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뭐…. 뭐야?”
“지금 청혼한 거야? 그것도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세상에… 대공이 무릎을 꿇었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거야?”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밀턴이 한 행동은 지구에서 흔히 말하는 프로포즈다.
이미 마누라가 둘이나 있는 놈이 다른 세 번째 여자한테 프로포즈를 했다는 시점에서 죽일 놈이지만 그건 일단 넘어가고….
이 세계에서는 프로포즈라는 문화 자체가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평민의 연인들 사이에서 결혼을 하자고 먼저 말하는 쪽이 대부분 남자들이긴 했지만 그건 꽤 다르다.
평민이라고 해도 결혼을 하고자 하는 의향은 본인에게 표현하는 게 아니라 상대의 부모에게 표현하는 것이 이 세계의 상식이고 올바른 예절이었다.
귀족들의 경우 더하다.
결혼이라는 것은 가문과 가문의 결합으로 그 주도권은 당사자가 아니라 가문의 가주가 가지고 있었다.
가주가 결혼을 하라고 하면 서로 간에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그대로 진행되는 것이 결혼이다.
물론 약혼을 하고 결혼까지 텀을 두고 그사이에 교제 비슷한 것을 하는 경우는 있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남자가, 그것도 신분이 높은 남자가 여자에게 무릎을 꿇고 결혼을 해달라고 애원하는 듯한 이런 행위는 실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 파격적인 행위를 직접 목격한 여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생각했다.
‘부럽다. 얼마나 좋아하면….’
‘나도 저렇게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을 텐데?’
‘멀리 레스터 왕국에서 직접 여기까지 찾아와서 결혼식에 난입하고 청혼까지…. 아아….’
이 결혼이 시작될 때만 해도 바이올렛 공주는 조롱과 동정의 대상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이제는 단숨에 선망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강대국에서 대공의 직위까지 오른 남자가 그녀를 너무 애타게 사랑해서 이렇게 결혼식에 난입하고 공개적으로 청혼까지 했다.
라는 인식이 그녀에게 모든 부러움을 쏟아지게 했다.
그리고 바이올렛 공주는 그런 부러움의 시선 속에서 수줍게 대답했다.
“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밀턴의 손에 들려 있는 꽃을 소중하게 받았다.
원래 그녀의 손에 있던 부케는 걸레짝이 되어서 바닥에 떨어졌다.
“이건 무효다! 이건 횡포야!”
그 과정을 보고 워드 톨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밀턴이 손을 들어 올리자 한쪽에 대기 중이던 기사들이 조용히 그를 연행했다.
“잠시 이쪽으로 가시죠.”
“이거 놔.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줄…. 으음!”
가는 길에도 진상을 부렸던 워드 톨이었지만 입이 막힌 상태로 비참하게 끌려갈 뿐이었다.
그리고 밀턴은 바이올렛 공주의 허리를 끌어당겨 자기 옆에 두고 로렌스 공왕에게 말했다.
“보다시피, 이런 형태로 책임을 질 생각입니다. 뭔가 아직 더 불만이 있습니까?”
“…없소.”
로렌스 공왕은 태도를 바꿔서 순순히 대답했다. 그리고는 오히려 한발 더 나아갔다.
“오히려 환영하는 바이오. 대공의 마음이 진작 이런 줄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그랬구려.”
로렌스 공왕의 돌변한 태도에 밀턴이 오히려 기가 찰 정도였다.
‘이 인간, 진짜 자기 딸을 비싸게 팔아야 할 매물 정도로밖에 안 보는 건가?’
발랑스 왕국의 후작가에 파는 것보다 레스터 왕국의 대공에게 파는 것이 훨씬 더 비싸게 팔 수 있다.
라는 생각이 표정에서 훤하게 보였다.
“그럼 로렌스 공왕께서는 반대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물론이오. 그럼 정식으로 약혼 날짜를 잡아 봅시다. 그리고 차후 의논해야 할 일도 있을 테고…. 허허허…. 당분간 바쁘겠군.”
아마 최대한 많은 돈을 뜯어내기 위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국혼이라는 것을 쉽게 진행할 수는 없죠.”
하지만 로렌스 공왕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결혼의 절차와 계획에 관해서는 제 아내와 정식으로 의논을 해 보기 바랍니다.”
레스터 왕국의 여왕은 요물이다.
절대 헛돈을 쓰지 않을 요물 말이다.
로렌스 공왕이 원하는 대로 거액의 결혼 자금을 뜯어내는 것을 결코 불가능할 것이다.
로렌스 공왕의 허락을 얻은 밀턴은 서둘러서 바이올렛 공주와의 국혼을 추진했다.
서두르는 이유는 별것 없었다.
그녀를 더 이상 이 나라에 놔두기 싫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약혼식을 생략하고 바로 결혼식을 진행하겠다는 밀턴의 의지에 로렌스 공왕은 난색을 표했다.
자기 딸의 결혼식을 그렇게 소홀하게 할 수 없다는 이유였지만 누가 봐도 그건 핑계였다.
밀턴이 그렇다면 워드 톨과의 결혼식은 어째서 그렇게 빠르게 진행했냐고 따지자 로렌스 공왕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결혼식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밀턴은 바이올렛 공주의 어머니인 제인 7왕비까지 구해냈다.
그녀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갑자기) 그녀를 레스터 왕국(굳이)에서 요양하는 것이 좋겠다는 명분을 들이댔다.
당연히 로렌스 공왕은 내켜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밀턴이 작정하고 밀어붙이면 로렌스 공왕의 거부권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빌어먹을…. 지참금은 아주 제대로 뜯어내 주마.’
로렌스 공왕은 이를 악물고 속으로 다짐했다.
사실 지참금은 신부 쪽에서 지불하는 것이었지만 그건 알 바 아니었다.
밀턴은 바이올렛 공주의 후궁에서 그녀의 어머니인 제인 7왕비와 함께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머, 그럼 전쟁터에서 이미 내 딸이 마음에 들었다는 건가요?”
“예. 그녀 덕분에 목숨을 구한 적도 있었으니까요.”
“어머나….”
제인 7왕비를 대하는 밀턴의 태도는 로렌스 공왕을 대할 때와는 달랐다.
적어도 그녀는 진짜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피만 섞였을 뿐, 실제로 남보다 못한 로렌스 공왕과는 다르게 대우해야 했다.
“우리나라에 오시면 따로 별궁을 지어 드리겠습니다. 혹시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밀턴의 말에 제인 7왕비는 안도감과 행복감이 뒤섞인 미소를 지었다.
왕궁의 시녀에서 왕비의 자리까지 올라갔지만 그녀를 진정으로 인정해 주고 대우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왕족은 물론이고 왕궁의 시녀들 역시 뒤에서 그녀를 험담하기 일쑤였으니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런데 밀턴은 그녀를 진심으로 예우해주고 있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그녀가 아내가 될 바이올렛의 어머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정중한 대우를 해 주는 것이다.
그게 그녀는 기뻤다.
자신이 좋은 대접을 받는 것보다 자신이 이런 대접을 받을 정도로 밀턴이 딸에게 푹 빠져 있다는 것이 좋았다.
결혼을 해도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면 얼마나 슬프고 서러운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결혼 전에 딸을 도망시키려고 하지도 않았는가?
하지만 이제 보니 딸은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 것 같았다.
그녀는 그게 가장 기쁜 것이다.
“정말 고마워요. 그저 내 딸과 잘 지내주는 것만으로도 정말 고마울 뿐이랍니다.”
“그건 당연한 것이죠.”
“하지만 괜찮나요? 아마 전하께서는 이 결혼의 대가로 귀국에 무리한 요구를 하지는 않을지….”
그녀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하자 밀턴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인가요?”
“예. 조금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밀턴은 웃으면서 장담했다.
‘이런 일까지 내가 직접 처리해야 하다니?’
레이라 여왕은 전령이 가져온 편지를 읽고 한숨을 내쉬었다.
요약을 하자면….
결혼식은 깽판을 놨다.
바이올렛 공주와 결혼도 할 것 같다.
그런데 로렌스 공왕이 찌질하게 돈 달라고 징징거리고 있으니 그 부분은 맡긴다.
라는 것이었다.
‘확 이혼해 버릴까 보다.’
아직 신혼인데 벌써 다른 아내를 또 만들다니?
비록 바이올렛 공주를 그렇게 연결해 준 것이 레이라 여왕 본인이라고 해도 밀턴의 당당한 태도가 어딘지 모르게 괘씸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했던가?
이쯤에서 초반에 남편의 버릇을 잡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레이라 여왕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일단 먼저 버릇을 잡아야 할 것은 로렌스 공왕이었다.
“플로렌스 공국이라…. 남쪽으로 진출하기에는 필연적으로 지나야 하는 곳이지.”
지정학적으로 봤을 때 레스터 왕국이 남쪽으로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플로렌스 공국은 필수적으로 지나가야 할 땅이었다.
그래서 레이라 여왕도 바이올렛 공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정치적인 판단을 내렸던 것 아닌가?
경우에 따라서는 공국 전체를 집어삼킬 생각도 하기는 했지만 그건 골치다.
플로렌스 공국을 집어삼키게 되면 글로스터 왕국이나 앤드루스 제국과도 직접 국경을 마주해야 한다.
얻는 것에 비해서 신경 써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집어삼키기보다는 일단 살려두고 완충 지대로 활용하는 편이 좋았다.
“물론 목줄은 제대로 채워야겠지만 말이야.”
레이라 여왕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펜을 들고 편지를 써 내렸다.
그리고 편지를 다 쓴 후에 봉토에 집어넣고 봉인을 하고 전령을 부르려고 했지만 잠깐 멈칫했다.
그리고 다시 편지를 뜯어서 한 장의 편지를 더 썼다.
그녀는 추가로 쓴 편지를 봉투에 넣고 다시 촛농으로 봉인을 하고 인장을 찍었다.
그리고 그녀는 전령을 불러서 편지를 주며 말했다.
“포레스트 대공에게 최대한 빠르게 전달하도록 하라.”
“예. 알겠습니다.”
지엄하신 여왕 전하의 명령을 받은 전령은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다.
“답장 완전 빠르네.”
밀턴이 상황을 보고하고 열흘도 되지 않아서 레이라 여왕의 답장이 도착했다.
스마트 폰도 SNS도 없는 세계라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빨랐다.
듣기로는 전령들이 미친 듯이 달린 결과라고 했다.
“어디, 어떤 내용인지 한번 볼까?”
밀턴은 레이라 여왕의 편지를 확인하고 얼굴이 환해졌다.
이거라면 바이올렛 공주와의 결혼은 아무런 문제없이 진행될 것이다.
거기다 실질적인 이득도 모두 챙길 수 있고 말이다.
‘역시 내 와이프는 사악해.’
흐뭇한 미소를 짓던 밀턴은 편지 안에 한 장의 편지가 더 있음을 발견했다.
‘이건 뭐지?’
밀턴은 또 하나의 편지를 살폈다.
그러자 거기에는 아주 짧은 문장만이 적혀 있었다.
- 보고 싶어요.
“아….”
순간 기습 펀치를 한 방 맞은 느낌이었다.
설마 그 레이라 여왕이….
요물 중에 요물이라고 생각했던 그 레이라 여왕이 이런 편지를 보낼 줄은 몰랐다.
‘역시 내 와이프는 참 착해.’
생각이 참 쉽게도 변하는 밀턴이었다.
밀턴은 로렌스 공왕과 회담의 자리를 만들었다.
“이번 국혼을 앞에 두고 양국 간의 의견을 조율하기 위해서 본국에 보낸 편지에 답변이 왔소.”
바로 본론을 꺼내는 밀턴을 보고 로렌스 공왕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뭐 중요한 것이 있겠소? 그저 귀한 우리 딸이 귀국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 안심시킬 정도만 된다면 나는 만족하오.”
얼마 줄 거야? 라는 말을 참 길게 꼬아서 말하는 로렌스 공왕이었다.
“본국에서는 이번 기회에 플로렌스 공국에 대규모 지원을 생각하고 있소.”
“지원? 어떤 의미로 하는 말이오?”
그저 돈으로 주는 것보다 지원을 해 준다는 말에 한층 더 귀가 솔깃해지는 로렌스 공왕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밀턴은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쉽게 낚이는구나.’
레이라 여왕의 계획대로라면 살살 꼬드기라고 했는데 그럴 필요도 없어 보였다.
일국의 국왕임에도 불구하고 로렌스 공왕의 지력은 65, 정치는 77밖에 되지 않았다.
밀턴이 레이라 여왕 같은 요물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 닭대가리는 구워삶을 자신이 있었다.
“현재 플로렌스 공국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
밀턴의 말에 로렌스 공왕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역시, 국가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풍부한 자금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 사실이라 생각하오.”
로렌스 공왕의 말에 밀턴은 속으로 조소했다.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자금이 필요한 거겠지.’
자금이 국가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플로렌스 공국은 대부분의 자금을 국가의 상류층들이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으면 일반 백성은 대부분의 생산량을 국가에 뜯어먹히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돈이 늘어나면 뭐 하는가?
국가 전체에 돈이 돌지 않으면 백성들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백성들의 삶의 질이 올라가지 않는다는 말은 인구와 산업 생산량 등이 계속 제자리걸음을 할 뿐이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로렌스 공왕의 말은 그냥 개소리다.
하지만 밀턴은 거기에 팩트로 후드려 패는 것보다는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자금도 중요하지만, 그건 평화의 시대일 때요. 공왕께서는 지금의 시대가 평화롭다고 생각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