둘째로 레이라 공주를 낳았고, 션 페일런은 왕실 기사단의 업무에 익숙해졌다.
서로가 서로의 위치와 역할에 익숙해진다고 느낄 무렵.
션 페일런에게 이상한 명령이 떨어졌다.
왕궁의 경호를 벗어나서 외곽 지역의 순찰을 하라는 명령이었다.
그것도 아이린 왕비가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외유를 나가는 날에 말이다.
보통 경비를 강화해야 하는 시기에 오히려 경비를 약화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왔다는 것이 이상했다.
하지만 당시 션 페일런에게는 자신의 의지로 명령을 거스를 수 있을 정도로 권력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랐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꺼림칙한 기색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결국 명령에 따르는 척하면서 핑계를 대고 아이린 왕비가 이유를 나가는 장소로 향했다.
사실 그렇게 깊은 뜻은 없었다.
그저 심기가 불안하니 그녀가 안전하게 있는 모습을 보고 안심하고 싶을 뿐이었다.
정말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션 페일런이 본 것은 암살자들의 습격에서 가족을 지키려고 했는지 손에 검을 쥔 상태로 죽은 왕자와 몸을 웅크리고 자기 딸을 보호하고 있는 아이린 왕비의 모습이었다.
너무나 충격적인 광경에 션 페일런은 인기척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리고 암살자들은 그의 존재를 안 순간 잠시 당황하는 듯 했지만 빠르게 움직였다.
목격자는 무조건 제거하는 것이 암살자들의 철칙이다.
다만, 그들은 운이 나빴다.
“감히….”
션 페일런은 분노에 머리가 폭발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암살자들을 향해서 검을 뽑아서 휘둘렀다.
단 한 칼에 암살자 다섯 명이 비명도 남기지 못하고 절명했다.
그리고 그는 성난 사자가 되어서 암살자들을 유린했다.
당시 션 페일런은 이미 마스터의 경지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기습이라면 모를까? 정면 승부에서 암살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이다.
암살자들을 처리한 후에 그는 서둘러 아이린 왕비의 상태를 살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전하!”
“쿨럭…. 션…. 당신인가요?”
아이린 왕비는 이미 죽음이 임박한 상태였다.
그녀는 암살자들에게서 자기 딸을 지키기 위해서 몸으로 그들의 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아이린…. 제발, 빌어먹을 제발….”
션 페일런은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출혈의 양과 상처를 보고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 눈앞에 실재할 때 인간은 무력해진다.
그저 애원하고 기도하며 간절하게 바랄 뿐이다.
그 바람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엄마…. 엄마….”
점점 차가워져 가는 아이린 왕비의 옆에서는 아직 어린 나이인 레이라 공주가 울먹이고 있었다.
아이린 왕비는 그런 딸의 손을 잡아주며 션 페일런에게 말했다.
“션…. 부탁이… 있….쿨럭….”
“말하지 마요. 제발….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아이린 왕비는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 딸을…. 부탁….”
“제발…. 그만 말하고 우선은….”
“부탁…. 해요.”
그렇게 마지막 한마디를 남긴 후에 아이린 왕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치 태엽이 다한 인형이 동작을 멈추는 것처럼 그녀의 모습에서 생명의 흔적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아…. 아아아아….”
션 페일런은 머리를 감싸고 절망감에 절규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이렇게 잔혹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다면 그때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어야 했다.
여인으로서 가장 고귀한 위치라고 할 수 있는 왕의 여인이 되었지만 그 결과가 이렇게 참혹한 죽음인 줄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막았을 것이다.
그녀의 시신에서 천천히 사라져가는 온기를 느끼며 션 페일런은 절망했다.
그리고 그때 한 무리의 암살자들이 다시 들이닥쳤다.
난입자의 존재로 인해서 암살이 확실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게 되자 예비로 대기 중이던 인물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그들은 눈앞에 있는 기사가 자신들의 일을 망친 변수라는 것을 알고 지체 없이 공격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건 지독한 우행이었다.
분노에 미쳐버린 맹수에게 핏물이 뚝뚝 흐르는 먹잇감을 던져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네놈들이 한 짓이냐?”
션 페일런이 검을 들고 일어섰다.
그런 그의 눈빛에는 섬뜩한 살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그러자 암살자들을 이끄는 리더격의 존재가 말했다.
“공주를 살려둬서는 안 된다. 어차피 기사 한 명일 뿐. 포위해서 처리한다.”
자신들의 숫자는 서른이 넘었다.
아무리 정면 대결에 취약한 암살자들이라고 해도 고작 한 명의 기사라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이들은 몰랐다.
지독한 분노와 좌절, 갈 곳이 없는 분노가 션 페일런의 내면에서 가로막고 있던 벽을 허물었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
“쳐라!”
그 순간 암살자들이 달려들었고 페일런 공작의 검이 빛살을 뿌렸다.
선명한 오러 블레이드.
마스터의 상징이 등장한 것이다.
페일런 공작은 암살자들을 모두 처리하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눈물을 훔치고 있는 어린 레이라 공주였다.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아이린 왕비가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부탁.
그것은 이 어린 공주를 지키라는 것이었다.
어린 레이라 공주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이를 악물고 야무진 표정으로 말했다.
“페일런 경.”
“말씀 하십시오.”
“어머니가 생전에 말씀하셨어요. 무슨 일이 생기면 경에게 기대라. 션 페일런 경은 믿을 수 있는 인물이다. 라고요.”
“…….”
아이란 왕비가 생전에 그런 말을 했던가?
그녀가 자신을 믿어준 것은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아직 어린 자신의 딸에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말을 평소에 남겼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평소 왕실에서 보내는 그녀의 삶이 그만큼 위태롭고 위험했다는 것이다.
그걸 곁에서 지켜보면서도 자신은 몰랐다.
이렇게 무능한 호위 기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자괴감이 가득한 션 페일런에게 레이라 공주가 말했다.
“대답하세요. 경은 나를 지켜 줄 수 있나요? 나의 검이 되어줄 수 있나요?”
아직 어린 소녀였지만 레이라 공주의 모습에는 과거 아이린의 어린 시절이 그대로 보였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아이다운 천진함과 순진함이 전혀 없는 차가운 눈빛이었다.
아직 어린 소녀였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명백하게 위엄이 서려 있었다.
션 페일런은 한쪽 무릎을 꿇고 어린 레이라 공주에게 말했다.
“앞으로 제 검과 제 인생, 저의 모든 것을 공주님에게 바치겠습니다.”
‘그것이 그녀를 지키지 못한 나의 속죄가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션 페일런에게 레이라 공주가 말했다.
“좋아요. 그럼 첫 번째 명령을 내리죠. 나를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왕궁 밖으로 보내줘요.”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오늘의 일을 외부에 밝히지 마요. 어차피 지금은 범인을 밝힌다고 해도 벌할 수 없어요.”
“공주님. 그래서는….”
“나는 왕궁을 떠납니다. 하지만 이건 도피가 아니에요. 나는 복수를 하기 위해서…. 그러기 위한 힘을 손에 넣기 위해서 떠나는 거예요. 경은 그런 나를 도와주기 바라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레이라 공주는 진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범인을 밝힐 수 없다.
설령 밝힌다고 해도 그 범인을 벌할 수 있는 힘도 없다.
그보다 지금은 그저 살아남기도 힘들었다.
우선은 몸을 숨기고 힘을 키워야 한다고 판단을 내리고, 션 페일런에게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이다.
“알겠습니다. 공주님.”
션 페일런은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레이라 공주의 야무진 모습에서 희망을 봤다.
‘반드시 지킬 것이다. 그게 나의 유일한 속죄일 테니.’
그렇게 션 페일런이라는 한 명의 기사가 레이라 공주를 주군으로 섬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충성심은 흔들림 없는 진실이었지만 그 대상은 레이라 여왕이 아니다.
아이린 왕비가 남긴 최후의 유언.
그것이 연결 고리가 되어서 레이라 공주와 페일런 공작의 흔들림 없는 연결 고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 후에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페일런 공작은 레이라 여왕을 섬긴 것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녀가 군주로서 나라를 부흥시키는 것도….
밀턴 포레스트라는 반려를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것도….
모든 것이 페일런 공작에게는 감격이었다.
자신이 지켜주지 못한 여인에 대한 죄책감이 조금이나마 덜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레이라 여왕의 행복과 성공이었다.
‘그걸 가로막는 자가 있다면…. 누구든 간에 용서는 없다.’
과거의 기억에서 현실로 돌아온 페일런 공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폭도들은 어디까지 왔나?”
“이제 가시거리 안에 접근했습니다.”
“그렇군.”
페일런 공작은 직접 진형의 선두로 가서 폭도들을 바라봤다.
넓은 대로를 가득 채운 폭도들은 공화주의 군가를 부르면서 이쪽으로 행진을 하고 있었다.
그 숫자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무장 상태는 형편없었다.
즉, 싸우면 일방적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라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적을 확인한 페일런 공작은 부관에게 말했다.
“전군에 전투 준비를 명령하라.”
“옛!”
“병사들에게도 확실히 전하라. 적은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반군 세력이다. 동정은 필요 없다. 모든 오명과 악명은 나 션 페일런이 책임을 지겠다고 하라.”
“옛! 알겠습니다.”
오늘 이 순간을 기해서 페일런 공작은 기사로서의 긍지를 버리고 민간인, 그것도 자국민을 학살한 대악당이 될 것이다.
하지만 각오는 마쳤다.
이게 레이라 여왕을 위한 것이라면 자신의 명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군….”
페일런 공작이 돌격 명령을 내리려고 하는 그 순간….
“잠깐! 양측 모두 정지하라!”
한 기의 기마가 폭도들과 페일런 공작의 군세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것은 기형적으로 커다란 검은색 흑마를 타고 있는 한 명의 기사였다.
그는 말에서 큰 목소리로 폭도들을 향해서 외쳤다.
“나는 밀턴 포레스트 대공이다. 시위대는 즉시 무력행사를 멈춰라!”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밀턴이 등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