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맞습니다. 지금 즉시 동지들과 함께 힘을 모아서 왕국의 압제에 맞서야 합니다.”
공화주의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을 하는 자들은 하나둘씩 모여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비록 무장이 어설프고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은 민중들이었지만 이런 이들이라고 해도 숫자가 많이 모이면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건 국가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민란이다.
외부에서 단련된 정예 병력 10만이 들어온다면 맞서 싸우면 된다.
하지만 내부에서 10만 규모의 민란이 벌어진다면 그건 무작정 싸워서 해결할 일이 아니었다.
힘으로 억누를 수 있지만 불만 자체를 해소하지 않으면 더 큰 불화를 불러올 뿐이다.
지금 공화국의 부활을 외치고 있는 자들은 대부분 밀턴 포레스트의 악행에 분노와 위기감을 느끼고 일어선 이들이다.
오해를 풀어야 하는 것이 최우선이었지만, 문제는 그럴 방법이 마땅하지 않다는 것이다.
“공작님. 이제 한계입니다.”
“그렇습니다. 더 이상 폭도들을 좌시 할 수는 없습니다.”
“이쯤에서 힘을 보여주지 않으면 질서를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부디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공작님.”
페일런 공작을 보좌하는 관료들은 강제 진압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모았다.
“안 된다. 자국민에게 창과 칼을 들이댈 수는 없다.”
하지만 페일런 공작은 여전히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할 뿐이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주요 시설과 요새를 굳건하게 지키라고 지시를 내리고 강제 진압은 절대 금지라는 명령을 내렸다.
‘어렵군. 정말 어려운 일이야.’
왕궁의 중앙 기사단 출신으로 시작해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후에 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른 적도 있었던 페일런 공작이었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통치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오거스트 국왕은 페일런 공작이 실권을 잡는 것을 경계해서 영지를 내리지도 않았고 그에게 군권을 주지도 않았다.
그저 철저하게 왕국의 수호신으로서 존재하게만 했다.
그리고 레이라 여왕의 즉위 이후로는 왕국의 국경을 든든하게 수호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사실 밀턴이 군을 이끌고 외국에 나가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국내의 방비를 든든하게 해 주는 페일런 공작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군부의 일이지 통치자의 역할은 아니었다.
1차 이념 대립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페일런 공작은 자신의 영지를 받았다.
원래 힐데스 공화국의 영토였던 북부 지역을 통째로 받은 것이다.
영토의 넓이만 놓고 보면 페일런 공작의 영지는 레스터 왕국의 안에서도 가장 넓다고 할 수 있었다.
사실, 이건 필요에 의한 인사였다.
공화국 출신의 국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반감을 덜기 위해서 마스터인 페일런 공작을 앉혀 놓은 것이다.
마스터라는 존재는 왕국이나 공화국을 떠나서 존경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반감이 적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페일런 공작은 그냥 간판으로써 존재하기만 했고, 실무는 레이라 여왕이 직접 파견한 유능한 관리들이 보고 있었다.
결국, 페일런 공작 본인에게는 자신의 영지에서 일어나는 혼란을 진정시킬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다만, 그도 레이라 여왕에게 받은 지시가 있어서 무력으로 민중을 진압한다는 우행은 저지르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무력을 동원하면 지금까지 레이라 여왕이 펼쳐온 유화 정책이 전부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페일런 공작은 고민에 빠졌다.
“힘으로 민중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
“하지만 사태는 이미 심각합니다. 말이 통할 분위기가 아닙니다. 공작님.”
“말이 통하지 않아도… 아! 그래. 바로 그거야.”
페일런 공작의 머릿속에 번뜩이며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왜 말이 통하지 않을까?
그건 대화 자체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해산 명령만 내렸으니 당연히 먹히지 않은 것이다.
‘대화…. 일단 대화를 하자.’
결정을 내린 페일런 공작이 즉시 말했다.
“그들의 대표를 영지로 불러…. 아니 초청하라.”
“예?”
“문제가 있다면 대화를 해야 하는 법. 내가 직접 회담을 하겠다고 전하라.”
페일런 공작의 말에 관리들은 난색을 표했다.
“이번 폭동은 워낙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표라고 해도 누구를 불러야 할지 특정 할 수가 없습니다.”
“맞습니다. 그리고 부른다고 해도 올지 말지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관리들이 난색을 표했지만 페일런 공작은 자기 결정을 밀어붙였다.
“한 명이 안 되면 두 명. 두 명이 아니라면 열 명. 몇 명이든 상관없다. 불만이 있는 자들은 모두 내 앞에 오라고 하라.”
“모두 말입니까?”
“그렇다. 나는 칼이 아니라 대화로서 그들을 맞이하겠다. 그게 여왕 전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길이라고 믿는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페일런 공작이 내놓은 결론이 이것이었다.
일단 만나자.
만나서 얘기를 해서 어떻게든 설득을 해보자.
정치력이 떨어지는 페일런 공작이 고심 끝에 도달한 결론이었다.
그리고 이 결론은 지금 상황에서는 썩 나쁘지 않았다.
우선 성공 유무를 떠나서 회담을 시도하면 일단 시간벌기는 될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벌면 사람들의 분노가 조금 가라앉을 수도 있고, 또 수도에서 방침을 정하고 대응하기까지 여유를 조금 더 벌어줄 수도 있다.
그것만으로도 회담의 가치는 충분한 것이었다.
“어려운 일인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서둘러서 진행하라.”
“예. 알겠습니다.”
페일런 공작의 요구에 밑에 관료들은 서둘러서 움직였다.
폭동을 일으키는 곳에 전령을 보내서 대화를 원한다는 말을 전했고 그들이 원하는 요구를 최대한 긍정적으로 들어주겠다는 의사도 밝혔다.
혹시 의심을 살지도 몰라서 페일런 공작의 가문 인장이 찍힌 서류를 보여 주었다.
회담에 참석하는 자들의 안전을 보장하며 그들의 신병을 일절 구금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적힌 서약서였다.
그 결과 서른세 명의 대표들이 페일런 공작과 만나서 대화를 해보겠다는 대답을 했다.
자신들에게 정의가 있음을 증명하려면 그들로서도 대화를 마냥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 소식을 듣고 페일런 공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로서 시간을 벌었다. 남은 건 전하께서 방법을 강구해 주실 것이다.’
소 뒷걸음질에 쥐 잡은 격이라고 해야 할까?
불만 세력과의 회담 자리를 마련한 것은 페일런 공작의 정치적 능력을 넘어설 정도로 잘한 일이었다.
다만, 문제는 이걸 그냥 두고 보지 않을 인물이 있다는 것이다.
“한평생 칼질만 한 무인치고는 제법이군. 생각이 제법 유연해. 결단력도 있고 말이야.”
데이비드는 페일런 공작이 회담의 자리를 만들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꽤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대로 내버려 두실 겁니까?”
“물론 그럴 수는 없지.”
데이비드의 말에 보조로 따라온 고스트의 분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저희 쪽 인사를 회담에 참여시키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뭘 하게?”
“그들을 이용해서 회담의 분위기를 최악으로 몰아가면 페일런 공작의 의도를 파탄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데이비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답답하게 구는군.”
“예?”
“뭐 하러 그렇게 돌아가지? 훨씬 더 확실한 방법이 있는데 말이야.”
데이비드는 미소를 지으며 고스트 대원에게 말했다.
“정말 그렇게 하는 겁니까?”
깜짝 놀라서 반문하는 고스트 대원에게 데이비드가 말했다.
“물론이지. 왜 싫은가?”
“그건….”
망설이는 고스트 대원에게 데이비드가 말했다.
“자네들이 주군에게 받은 명령은 무엇이지?”
그 한마디에 고스트 대원의 눈빛에서 망설임이 사라졌다..
“주군께서는 데이비드 님의 보좌를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할 대답은?”
“명령을 수행하겠습니다.”
“좋아. 바로 움직이도록.”
“옛!”
빠르게 대답하고 움직이는 고스트 대원을 보며 데이비드는 미소 지었다.
“역시 주군의 이름이 효과가 가장 크군.”
선악의 유무 이전에 지크프리트의 명령을 최우선하도록 세뇌에 가까운 교육을 해 놓았다.
그 철저한 사상 교육이야말로 고스트라는 특수 부대가 이제까지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이유였다.
덕분에 데이비드도 그들을 자신의 의도대로 써먹을 수 있는 것이다.
“난장판을 만들어 주지.”
페일런 공작이 회담의 자리를 만들고 불만 세력을 이끌던 리더격 인물들이 페일런 공작의 영지로 향했다.
타일러 역시 그런 인물 중에 하나였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동료들과 함께 페일런 공작의 영지로 떠났다.
“공작의 영지까지는 얼마나 남았나?”
“이대로 가면 사흘 안에는 도착할 겁니다.”
“사흘이라… 너무 서두르지 말게. 어차피 우리 말고도 많은 이들이 모여야 할 거야.”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타일러는 하늘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동지들이 모이겠군. 혹시 전우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타일러는 원래 힐데스 공화국에서 준위 계급까지 올라갔던 인물이었다.
그 후에 비록 출세가도에서 밀리고 군을 퇴역했지만 나름 공화국 안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인물인 것이다.
그는 레스터 왕국에 편입된 이후에도 꾸준하게 공화주의를 지지했다.
다만, 공화주의를 지지하고 주장하면서도 불법적인 수단은 철저하게 배제했다.
국가 간의 조약으로 주권이 이양된 이상 여기에 무력으로 맞서봐야 폭도로 취급될 뿐이다.
공화주의라는 자신의 정의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타일러는 그렇게 하지 않고 합법적인 수단으로 공화주의를 지지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공화주의를 설파하고, 또 왕국이 가지고 있는 신분 제도의 폐해에 관해서도 계속 설파했다.
레스터 왕국의 입장에서 보면 국가의 체제를 무너트리려고 하는 위험인물이었지만 왕국에서는 일부러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사실 이런 사람이 한두 명도 아니고, 힘으로 찍어 누르면 음성적으로 몸을 숨기고 계속 같은 활동을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드러내서 활동하는 편이 신상을 파악할 수 있어서 낫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법적으로 행동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묵인함으로 인해서 그의 활동을 허락한 것이다.
이런 왕국의 대처 덕분에 타일러는 자신의 의견을 마음껏 설파할 수 있었고 그를 지지하는 자들도 생겼다.
하지만, 왕국에 편입되고 경제 사정이 점점 나아지는 것을 보며 타일러의 내면에서는 약간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북서부 항구 도시의 발전 상황을 접하고 나서는 공화주의에 대한 신념이 조금씩 흔들리기도 했다.
북풍보다는 태양이 잘 먹혔다고 해야 할까?
힘으로 찍어 누르지 않고 경제 발전을 통한 결과를 보여주자 타일러 같은 골수 공화주의자들이 조금씩 먹힌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터진 최근의 노예상인 사태는 타일러의 가슴속에 꺼져가는 공화주의에 대한 불씨를 다시 한번 활활 타오르게 했다.
이게 바로 신분 제도의 폐해다.
같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신분이 다르기 때문에 하위 계급을 향한 착취와 반인륜적인 악행이 허용되는 것이다.
그는 분노했고 사람을 모아서 궐기할 준비도 마쳤다.
이런 시점에서 페일런 공작이 평화롭게 회담을 하고자 하자 타일러는 사양하지 않았다.
‘정의는 나에게 있다.’
자신의 정의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타일러는 페일런 공작을 만나서 정식으로 공화주의를 펼칠 생각이었다.
가능하면 독립, 그게 아니라고 해도 공화주의자들이 살 수 있는 특수 지구를 주장할 생각이었다.
이제까지 레스터 왕국이 보여준 온건한 태도와 이번에 포레스트 대공이 저지른 악행을 생각하면 무리한 요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말은 통하는 상대니까 말이야.’
레스터 왕국이 그동안 펼쳐온 유화 정책 덕분일까?
골수 공화주의자인 타일러조차 레스터 왕국에 대한 신뢰도는 꽤 높은 편이었다.
그런데….
“타일러님. 앞에 누군가 있습니다.”
“누군가 있다니? 뭐가 말인가?”
“그게 잘…. 커억!”
앞에서 일행을 안내하던 동료가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절명했다.
그리고 그걸 시작으로 사방에서는 갑자기 적이 나타나서 타일러와 그 일행을 공격했다.
“공격하라!”
“공화주의자 놈들을 하나도 살려두지 마라!”
복면을 쓰고 나타나서 공격해 오는 적들을 보고 타일러는 깜짝 놀랐다.
“이런…. 설마 함정이었단 말인가?”
레스터 왕국에 대해서 꽤 높은 신뢰도를 가지고 있던 타일러는 망연자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