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154화 (154/257)

제154화

이제까지 제인 7왕비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이올렛 공주의 덕이 컸다.

그녀가 사라지면 제인 7왕비는 1년, 아니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이 뻔했다.

만약 공주를 빼돌렸다는 사실까지 들키면 당장 목이 날아가도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제인 7왕비도 그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딸에게 가혹한 미래를 강요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없는 용기를 쥐어짜서 행동에 나선 것이다.

그녀는 다시 한번 말했다.

“도망가렴. 그리고 자유롭게 네 인생을 살렴. 그게 내가 바라는 유일한 일이란다.”

제인 7왕비의 말에 바이올렛 공주는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그럴 수는 없어요. 제가 어떻게 어머니를 두고….”

“어차피 네가 다른 나라에 시집을 가면 나는 혼자란다.”

“그건….”

“그때가 되면 어차피 나는….”

“…어머…니.”

말을 잊지 못하는 제인 7왕비의 앞에서 바이올렛 공주 역시 감정이 복받쳤다.

어느새 두 모녀는 서로를 꼭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제인 7왕비가 말했다.

“네가 행복하기를 바란단다. 바이올렛, 네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이 엄마는 아무래도 좋아.”

“어떻게…. 어떻게 그래요? 어머니가 없으면 나는….”

바이올렛 공주라고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자신을 따르는 기사들과 함께 공국을 떠나서 따로 자리를 잡는 생각도 해 봤다.

기사가 아니라도 좋다.

세상에 천시 받는 용병이라도 좋으니 답답한 공국을 떠나서 자유로워지면 그것만으로도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항상 상상으로만 그쳤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에게 애정을 쏟아주는 존재인 어머니를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를 가장 강렬하게 구속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의 권력이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그렇게 두 모녀는 하염없이 서로를 끌어안고 눈물만 흘렸다.

결국 바이올렛 공주는 도망갈 수 없었다.

제인 7왕비가 수차례에 걸쳐서 도망갈 것을 권했지만 그녀는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을 끄는 사이에 그녀의 약혼자(?)로 내정된 인간이 도착하고 말았다.

“호오…. 초상화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걸?”

“…….”

“마음에 들었어.”

“…….”

바이올렛 공주는 모독감에 몸을 가늘게 떨었다.

아무리 천대 받고 있다고 해도….

아무리 대륙의 최약소국이라고 해도….

그래도 그녀는 공주다.

결코 술집의 접대부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따위 무례한 대사를 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그런 예의 따위는 저 멀리 집어던졌는지 눈앞에 있는 개새끼는 몹시 만족스러운 시선으로 그녀의 몸을 노골적으로 바라보며 품평을 해댔다.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은 뱀과 쥐새끼의 안 좋은 점만 섞어 놓은 듯한 인상이었다.

느끼하고 야비하고 생리적으로 혐오스러운 느낌의 남자였다.

가는 눈매와 신경질적으로 삐쩍 마른 몸.

옆에 화려하게 장식된 검을 차고 있기는 했지만 서 있는 자세나 풍기는 분위기를 봐서는 그냥 장식으로 봐야 할 것이다.

솔직히 바이올렛 공주라면 고기 써는 식기용 나이프 하나만 있어도 가지고 놀듯이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무력의 차이를 해석했을 때의 일이고, 지금 이 둘의 사이에 압도적인 갑은 워드에게 있었다.

발랑스 왕국의 톨 후작가는 돈이 많기로 유명했고, 이번에 바이올렛 공주를 맞이하는 대가로 로렌스 공왕에게 적지 않은 대가를 지불하기로 했다.

즉, 말이 결혼이지 이건 그냥 돈으로 팔려가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워드는 그런 자신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또 그걸 야비하게 이용할 수 있는 천박한 품성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상대가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상대적으로 위에 있는 자신의 입장을 마음껏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일어나서 바이올렛 공주에게 다가가서 느긋하게 말했다.

“결혼식은 최대한 서두르도록 하지. 당신도 그게 좋겠지?”

당연히 좋을 리가 없었다.

바이올렛 공주는 자신의 뺨을 쓰다듬으려고 하는 워드의 손길을 자연스럽게 피하며 말했다.

“저는 아직 이 결혼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워드는 살짝 놀란 것처럼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호오…. 아버지의 말에 반항하는 비운의 공주다. 이런 건가?”

“…….”

“대답하기 싫은가? 보아하니 마음에 다른 남자라도 두고 있는 모양이군.”

인성은 쓰레기인 것에 비해서 눈치는 나름 빨랐던 모양이다.

바이올렛 공주는 워드의 말에 눈을 똑바로 뜨고 대답했다.

“당신의 말대로 저는 다른 남자를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저를 포기하고 돌아가 주세요.”

다소 파격적일지 모르겠지만 약지 못한 그녀는 직설적으로 자기 속내를 밝혔다.

그런데 문제는….

“멋지군.”

이런 솔직함이 오히려 화를 불렀다는 것이다.

“공주라는 신분 때문에 흥미가 생겼을 뿐이었는데, 미모도 내가 생각하던 것 이상이고, 거기다 이미 사랑하는 사람까지 있다? 이거 최고군.”

“…·뭐라고요?”

이해를 못 하는 바이올렛 공주를 보며 상대는 입술을 핥으며 도착적인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기대가 돼. 내가 침대에서 당신의 꽃을 꺾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울면서 제발 그만하라고 애원할까? 아니면 사랑하는 연인의 이름을 부르며 죄책감에 몸부림칠까? 뭐가 됐던 간에 그건 틀림없이 각별한 진미일 거야.”

“…….”

바이올렛 공주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전쟁터를 누비고 도적들을 토벌한다고 험한 꼴을 많이 보기는 했지만….

‘뭐 이런 게 다 있지?’

이런 변태는 처음이었다.

이건 이제까지 그녀가 경험한 험한 꼴하고는 종류가 완전히 다른 험한 꼴을 보고 있었다.

한 칼에 해치워 버릴 수 있는 상대인데도 불구하고 생리적인 혐오감이 들었다.

눈앞에 있는 상대는 여성에 대한 배려는커녕 공감대조차 만들 줄 모르는 사디스트임에 분명했고, 바이올렛 공주는 이런 초변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힘의 우열을 떠나서 생리적으로 혐오감과 위협을 느꼈다.

그런 바이올렛 공주에게 워드는 음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기대가 돼. 당신이 내 것이 되는 그 순간이 말이야.”

그리고 워드는 그 말을 끝으로 바이올렛 공주의 후궁을 나갔다.

하지만 그가 사라지고 나서도 바이올렛 공주는 한참을 더 멍하니 있어야 했다.

‘정말… 저런 인간하고 결혼해야 하는 건가?’

그저 이게 현실이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바이올렛 공주와 대면 후에 그녀에게 한층 더 빠져든 워드 톨은 결혼식을 서둘렀다.

원래는 약식으로 약혼식만 올리고 발랑스 왕국에 돌아가서 정식 결혼식을 올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워드는 급하게 일정을 조정해서 플로렌스 공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남들이 보면 신부를 향한 배려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바이올렛 공주로서는 소름 끼칠 뿐이었다.

착착 진행되는 결혼식의 준비에 그녀의 의사는 아무런 필요도 없었다.

그저 당일이 되면 예쁘게 꾸며져서 식장으로 오면 될 뿐이라고 통보를 받았을 뿐이다.

그리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그녀에게는 워드가 직접 보낸 시녀들이 붙었다.

명목상으로는 신부의 준비를 도와주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실상은 감시였다.

직접 바이올렛 공주를 본 워드는 안달이 났고 최대한 빠르게 결혼식을 준비했다.

그렇게 해서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드디어 그 선머슴 같은 계집이 눈앞에서 사라지겠군요.”

“그러게 말이에요. 정말이지 왕가의 수치라고 할 만한 것이었어요.”

“어미의 핏줄이 천해서 그런가? 같은 왕족이라고 여기기도 싫었다니까?”

플로렌스 공왕가의 식솔들은 결혼식에 삼삼오오 모여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실 그 얘기의 대부분이 신부에 대한 험담이었다.

특히 왕자들보다 공주들 사이에서 바이올렛의 험담이 많았는데 그건 그녀들이 바이올렛 공주를 질투했기 때문이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했던가?

검을 휘두르고 전쟁터를 지휘하고 기사의 자격을 얻는 것.

이런 것은 여자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원래 인간은 자신의 손에 쉽게 닿지 않는 것을 동경하는 법이었고, 여성이 기사가 된다는 것은 남자가 기사가 된다는 것보다 열 배는 더 힘든 일이었다.

거기다 평범한 여인도 아니고 왕실의 여인이 기사의 자격을 얻었다.

고귀한 공주가 기사들을 지휘하며 전쟁터에서 활약하는 것은 현실에 거의 없다.

대부분 그런 존재를 존경하는 이야기꾼들이 꾸며내는 가상의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바이올렛 공주는 그것을 해 냈다.

뒤로 다른 수작질을 부린 것도 아니고 순수하게 자신의 실력만으로 말이다.

다른 공주들이 바이올렛 공주를 질투하는 것은 그래서였다.

자신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낸 것이 싫은 것이다.

그 대상이 자신들보다 격에 떨어지는 존재가 해냈다면 더욱더 그랬다.

그래서 예전부터 공주들은 바이올렛 공주에 대한 험담을 많이 했다.

공주답지 않게 품위가 없다.

검술에 재능이 있는 것은 핏줄이 천해서 그런 것이다.

심지어는 그녀가 기사단들 사이에서 난잡한 연애를 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퍼트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소문이 돌던 말던 바이올렛 공주가 이끄는 기사단은 현장에서 활약을 했고, 다른 공주들의 입장에서는 그게 몹시 못마땅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았다.

바이올렛 공주는 이제 발랑스 왕국의 후작가에 첩으로 들어간다.

그것도 그냥 첩이 아니라 일곱 번째 첩이라고한다.

또한 그 후작가의 후계자인 워드 톨이라는 남자의 평가도 몹시 좋지 않았다.

정식으로 첩으로 등록한 여자는 일곱이었지만 애인처럼 비공식적으로 곁에 두는 여자들은 훨씬 더 많다고 한다.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손버릇이 좋지 않아 자신이 아내라고 해도 종종 손을 올려서 폭행을 저지른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남편감으로는 최악 중에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는 것이다.

이제 그녀들은 바이올렛 공주의 마지막 모습에 조소와 동정을 잔뜩 담아 내려다보며 상대적인 우월감을 만끽하기 위해서 결혼식장에 참석했다.

“그럼, 지금부터 식을 진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신관의 말을 시작으로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먼저 신랑이 입장했다.

야비한 인상이기는 했지만 얼굴에는 기대감이 가득한 상태로 당당하게 식장에 입장했다.

“정신적으로 장애가 좀 있다고 하죠?”

“듣기로는 정실 아내를 폭행해서 몇 달 동안 사교계에 얼씬도 못 하게 한 적도 있다는군요.”

“어머, 무서워라.”

“그래도 누구 상대로는 딱이지 않나요?”

“쿠쿡…. 하긴 그렇군요.”

공주들은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며 바이올렛 공주의 불행을 즐겼다.

그리고 이어서 신부가 등장했다.

그리고 그 순간….

키득 거리던 공주들의 비웃음이 딱 멈췄다.

하얀색 웨딩드레스를 입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꾸며놓은 바이올렛 공주가 등장한 순간 좌중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약 5초 정도 멍하니 있던 좌중은 조금씩 정신이 들고 나서야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저게 바이올렛 공주?”

“맨날 갑옷만 입고 다녀서 몰랐는데….”

“좀…. 예쁜 것 같기는 하네요.”

“뭐, 보기에 따라서는 말이죠.”

남자들은 넋을 잃고 감탄했고, 수근거리던 여자들은 단번에 기가 죽었다.

이제까지 꾸미고 다닌 적이 없어서 몰랐다.

한껏 꾸민 바이올렛 공주가 이렇게 아름다울 줄은 말이다.

순결을 상징하는 순백의 웨딩드레스로 몸을 감싸고 붉은 버진 로드를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아련하고 신비롭기까지 했다.

면사포를 인해서 얼굴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런 점이 오히려 더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흐음…. 조금 더 비싸게 팔 수 있을걸 그랬나?’

그 모습을 보며 아버지인 로렌스 공왕이 아쉬움을 느낄 정도였다.

어차피 그에게 있어서 공주는 정략의 카드였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공주일수록 더 비싸게 파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지금은 아쉬움이 들었다.

바이올렛 공주의 미모가 저 정도일줄 알았다면 훨씬 더 높은 조건을 제시할 수 있었다는 아쉬움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감탄하고 있는 것은 워드 톨이었다.

‘미치겠군. 생각 같아서는 식이고 뭐고 간에 그냥….’

여자 편력이 추잡하기로 유명한 워드조차 지금의 바이올렛 공주를 보고 있으니 안달이 났다.

원래 워드는 약소국의 공주라고 해서 그저 콜렉션의 하나를 추가한다는 느낌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어서 이 식이 끝나고 단둘이 있는 시간이 되기만 기다려졌다.

살면서 이렇게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은 처음처럼 느껴졌고 신관이 말하는 주례사가 일부러 질질 끄는 느낌이었다.

결혼식을 이제까지 여섯 번이나 해 봤지만 이번 결혼식이 가장 귀찮고 짜증이 났다.

그리고 마침내 신관이 두 사람의 사랑을 확인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신랑은 신부를 아끼고 사랑하고 존중하며 애정을 기울여 소중히 할 것을 맹세합니까?”

“예. 맹세합니다.”

빠르게 대답하는 워드를 넘어서 이제 바이올렛 공주에게 차례가 넘어갔다.

“신부는 신랑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남은 인생 평생을 헌신할 것을 맹세합니까?”

“…….”

신관의 질문에 바이올렛 공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신관이 헛기침을 하며 다시 말했다.

“크흠…. 신부는 신랑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남은 인생 평생을….”

“맹세한다고 하는군. 그냥 넘어가도록 합시다.”

신관이 질문하는 과정에 워드가 끼어들어서 재빨리 말을 끊었다.

보아하니 아직 미련의 끈이 남은 모양이다.

그런 사소한 부분 때문에 이 지루한 결혼식이 더 이상 길어지기는 원하지 않았다.

신의 이름으로 진행하는 신성한 서약에 이런 식으로 끼어드는 것은 심각한 모독이었다.

하지만….

“크흠….”

한쪽에 있는 로렌스 공왕이 눈치를 주자 신관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신을 모시는 신관이라고 해도 모든 이들이 권력 앞에서 꼿꼿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이로서, 이 둘의 사랑이 결실을 맺었음을 선언합니다. 혹시나 이 결혼에 이의가 있는 이는 지금 나와서….”

그때.

“이의 있소.”

식장의 문이 열리고 한 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당당하게 이의가 있다고 말하며 식장에 나타났고 주변의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무려 왕가에서 진행하는 결혼식에 난입한 이 남자는 몹시 당당했고 여유가 넘쳤다.

얼마나 여유가 넘쳤나 하면….

‘쩐다. 나 이런 거 한 번쯤 해보고 싶었는데.’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할 정도였다.

당연하지만 이 난입자는 밀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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