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타일러를 비롯해서 페일런 공작의 회담에 초청되었던 인물들이 모두 급습을 받고 사망했다.
누구에게 공격을 받았는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밝힐 필요도 없었다.
이 상황에서 누구를 의심해야 하는지는 뻔한 것이었다.
누가 봐도 페일런 공작이 함정을 파서 공격한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민중의 분노는 뜨거웠다.
“이런 비열한 짓거리를 하다니?”
“왕국 놈들이 이제야 본색을 드러낸 것이야.”
“이대로 참으면 우리들은 자손 대대로 신분 제도의 노예로 살아야 한다!”
“일어나자! 싸우자!”
“혁명이다! 위대한 공화주의의 정신을 되살리자!”
“공화주의 만세!!”
“공화주의 만세!!”
“공화주의 만세!!”
억눌린 분노가 터져 나오면서 광기에 가까운 분노가 민중들을 지배했다.
이제까지 비교적 온건하게 자기주장을 하던 공화주의자들이 본격적으로 과격한 행동을 펼쳤다.
그들은 무리 지어서 관공서를 공격하고, 몇몇은 군사 시설을 공격해서 무기를 탈취하려는 시도를 했다.
무기를 탈취하는 것 자체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과정에서 군사와 시위대의 충돌이 있었고, 시위대 쪽에 상당한 숫자의 사망자가 생겼다.
그리고 사망자가 생겼다는 소식에 공화주의자들은 더 큰 광기를 보이며 일어났다.
“압제자의 칼날에 굴복하지 마라! 우리들의 신념을 보여주자.”
“공화주의 만세!”
“형제들이여. 미래를 위해서 순교하라!”
“우오오오오오!!”
사상의 광신도.
하나의 신념이 집단화된 인간을 지배하면 그것은 광기를 띠는 법이다.
그 방향성이 옳고 그르고는 둘째치고 확실한 것이 있다면 이럴 때의 민중은 정말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잘못 대처하면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는 것이다.
“공작님,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습니다. 시위대의 규모가 이미 10만에 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정도라면 이미 내부의 불만 세력이 아니라 국가의 적이라고 봐야 합니다. 부디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공작님.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페일런 공작의 통치를 보조하던 관리들은 서둘러서 페일런 공작에게 토벌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페일런 공작은 관리들의 요청을 거부했다.
“이 모든 일은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다. 오해를 풀고 그들을 납득시켜야 한다. 강제 진압은 안 될 말이야.”
“그 오해를 풀 방법이 없습니다. 이미 저들은 적의를 가득 품고 있으며 대화 자체도 거부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입장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야. 어떻게든 오해를 풀어야 해. 그게 우선이다.”
페일런 공작은 어떻게든 무력을 쓰지 않고 사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급보입니다.”
문이 열리고 전령 한 명이 숨을 헐떡이며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불안감이 가득한 페일런 공작의 물음에 전령은 목소리를 가늘게 떨며 말했다.
“폭… 폭도들이 동부대로에 몰려들고 있습니다.”
“동부대로? 거기에는 어찌… 설마?”
동부대로라는 것은 레스터 왕국이 힐데스 공화국을 통합하고 추진한 토목 산업이었다.
서쪽에 항구 도시를 발전시키고, 그 항구 도시로 물류를 집중시키기 위해서 커다란 대로를 뚫은 것이 바로 동부대로였다.
원래 힐데스 공화국 시절에 사용하던 군사 도로를 개조한 것이기 때문에 상당히 빠른 시간 안에 건설할 수 있었던 대로다.
즉, 그 대로를 쭉 따라가면 나오는 것은….
“폭도들이… 서부 연안의 항구 도시를 습격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뭐? 어째서 그런 짓을 한단 말이냐?!”
버럭 소리를 지르는 페일런 공작에게 전령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의 발표에 의하면…. 공화주의를 배신하고 왕국에 빌붙은 배신자들을 응징하겠다고 합니다.”
“이런 개새끼들….”
페일런 공작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사실 이 정도면 많이 참은 것이다.
최근의 사태 전부가 페일런 공작이 생각도 하지 못한 급소를 퍽퍽 때리고 있는 일이었다.
노예상인 건으로 민심을 혼란하게 하고, 회담을 위해서 불렀던 공화주의자들은 정체불명의 세력에 암습 당했다.
거기에 어떻게든 무력 진압을 피하려고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화주의자들은 서쪽의 항구 도시를 공격하겠다고 한다.
최악도 이런 최악이 없었다.
“공작 각하. 서쪽의 항구 도시는··.”
“알고 있다. 무조건 지켜야 하는 곳이지.”
페일런 공작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건 막아야 한다.
무력 진압을 하느냐? 마느냐? 라는 선택지는 이제 없다.
이건 무조건 막아야 하는 일이 된 것이다.
서쪽의 항구 도시의 주민들은 그동안 레스터 왕국에서 막대한 자금을 들여서 경제를 발전시키고, 또 인심을 왕국 쪽으로 돌린 곳이다.
거기를 외면하면 북부에는 레스터 왕국에 우호적인 지역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어 버린다.
무력으로 토벌하는 것에 극구 반대를 했던 페일런 공작이었지만 서부 연안에 있는 항구 도시가 위협 받고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어쩔 수 없다.’
페일런 공작은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군을 준비시켜라. 내가 직접 토벌군을 지휘하겠다.”
“옛!”
결국 페일런 공작은 군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서둘러서 군을 움직인 페일런 공작은 1만의 군대를 이끌고 폭도들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었다.
동부대로를 1만의 군세로 틀어막고 전진해오는 폭도들에 대한 대비를 했다.
“폭도들의 숫자는?”
“20만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또 늘었군.”
“…….”
페일런 공작의 말에 보조를 맡은 관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페일런 공작의 얼굴에 드러난 서글픔을 그대로 느꼈기 때문이다.
‘한평생 갈고닦은 검으로 주군을 지키고 적을 물리치겠다고 다짐했고, 그 맹세를 어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어서 자국의 백성들의 피를 묻혀야 한다는 건가?’
페일런 공작은 야심이 있는 인물이 아니다.
권력에 대한 욕심은 조금도 없는 인물이었고, 이렇게 머리 아픈 상황을 관리하는 것도 그의 성격상 맞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공작위를 반납하고 그냥 일개 야인으로 내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페일런 공작에게는 평생 지켜야 할 맹세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늘에 어렴풋이 드러나 있는 달을 보고 중얼거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살아 있는 한 당신에게 한 맹세는 지켜질 것입니다.”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페일런 공작은 레이라 여왕의 충성스런 신하이다.
라는 것이다.
심지어 밀턴 역시 이렇게 알고 있지만 이건 엄밀히 말해서 틀리다.
페일런 공작은 레이라 여왕의 명이라면 절대 복종할 것이고 목숨도 아끼지 않고 버릴 것이다.
하지만 션 페일런이라는 한 명의 남자가 충성과 순정을 바친 대상은 레이라 여왕이 아니다.
그녀의 어머니인 아이린 왕비가 페일런 공작의 마음을 가져간 유일한 인물이었다.
과거의 얘기를 좀 하자면….
페일런 공작은 원래 그렇게 대단한 가문의 출신도 아니었다.
오히려 몰락한 남작 가문의 후계자로 어지간한 평민보다 훨씬 더 가난한 생활을 했었다.
그런 그를 구해준 것은 슈에일라 백작 가문이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슈에일라 백작이 션 페일런을 수련 기사로 받아들여서 정식으로 기사 교육을 받게 했다.
물론 무상의 호의는 아니었다.
기사로서의 교육을 시켜주고 지원을 해주는 대가로 션 페일런이 성장했을 때는 그가 슈에일라 백작 가문에 충성을 다하는 기사가 되는 것이 서로간의 약속이었다.
일종의 가신으로 키우기 위한 투자를 한 것이다.
그런 속내가 있다고 해도 기사로서 교육 받을 기회가 왔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션 페일런은 슈에일라 백작가에 충성을 맹세하고 열심히 훈련에 매진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었을 때 그는 훌륭한 기사가 되었다.
슈에일라 백작가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성장한 션 페일런에게는 탄탄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그는 슈에일라 백작가에 은혜를 느꼈고 충성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번민은 있었다.
아이린 슈에일라.
백작가의 늦은 외동딸로 태어난 이 귀여운 소녀는 어린 시절부터 활발한 성격과 귀여운 외모로 가문의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았다.
그리고 션 페일런에게도 아이린은 귀여운 동생 같은 아이였다.
적어도 그녀가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서 귀여운 소녀는 아름다움을 품기 시작했다.
그녀의 나이가 열다섯이 되었을 때는 이미 누구나 감탄할 수밖에 없는 미모의 소유자가 되었고 가문에는 혼담이 쏟아졌다.
아직 만개하지도 않고 봉오리만 맺혔을 뿐인데도 그 향기가 주변을 매료시킬 정도로 아이린의 미모는 대단했다.
그 미모는 강직한 기사로 교육받으며 성장한 션 페일런의 마음마저 흔들 정도였다.
그는 자신이 섬기는 가문의 딸에게 사랑을 품게 된 것이다.
스스로의 마음을 자각하고 나서 그는 크게 번민했다.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은혜를 저버리는 행동이라는 것도 알았으며, 무엇보다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노력했고 일부러 아이린 영애의 앞에서는 무뚝뚝하게 행동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그녀는 열여섯이 되어서 사교계에 데뷔했다.
그리고 여러 남자들이 그녀에게 열렬한 구애를 했다.
하지만 설마하니 이 나라의 군주인 국왕마저 그녀에게 손을 뻗을 줄은 몰랐다.
나이 차이가 꽤 났고, 또한 이미 정처가 있는 국왕이었지만 연회장에서 아이린의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한 국왕은 정식으로 청혼을 넣었다.
그게 끝이었다.
국왕이 정식으로 넣은 혼담을 거절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본인의 의사를 철저하게 배제한 상태로 혼담은 진행되었고 아이린은 국왕의 후비로 들어가는 것이 내정되었다.
그녀가 슈에일라 백작가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밤.
션 페일런은 정원에서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그것은 수련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 미련과 번민을 없애기 위해서 자신을 학대시키는 것에 가까웠다.
손아귀가 찢어지고 눈앞이 흐려지도록 검을 휘두른 그는 마침내 쓰러졌다.
“헉…. 헉…. 헉….”
바닥에 쓰러져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그에게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페일런 경.”
아이린의 목소리였다.
션 페일런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그는 무릎을 꿇고 자신의 앞에 나타난 아이린을 바라봤다.
더욱더 아름다워진 그녀는 이제 똑바로 바라보는 것조차 부담스러워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은은하게 내려오는 달빛과 서늘한 밤공기 속에서 그녀는 션 페일런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련 중이었나요?”
“예.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그 짧은 문답 이후로 둘은 할 말이 다 떨어졌는지 침묵에 잠겼다.
그 침묵에 어색함을 느낀 션은 뭐라고 한마디 하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결혼식 축하드립니다.”
그 말에 아이린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렇게 생각하나요?”
“예?”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요?”
아이린의 추궁에 당황한 션 페일런은 당황해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
“예. 왕가의 일원이 되는 것은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영애께서도 훌륭하게 성장하셔서 다행이라고….”
말을 하던 션 페일런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품 안에 아이린이 파고들어서 그를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서는 좋은 향기가 퍼져 나왔다.
땀을 젖어 있는 자신이 닿는 것도 송구할 정도로 좋은 향기가 정신을 아찔하게 했다.
“아…. 아가씨.”
당황한 페일런 공작이 그녀를 내려다 봤을 때 그녀는 촉촉하게 젖어 있는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어떤 감정과 어떤 바람이 담겨져 있는지 젊은 날의 션 페일런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순간 생각했다.
이대로 도망갈까?
품 안에 있는 그녀를 데리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가 버릴까?
기사의 작위도 귀족가의 후원도 필요 없다.
오직 그녀 하나만 있다면….
그렇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은 없을 것 같았다.
션 페일런의 양팔이 위로 올라갔다.
가늘게 떨리는 그녀를 안아주려고 올라간 그 팔은 아쉽게도 주인의 마음을 배신했다.
그는 아이린의 어깨를 잡고 살며시 밀어냈다.
그리고 차마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그녀를 외면했다.
그러자 아이린이 말했다.
“이게 당신의 대답인가요?”
“…….”
“무정한 사람….”
대답 없는 페일런에게 한마디를 남긴 아이린은 그대로 돌아섰다.
션 페일런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러며 그녀를 붙잡으려는 자신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정신 차려라. 나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어.’
그렇게 그는 사랑하는 여인이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