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158화 (158/257)

제158화

사실 힐데스 공화국의 멸망 이후 지크프리트는 야인의 신분이었다.

코브르크 공화국에서도 하노버슈 공화국에서도 지크프리트에게 몹시 좋은 조건을 제시했지만 지크프리트는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그저 공화국민의 일인으로 있겠다고 말하며 소속을 애매하게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색깔이 분명하지 않은 지크프리트가 공화국 안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어쩌면 색깔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적이라면 정치적으로 공격해서 이미지를 깎기라도 하겠지만 적이 아닌 이상 함부로 적대할 수 없었다.

덕분에 코브르크 공화국과 하노버슈 공화국이 서로를 정치적으로 공격하며 지저분한 이미지 싸움을 하는 동안에도 지크프리트는 혼자서 고고하게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거기다 확고한 실적이 있었다.

실제 스트라부스 왕국을 쓰러트릴 수 있었던 것이 지크프리트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민중의 지지가 절대적이었고 공화국의 지도층들에게도 지크프리트라는 존재는 상당히 묵직하게 다가왔다.

그런 지크프리트가 나서서 삐거덕거리던 공화국의 동맹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페인하임 총통과 슈하이머 총통은 서로 날카롭게 대립하면서도 지크프리트가 중간에 중재안을 내놓는 것은 무시할 수 없었다.

아직 대륙에 공화국의 가치를 온전하게 전파하지도 못했는데 우리끼리 싸움을 할 때인가? 라는 지크프리트의 명분이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두 나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도 군사적인 측면에 관해서만큼은 절대적인 동맹을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이것을 공화국군 통일화 조약이라고 해서 앞으로 공화국은 설령 나라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공화국간에 무력 충돌을 엄금하고, 공화국의 군대는 오직 하나의 명령 체계에 의해서 움직인다. 라는 것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이때 공화국군의 총사령관에 취임한 것이 바로 지크프리트였다.

결국, 지크프리트는 은근슬쩍 공화국을 하나로 묶으면서 동시에 자신이 가장 강력한 실권인 군사력을 한 손에 거머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이미 페인하임 총통과 슈하이머 총통은 서로 간에 정치적 견제를 거듭한 덕분에 이미지가 걸레짝이 되었고 민중들 사이에서 지크프리트는 영웅을 넘어서 자신들을 이끌어줄 강력한 구심점이라는 여론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밀턴이 가장 경계하고 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군사력을 시작으로 지크프리트는 야금야금 공화국의 실권을 장악해 갔다.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과 사람이 필요한 법이다.

그걸 핑계로 공화국의 세세한 부분까지 지크프리트의 손길이 뻗어갔다.

결국 정신 차리고 났을 때 공화국은 80퍼센트 이상이 지크프리트의 손에 들어온 후였다.

아직 두 명의 총통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존재감으로 보나 실권으로 보나 지크프리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바야흐로 지크프리트가 공화국의 주도권을 잡은 것이다.

밀턴은 그런 공화국의 상황을 보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드디어 저 미친놈이 칼자루를 잡았군. 빌어먹을….]

피할 수 없는 전쟁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공화국이 힘을 키웠다고 하지만 그동안 다른 나라들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은 스트라부스 왕국이라는 방벽이 있어서 그 방벽에 대한 원조만으로 공화국에 대한 대처를 해 왔던 왕국들은 이제 직접적으로 공화국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움직였다.

사실, 다른 걸 다 떠나서 스트라부스 왕국의 멸망은 대륙의 왕국들에게 있어서 엄청난 뉴스였다.

가장 넓은 국경을 마주하게 된 발랑스 왕국을 포함해서 여러 왕국들이 군비 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구심점이 있었다.

그게 바로 앤드루스 제국이었다.

이제까지 앤드루스 제국은 공화국에 대해서 미온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그건 국가간의 거리가 먼 것도 이유였지만 그 이전에 제국은 자신들이 함부로 움직이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앤드루스 제국은 이 대륙의 최강대국이다.

비록 과거에 스트라부스 왕국이 군사력만 놓고 보면 제국의 바로 다음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제국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스트라부스 왕국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제국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제국이 부동의 자세로 일관하는 이유는 반은 여유였고, 반은 오만함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제후국에게 지시를 내리면 어지간한 문제는 거의 다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공화국이 스트라부스 왕국을 무너트리고 그 세력을 크게 넓혔다.

앤드루스 제국의 충실한 제후국인 발랑스 왕국은 나날이 불안함에 떨면서 공화국의 위협에 관해서 떠들고 있었다.

슬슬 제국의 안목에 공화국이 거슬리기 시작한 것이다.

때마침 제국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현 황제가 고령으로 죽음을 맞이했는데 다음 황자를 미처 지목하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뭐가 어떻게 될지는 뻔하다.

다음 대 황제를 노리고 황자들의 난이 벌어진 것이다.

내전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황궁의 안에서는 꽤 많은 피가 흘렀다.

골육상쟁의 아비규환 속에서 결국 한 명의 젊은 남자가 승리했다.

혈육의 피로 젖은 옥좌에 앉은 그 남자의 이름은 길버트 테레 앤드루스.

아직 30세의 나이로 제국의 황제에 오른 젊은 제왕이었다.

그는 꽤 노골적인 수단으로 형제들을 처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몇 명은 독살이나 암습으로 처리했지만 개중에는 적당한 명분을 만들어서 공개적으로 처리한 형제들도 있었다.

잔혹하고 냉정하게 경쟁자를 다 처리한 그에게는 지지자도 많지만 적도 많았다.

자신의 형제를 지지하던 귀족들이라고 해도 그들을 모두 처리할 수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내부의 불만을 줄이기 위해서 외부에 적을 만드는 것은 꽤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그런 황제에게 있어서 공화국은 딱 좋은 상대였을지도 모른다.

[이 대륙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전쟁을 반복하는 공화국을 징벌해야 할 것이다.]

라는 황제의 칙명이 떨어졌다.

그러자 석상처럼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던 제국이 마침내 움직였다.

제후국의 병력을 모아서 공화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공화국도 여기에 가만히 있지 않았다.

[설령 제국이라고 해도 두렵지 않다. 영원한 낙원을 건설하는 그날까지 우리들 한 명 한 명이 초석이 되어 미래를 향해 투쟁할 것이다.]

라는 지크프리트의 공문이 공화국의 방방곡곡에 붙었다.

지난 3년 동안 착실하게 준비를 한 지크프리트는 제국과의 전쟁에서도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태도를 고수한 것이다.

1차 이념 대립 전쟁이 끝나고 10년도 되지 않아서 다시 한번 전운이 대륙을 감돌았다.

하지만 두 세력이 바로 격돌하지 못한 것은 제3의 세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레스터 왕국이었다.

이전의 전쟁에서 힐데스 공화국을 무너트리고 스트라부스 왕국의 서부 지역을 날름 집어삼킨 레스터 왕국은 이제 무시하지 못할 북부의 강대국이다.

심지어 포레스트 대공이 플로렌스 공국과의 국혼을 진행하면서 그 나라와 군사적 동맹까지 맺었다.

플로렌스 공국에서 병력을 최대한 쥐어짜봐야 3만이나 나올지 의문이었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결정적으로 단독으로 움직이지 않고 다른 나라가 동참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국제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은 전혀 달라진다.

같은 목소리라고 해도 혼자 외치는 것과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거기다 레스터 왕국 자체의 병력이 굉장해졌다.

과거 스트라부스 왕국의 땅이었던 동부 지역은 지난 3년 동안 성벽을 보수하고 군사를 증강시키며 완벽하게 국경을 막아내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과거 코브르크 공화국의 방어 라인을 연상하게 하는 그 방어 라인을 총 지휘하는 것은 무려 션 페일런 공작이었다.

과거 힐데스 공화국을 멸망으로 몰아넣었던 페일런 공작의 존재는 공화국으로서도 무시할 수 없었다.

거기다 이제 국내의 여론 자체도 완벽하게 장악했다.

원래 지크프리트는 여유가 되는 대로 과거 힐데스 공화국의 영토, 그러니까 지금의 레스터 왕국의 북부 지대를 선동시킬 생각이었다.

본래 공화국의 국민이었던 북부의 시민들이라면 왕궁에 녹아들지 못하고 반발할 테니 약간의 부채질만 해 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지크프리트가 미처 손을 쓸 겨를도 없이 레스터 왕국은 북부를 완벽하게 포용했다.

처음에는 서쪽의 해안 지역에 항구를 만들어서 점점 발전시키더니 그 항구 도시를 거점으로 해서 북부 지역 전체의 인심을 장악했다.

사실 일반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공화주의도 아니고 왕권주의도 아니었다.

지금 당장 잘 먹고 잘 사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북부 지역은 과거 힐데스 공화국일 때보다 확연하게 삶의 질이 올라갔다.

식량을 비싸게 외국에서 수입해 올 것 없이 자국의 것으로 대체할 수 있으니 식량 가격이 내렸다.

그리고 상업이 발전하면서 생필품 가격 전반이 하락했고 물가가 안정되었다.

과거 힐데스 공화국의 깃발 아래에 살 때는 툭하면 징발이다 뭐다 하면서 물자를 뜯어갔던 것에 비하면 확실히 살기 좋아졌음을 모두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물론 골수까지 공화주의에 감화된 자들은 아직도 있었지만 그들은 소수파로 전락해 버렸다.

이제 와서 ‘이 대륙에 공화주의를 퍼트려 낙원을 건설하자’ 같은 소리를 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퇴물 취급을 받았다.

덕분에 지크프리트는 북부를 흔들 엄두를 내지도 못했고, 레스터 왕국은 무럭무럭 성장했다.

현재 레스터 왕국은 단일 병력으로 20만에 달하는 정예 병력을 가지게 되었다.

공화국과 제국의 대립 속에서 제3의 세력으로 존재하기에는 충분한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당연히 공화국과 제국 양쪽 모두가 레스터 왕국에 전령을 보내서 손을 썼다.

공화국은 아직 레스터 왕국과의 평화 조약에 대한 기간이 남았으니 절대 나서지 말라는 요구를 했고, 제국으로서는 공화국의 뒤를 쳐서 자신들과 함께 합공을 하라는 요구를 했다.

제국으로서는 일대일로 싸운다고 해도 공화국을 이긴다는 자신이 있었지만, 그래도 전쟁은 게임이 아닌 법.

보다 쉽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런 양쪽의 제시에 레스터 왕국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실 레이라 여왕도 그리고 밀턴도 알고 있었다.

어느 쪽이 되었던 자신들이 대답을 하는 순간 이 전쟁은 바로 시작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며 전쟁을 미루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결국 미루는 것일 뿐.

어차피 전쟁은 벌어지게 되어 있었다.

***

“적어도, 개발 중이던 군사 프로젝트가 모두 끝난 다음에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밀턴은 집무실에서 한숨을 내쉬며 보고서를 살폈다.

밀정이 가져온 보고서에는 제국이 주도하는 연합국과 공화국군의 사이에 크고 작은 마찰이 시작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지금은 소규모 국지전일 뿐이지만 사소한 계기만 있다면 언제든지 큰 전쟁으로 번질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 눈에 뻔히 보였다.

그런 밀턴의 앞에 레이라 여왕이 역시 서류를 살펴보며 말했다.

“당신이 말한 군사 프로젝트는 너무 허황된 것이 많아요.”

“허황이라니 너무하는데?”

레이라 여왕을 대하는 밀턴의 말투는 3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는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가며 했지만 이제는 편하게 평대로 대하고 있었다.

물론 공식 석상에서는 존대를 해 주었지만 그래도 평소에는 그저 평범하게 아내를 대하듯이 편하게 말하고 있었다.

사실 이건 레이라 여왕이 밀턴에게 일부러 말한 것이다.

다른 두 여인과 달리 자신에게만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 가며 하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해서 말이다.

그 후로 공식 석상이 아닌 곳에서는 허물없이 대화를 하게 되었다.

“정말요? 병사가 들고 다니며 근거리부터 장거리까지 모두 공격할 수 있는 투사 무기? 이런 게 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레이라 여왕의 핀잔에 밀턴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총이라고 하는 거야. 뭐, 실패했지만 말이야.”

밀턴은 지난 세월 동안 현대의 병기를 만들려는 시도를 했다.

원래 포레스트 영지의 영주였던 시절부터 생각은 했던 것이다.

현대의 병기를 만들면 이 세계에서는 분명 강력한 무기가 된다.

하지만,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강력한 정도가 아니라 대학살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그런 문명의 치트키 같은 존재는 사용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자제했었다.

하지만 이전의 1차 이념 대립 전쟁에서 느낀 게 있었다.

어차피 이 시대는 피가 흐를 수밖에 없다.

현대 병기가 있고 없고 간에 인구의 반 이상이 죽어 나가고도 남을 정도로 큰 전쟁이 벌어질 게 눈에 뻔히 보였다.

그래서 눈을 딱 감고 현대 병기를 개발하려고 했었다.

여차하면 기사라는 계급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진행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다.

총기에 대해서 대략의 지식은 들어 있었지만 그 대략의 지식으로 만들 수 있을 만큼 총화기는 단순하지 않았다.

탄환을 발사하는 데 사용하는 화약부터가 문제였고, 밀턴이 알고 있는 가장 똑똑한 여자인 비앙카 역시 난색을 표했다.

결국 나온 결론이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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