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0화
사실 레이라 여왕이 임신했을 때 밀턴은 후사가 아들이기를 바랐다.
자신은 딸이든 아들이든 상관없었지만 중요한 것은 후계자에 대한 잡음이 없어야 했기 때문이다.
밀턴과 레이라의 사이에서 나온 아이는 포레스트의 성이 아니라 레스터의 성을 이어 받는다.
즉, 이 나라의 다음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딸보다는 아들이어야 잡음이 적을 것이 분명했다.
이미 레이라라는 여왕이 즉위 중인 레스터 왕국이었지만 그래도 이 시대의 인식은 여왕보다는 왕을 더 선호했다.
실제 이 대륙에 여인으로서 군주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레이라 여왕이 유일하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가능하면 순탄한 후계자 구도를 만들기 위해서 밀턴은 주의를 기울였다.
사전에 약속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레이라 여왕이 가장 먼저 아이를 임신하기 위해서 다른 여인들과의 잠자리는 주기를 계산하며 조심스럽게 관계를 가졌다.
물론 소피아와 바이올렛도 그런 밀턴의 의도를 알았고 또 이해했다.
후사에 정통성을 단단하게 다지기 위해서는 레이라가 먼저 출산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통의 핏줄, 거기다 장남이기까지 하다면 후계자로서 논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고 봐도 좋았다.
그런 밀턴의 의도를 알아서인지 레이라가 가장 먼저 임신을 했고, 이제 그녀가 아들을 낳기만 하면 다음 대에서 후계자 문제는 90퍼센트 이상 해결된 것이라고 생각한 밀턴이었다.
하지만 세상만사가 어디 마음먹은 대로만 된다고 하던가?
레이라 여왕이 낳은 것은 딸이었다.
물론 밀턴은 기뻤다.
너무 기뻐서 엘리자베스를 처음 품에 안았을 때 눈물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했다.
레이라 여왕의 입장에서도 과연 이 천사 같은 딸아이가 환영 받을 존재일까?
내심 아들이 아니라는 것에 실망하지는 않을까?
사전에 몇 번이고 물어보려고 했지만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서 돌아올 대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밀턴의 걱정은 모두 쓸데없는 것이었다.
“이리 주세요.”
힘겨운 출산으로 인해서 땀에 젖어 있는 레이라 여왕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엘리자베스를 받아서 안았다.
그리고 자기 품안에서 꼬물거리는 아이를 향해서 웃으며 말했다.
“어서 오렴.”
그 한마디에 모든 걱정은 눈 녹듯이 녹아 버렸다.
그녀는 진심으로 자기 딸을 사랑하고 있었고, 그것이면 족했다.
왕족으로서의 정통성이나 세간의 평가 따위는 앞으로 어떻게든 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밀턴이 레이라 여왕에게 사석에서 말을 놓기 시작한 것은 말이다.
레이라가 엘리자베스를 품에 안고 있는 저 모습은 밀턴에게 있어서 세상에 다시없을 정도로 소중한 보물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두 명의 여인이 더 들어왔다.
“실례할게요. 베스가 여기 있…. 네요.”
“베스, 엄마가 찾았잖니?”
문이 열리고 들어온 여인들은 소피아와 바이올렛이었다.
둘 다 밀턴의 아내였고 한 식구였기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런데 소피아의 모습은 예전과 조금 달랐다.
조금 펑퍼짐한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행동 자체도 몹시 조심스러웠고, 그녀의 옆에서는 바이올렛이 그녀를 조심스럽게 부축하고 있었다.
그녀의 뱃속에 밀턴의 아이가 자라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소피아를 보고 레이라 여왕이 말했다.
“소피아, 몸도 무거운데 베스가 애 먹였죠?”
“괜찮아요. 조금은 움직여야죠.”
레이라 여왕이 업무를 볼 때 엘리자베스는 주로 다른 두 명의 엄마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사실, 유모가 따로 있고 전담 시녀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소피아와 바이올렛은 직접 엘리자베스를 보살폈다.
사실 왕가의 가족상으로는 꽤 드문 일이었다.
왕가의 가족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며 잠재적 적이기도 하다.
자신의 자식을 왕으로 만들기 위한 여인들의 음모와 정념이 소용돌이 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형제들을 죽여야 한다는 현실에 내몰리며 성장하는 아이들.
가장 존귀한 가문에서 태어나지만 그만큼 치열한 일생을 살아가는 것이 왕족의 비애였다.
그러나 레스터 왕국은 예외다.
우선 소피아와 바이올렛은 원래 권력욕이 거의 없었다.
둘 다 꽤 특이한 여인들이었지만 기본적으로 독한 구석이 없었다.
그리고 이 둘이 레이라 여왕의 존재를 넘본다는 것은 무리였다.
레이라 여왕은 어지간한 여자들은 함부로 들이댈 수도 없는 여인이다.
그녀는 애당초 결혼을 하면서 후계자 구도를 완벽하게 분리했다.
자신이 낳은 아이가 레스터 왕가에 이름을 올리고 소피아나 바이올렛이 낳은 아이는 포레스트 가문에 이름을 올리는 것으로 미리 교통정리를 해 놨다.
거기다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항상 두 여인에게 친절하게 대했기 때문에 여인들의 질투심도 사지 않았다.
오히려 밀턴이 소피아나 바이올렛에게 조금 신경을 덜 쓴다 싶으면 레이라 여왕이 직접 밀턴에게 말을 해서 두 여인이 섭섭하거나 쓸쓸한 감정을 가지지 않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소피아와 바이올렛은 지금의 생활에 몹시 만족했고, 또 행복한 생활을 지켜주고 있는 밀턴과 레이라 여왕에 대한 감사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런 감사는 엘리자베스를 향한 사랑으로 이어졌다.
소피아도 바이올렛도 엘리자베스를 자기 배로 낳은 아기처럼 예뻐하고 귀중하게 여겼다.
얼마나 알뜰살뜰하게 챙기는지 시녀들의 손이 거의 필요 없을 정도였다.
아마 지금도 그녀들이 엘리자베스를 돌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엘리자베스가 엄마를 보고 싶어서 집무실로 향하니 뒤에서 따라온 것일 테고 말이다.
“이제 곧 해산일인가?”
밀턴이 소피아를 향해서 말하자 소피아는 수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예. 아마 곧….”
“아들이 좋아? 아니면 딸이 좋아?”
밀턴의 물음에 소피아는 웃으며 말했다.
“딸이 좋을 것 같아요. 베스에게 귀여운 여동생이 생겨서 자매끼리 사이좋게 지내면….”
소피아는 생각만 해도 황홀하다는 듯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아…. 그건 마치 베로니크 양식의 고대 건축물의 우아함과 토가니아 양식의 저택의 실용성이 합쳐진 것처럼 아름다울 거예요.”
“…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비유가 꽤 마니악하긴 했지만 임신한 와이프에게 지적질 할 정도로 밀턴의 간은 팅팅 붓지 않았다.
“자, 베스, 엄마한테 올까? 바이올렛 엄마하고 맘마 먹어요.”
바이올렛은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뻗었고 엘리자베스는 익숙하다는 듯이 그 손길을 타고 바이올렛의 품안에 넘어갔다.
“아아아…. 귀여운 베스. 누가 세상에서 제일 귀여울까요? 우리 베스가 세상에서 제일 귀엽죠? 그렇죠?”
엘리자베스의 토실토실한 볼에 자기 뺨을 부비는 바이올렛을 보며 밀턴은 생각했다.
‘마법의 거울 답정너 버전?’
어려서부터 가족의 정에 굶주려서 그런지 몰라도 바이올렛은 엘리자베스만 보면 정신을 못 차렸다.
요즘 들어서는 이중인격이 아니라 삼중인격이 아닌가 싶었다.
평소 모드, 전쟁터 모드, 그리고 육아 모드까지 해서 인격이 세 개로 늘어난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가 자신에게 미소 한 번만 지어줘도 자지러지는 바이올렛을 보면 마치 자기가 낳은 딸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
“우리 베스는 어쩜 이렇게 예쁠까요? 응? 말해 보세요. 누구 닮았어요?”
“아마마마….”
“꺄아아! 우리 베스 대답도 해요? 천재네요.”
‘베스가 하는 말의 대부분은 아마마마 아닌가?’
밀턴은 옆에서 한마디 할까 싶었지만 그냥 내버려 두었다.
콩깍지가 저 정도 수준이면 거의 세뇌라고 불러 마땅하다.
어쨌든 오랜만에 가족이 다 모였다.
“잠시 한숨 돌리지.”
밀턴은 그렇게 말하며 가족과 함께 정원으로 나아갔다.
거기서 가벼운 차와 다과를 시켜서 티타임을 가지며 엘리자베스는 푹신한 잔디밭에 내려놓았다.
“아마마마…. 마마마….”
엘리자베스는 자유롭게 풀려나자 잔디밭을 아장아장 누비면서 혼자서도 잘 놀았다.
딸의 귀여운 모습을 보며 밀턴이 말했다.
“참 순하긴 순해.”
그러자 옆에서 레이라 여왕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말했다.
“그러게요. 낯도 안 가리고, 잘 울지도 않고…. 아마 어려서부터 여러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자란 게 좋은 영향을 끼친 것 같아요.”
“그래. 계속 저렇게 자랐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밀턴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졌다.
왕가의 딸로 태어났다고 해도 엘리자베스는 정말 운이 좋은 경우다.
자신을 낳은 어머니는 물론이고 다른 어머니들의 사랑까지 한 몸에 독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밀턴이 불안한 것은 지금의 시대였다.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공화국에는 지크프리트라는 사이코패스(밀턴의 관점)가 살고 있다.
야망에 불타서 어떻게 하면 세상을 정복하고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길까? 같은 시시한 고민을 1년 365일 하고 있는 지크프리트는 밀턴에게 심각한 위협이었다.
솔직히 밀턴은 이제는 이 상황에 안주하고 싶었다.
과거에는 가문의 빚을 갚아야 했기 때문에 전쟁터에도 적극적으로 끼어들었지만 이제는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이제 밀턴은 한 나라의 정점에 도달한 권력을 쥐고 있고, 그 권력에 어울리는 명예와 실력도 갖추고 있다.
또 무엇보다 바로 눈앞에 화목하고 사랑스런 가족이 있다.
이거면 됐다.
충분하다.
밀턴은 이 이상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손을 놓고 있기에는 이웃집에 살고 있는 사이코패스가 너무 불안하지 않은가?
밀턴이 지크프리트의 상태창을 확인했을 때 놈은 정체성 자체가 야심가였다.
놈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놈이 포기하지 않는 이상 이 시대의 혼란도 절대 가라앉지 않을 테고 말이다.
‘아니 백번 양보해서 내가 어찌어찌 억누른다고 해도 그건 내가 살아 있을 동안이 한계이겠지. 내가 죽으면 오히려 그 반동으로 더 큰 충돌이 일어날 거야.’
자식을 낳고 나서 밀턴의 시야는 좀 더 멀리까지 보게 되었다.
이전에는 자신이 평온하고 안온한 삶을 사는 것이 우선이었지만, 이제는 더 멀리 봐서 그런 세상을 후세에 물려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딸인 엘리자베스가 자신처럼 격동의 세계에서 험난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바라지 않게 된 것이다.
“결국, 내 대에서 끝을 봐야 한다는 거겠지?”
“예? 무슨 말이에요?”
밀턴의 혼잣말에 옆에 있던 소피아가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밀턴은 소피아의 뺨에 살짝 키스를 하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엘리자베스뿐만 아니라 지금 소피아의 안에도 자신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
아이의 존재가 이렇게 강한 책임감을 심어줄 줄이야.
부모가 되기 전에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감정이었다.
‘반드시 지켜야 해.’
밀턴이 그렇게 조용한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
시종이 다가와서 조용하게 말했다.
“전하, 북부의 페일런 공작에게서 급보가 날아왔습니다.”
“페일런 공작에게서?”
“예. 그렇습니다.”
밀턴은 레이라 여왕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그러자 레이라 여왕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엘리자베스를 바이올렛에게 맡겼다.
“자리를 옮기죠.”
“음….”
둘은 따로 자리를 옮겼고 전령은 둘에게 말했다.
“북부 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페일런 공작에게서 급보입니다. 북부 지역에서 대규모 민란이 벌어질 조짐이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북부 지역에서의 민란이라…. 그건 항상 있어 왔지 않나?”
레이라 여왕이 북서부의 해안 지역에 자금을 집중시키면서 북부 지역은 갈등이 심화되었다.
사실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서 북부의 여론이 하나로 뭉치지 못하게 한 것이다.
거기다 서쪽에게 자금을 투입해 경제적으로 부흥시키면서 그들이 지역의 주도권을 잡게 했다.
내륙의 광부들이 생산품을 만들어도 서쪽의 항구에서 구입해주지 않으면 돈이 되지 않는 구조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조금씩이지만 서쪽의 항구 지역이 지역의 주도권을 쥐었고, 이제는 북쪽 지역도 거의 안정화되었다고 생각했었다.
작은 민란이 꾸준하게 일어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소규모였고 북부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션 페일런 공작이 알아서 잘 진압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페일런 공작이 보고를 올릴 정도라니?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페일런 공작의 신중함을 알고 있는 레이라 여왕은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것이….”
그리고 전령의 입에서는 그동안 북부에서 일어났던 일을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