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157화 (157/257)

제157화

밀턴의 말에 로렌스 공왕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리 플로렌스 공국은 수백 년 동안 전쟁 없이 나라를 지켜왔소.”

“호오…. 그랬소? 그럴 수 있었던 비결이 뭐였소?”

“그거야…. 주변국과의 원활한 외교 관계를 만들고 나라 안으로는 백성들을 잘 보살폈기 때문이지요.”

멍멍멍멍멍.

로렌스 공왕의 말이 밀턴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개소리 퍼레이드 하고 있네.’

원활한 외교 관계?

그냥 플로렌스 공국이 워낙 약소국이다 보니 뭐 하나 뜯어먹을 것도 없어서 방치되었을 뿐이다.

백성들을 잘 보살펴?

밀턴이 오면서 이 나라의 식량 사정을 보고 올해 흉년이라도 들은 줄 알았다.

알고 보니 풍년까지는 아니라도 평년작 정도는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길거리에는 구걸을 하는 어린애들이 보였고, 멀쩡한 백성들이 세금을 피해서 도적이 된다고 했다.

가난이 사람을 악당으로 만든다고 하던가?

플로렌스 공국의 도적 발생률은 대륙에서도 독보적이다.

괜히 바이올렛 공주가 기사단을 이끌고 도적들을 상대로 무수한 실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평균적으로 보면 약소국일수록 오히려 기득권의 독점이 강한 경향이 있다고 한다.

밀턴이 보기에 플로렌스 공국은 그 전형 중에 하나인 국가였다.

이런 나라에 돈을 투자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로렌스 공왕, 이제까지 플로렌스 공국이 전화에 휩싸이지 않은 것은 플로렌스 공국이 공화국과 국경을 마주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안 그렇소?”

“아니 그건….”

로렌스 공왕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말하려고 하니 그렇게 주장할 근거가 빈약했다.

이제까지 플로렌스 공국이 전쟁에 휩쓸리지 않은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맞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바꿔서 생각하니 이제는 상황이 달라지기도 했다.

스트라부스 왕국이 무너지고 그 땅에 공화국이 들어왔다.

이제 공화국군의 위협은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라 코앞에 내밀어진 칼날이나 다름없던 것이다.

‘내가 경솔했구나. 이제부터라도 군사력의 강화에 만전을 기해야 하는 건가?’

그러자면 역시 자금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로렌스 공왕이 밀턴에게 말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오. 확실히 공화국이라는 존재는 위협적인데. 잠시 그걸 잊어버린 듯하오.”

“잊어… 버릴 만한 일이긴 하죠.”

밀턴은 순간 ‘잊어버릴 게 따로 있지 그걸 잊냐?’라고 말 할 뻔했지만 급하게 말의 궤도를 수정했다.

‘이 인간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답이 없군.’

밀턴은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 이 시대는 전란의 시대요. 힘이 없으면 바로 잡아먹히는 시대란 말이오.”

“하지만 공화국과는 휴전을 하지 않았소?”

“그건 일시적인 숨고르기에 불과하오. 공화국이 진정 전쟁을 그만둘 것이라고 생각하오?”

“…….”

로렌스 공왕의 얼굴에는 강한 불안감이 드러났다.

사실 그는 그런 문제에 관해서 그렇게 깊게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공화국과의 전쟁이라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너무 먼 일이었고, 또 막상 생각한다고 해도 감당하기도 힘들었다.

그의 경력과 군주로서의 그릇은 온전하게 플로렌스 공국의 안에서만 한정되어 있었다.

만약 공화국이 쳐들어온다면 어떻게 할까?

생각도 해본 적 없다.

당연히 대응책도 없다.

위험천만한 현실을 깨닫고 나자 로렌스 공왕은 손바닥이 축축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밀턴은 그런 로렌스 공왕의 심정을 뻔히 알고 말을 이어갔다.

“제가 제시할 조건은 양국 간의 상호 방위 동맹입니다.”

“방위 동맹?”

“예. 우리나라의 군을 파견시켜 드리죠. 물론 주둔 지역을 할양 받고, 방위를 위한 협조금도 조금 받아야 하겠지만, 그래도 공화국의 위협에서 귀국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밀턴의 말에 로렌스 공왕은 귀가 솔깃해졌다.

어차피 자신은 공화국의 위협에서 나라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 다른 이가 대신 해주겠다고 하니 반가운 마음부터 드는 것은 당연했다.

“동의하십니까?”

밀턴의 말에 로렌스 공왕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주둔군을 받아들이면서 우리가 협조금을 지불해야 하는 것은 조금 저어되오.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가난한 나라요.”

“으음…. 그건 그렇죠.”

로렌스 공왕의 말에 밀턴은 고심하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죠.”

“무엇을 말이오?”

“일종의 조차지(租借地)를 만드는 거요. 국경 지역에 대한 방위를 우리가 맡는 대신 그 지역의 행정권을 우리에게 일임한다면 우리가 알아서 나라를 지켜 드리죠.”

“어…. 그건 그….”

한마디로 땅을 빌려 달라는 말이었다.

아무리 로렌스 공왕이 무능하다고 해도 얘기가 여기까지 오자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뭔가 이건 아닌데? 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밀턴이 한마디를 추가했다.

“참고로 말하는데, 원래 이 방위 조약은 우리나라와 발랑스 왕국, 그리고 앤드루스 제국을 포함해서 3자 동맹으로 진행될 예정이었소.”

“잠깐, 어째서 우리나라가 빠졌단 말이오.”

“그거야 뭐….”

밀턴은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표정으로는 ‘지금 몰라서 묻는 거냐?’라는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연히 로렌스 공왕도 이유는 알고 있었다.

레스터 왕국, 발랑스 왕국, 그리고 앤드루스 제국까지.

이 3국이 힘을 합쳐서 방위 조약을 맺는다면 거기에 플로렌스 공국이 굳이 끼어야 할까?

지정학적으로 레스터 왕국과 발랑스 왕국의 가교 역할을 할 수야 있겠지만 그 이상의 가치는 없었다.

그만큼 약한 나라인 것이다.

왜 무시당했냐고?

원래 어른들이 카드 치는 판에 꼬맹이가 코 묻은 돈으로 끼어드는 것만큼 웃긴 일도 없다.

말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밀턴의 표정에는 노골적으로 주제를 알아라는 식의 경멸이 숨겨져 있었다.

“어쨌든, 우리로서는 굳이 플로렌스 공국이 끼지 않아도 상관은 없소. 그 부분은 공왕께서 직접 판단하시기 바라오.”

밀턴은 거기까지 말하고 로렌스 공왕에게 패를 넘겼다.

사실상 모든 선택지를 다 막아 놓고 말이다.

‘내 마누라지만 정말 똑똑하단 말이야.’

밀턴은 제갈량의 지혜 주머니를 받은 기분이었다.

사실 밀턴에게는 제갈량보다 레이라가 더 좋았다.

왜냐하면 유비와 제갈량의 사이에서는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일들을 밀턴과 레이라는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로렌스 공왕은 밀턴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플로렌스 공국과 공화국의 국경이 마주한 지역을 떼어서 레스터 왕국에 조차지로 주기로 한 것이다.

레스터 왕국은 그 땅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지켜주는 대신 그 땅에 대한 온전한 통제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을 쉴드 조약이라고 해서 레스터 왕국이 플로렌스 공국을 지켜주기 위한 명분으로 공표된 조약이었다.

참고로 훗날 공화국에서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지크프리트는 짧게 한마디를 했다고 한다.

[플로렌스 공국의 공왕은 저능아였나?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가 먼저 손을 쓸걸 그랬군.]

그만큼 멍청한 짓이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로렌스 공왕을 한마디 변호해 주자면….

원래 레이라 여왕의 마수, 아니 요수에 걸린 사람들은 대부분이 멍청해지기 마련이다.

“돌아왔어요.”

플로렌스 공국에서의 일을 모두 처리한 밀턴은 레스터 왕국으로 돌아왔다.

당연히 그런 그를 반겨준 것은 레이라 여왕과 소피아였다.

두 아내를 한 번씩 끌어안아 준 다음 밀턴은 그녀들에게 말했다.

“새롭게 소개해야 할까요? 일단…. 두 사람도 알고는 있을 텐데?”

밀턴의 말에 레이라 여왕과 소피아는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환영해요. 바이올렛.”

“앞으로 잘 지내봐요.”

그녀들이 반갑게 맞이해주자 바이올렛 공주 역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세 사람은 서로 인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고, 밀턴은 레이라에게 플로렌스 공국에서의 일을 보고했다.

“잘했어요. 이로써 남쪽으로 가는 교통로를 확보했네요.”

“거의 공짜로 말이죠.”

“어머, 나를 나쁜 여자로 만들지 말아 줄래요? 저는 어디까지나 공화국의 팽창을 막기 위해서 플로렌스 공국의 국경을 막아준 것뿐이거든요.”

“일단 그렇긴 하죠.”

비록 그 군대의 대부분이 플로렌스 공국의 현지에서 징집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바이올렛 공주를 따라나섰던 원정군의 기사단과 병사들.

그들 대부분이 국경 지대의 방비에 동원되었다.

특히 기사들은 원래 플로렌스 공국 출신이었지만 이번에 대규모 강등을 당하며 기사직 자체를 반납했다.

레이라 여왕은 그들을 레스터 왕국의 기사로 받아들여서 플로렌스 공국의 국경 지대에 배치시켰다.

거기다 추가로 징집된 병사 역시 조차지에서 징발했기 때문에 레스터 왕국의 병력 손실은 거의 없었다.

즉, 레이라 여왕이 한 일은 플로렌스 공국의 기사와 플로렌스 공국의 병사들로 그 나라의 국경을 지켜주며 조차지를 얻어내고, 남쪽으로 향하는 육상 교통로를 확보한 것이다.

거기다 덤으로 조차지를 얻어내면서 그 기간도 제대로 정하지 않았다.

조약에는 공화국의 위협으로부터 플로렌스 공국을 지키기 위해서 이하의 토지를 조차지로서 임대한다.

라고 적혀 있을 뿐이다.

조차지에 대한 권리가 언제까지 유효한지는 적혀 있지도 않았다.

공화국의 위협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기 때문에 애매하기 기간을 설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무서운 마누라.’

밀턴은 새삼스럽지만 자기 마누라 엉덩이에 꼬리가 달려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예전과 달리 자신이 직접 확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가끔은 의심스러웠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아니 뭐, 그냥 예뻐서요.”

“흐음….”

레이라 여왕은 의심스럽다는 듯이 밀턴을 바라봤다.

물증은 없었지만 뭔가 꺼림칙했다.

‘나중에 추궁해야지.’

어쨌든 지금은 봐주기로 했다.

다른 여자들도 있는 곳에서 가장이 되는 밀턴의 체면을 구길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한 달 후.

밀턴은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바이올렛 공주와 결혼식을 올렸다.

아직 레이라 여왕과 소피아와의 결혼식이 끝나고 1년도 되지 않았는데 또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이상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국익에 연관된 국혼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했다.

그리고 이런 국익을 위해서 관대하게 이 결혼을 허락한 레이라 여왕에 대한 민중의 신뢰도가 다시 한번 상승했다.

거기다 상대적으로 밀턴의 지지도는 조금 내려갔는데 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자기 혼자 아름다운 여인을 세 명이나 독점했다는 지당한 이유 때문이었다.

밀턴 본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아내들과의 알콩달콩한 신혼 생활에 빠져 지내고 있었지만 말이다.

평화란 전쟁을 위한 준비 기간일 뿐이다.

인간의 본성에 관해서 냉소를 하며 남긴 어떤 철학자의 말은 진실을 담고 있었다.

1차 이념 대립 전쟁 이후 3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공화국과 왕국 간에는 어떠한 분쟁도 없었고 대륙에는 평화가 찾아온 것처럼 보였다.

언뜻 보기에는 말이다.

하지만, 공화국도 왕국들도 지난 3년 동안 칼을 거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칼을 보다 날카롭게 벼리는 것에 집중했을 뿐이다.

지난 3년 동안 대륙의 구도는 무척 크게 변했다.

우선 공화국.

힐데스 공화국이 1차 이념 대립 전쟁에서 사라지고 남은 것은 코브르크 공화국과 하노버슈 공화국이었다.

다만, 이 두 나라는 더 이상 예전처럼 견고한 동맹을 자랑하지 못했다.

이유는 전쟁 이후의 이득 분배 때문이었다.

스트라부스 왕국을 무너트린 전쟁에서 공화국에 떨어진 이득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비록 마지막에 레스터 왕국에게 서부 지역을 한 뭉텅이 빼앗기기는 했지만 그래도 스트라부스 왕국이라는 강대국을 온전하게 집어삼켰으니 그 이득이 오죽하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커다란 먹잇감이 있다 보니 같은 공화국 안에서도 의견이 날카롭게 대립했다.

하노버슈 공화국과 코브르크 공화국은 자국의 이익을 더 늘리기 위해서 날카롭게 대립했고, 이윽고 동맹이 파탄 날 위기까지 처했다.

다만, 그때 사태를 진정시킨 것은 공화국군 총사령관이라는 직책을 달고 있던 지크프리트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