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화
돈이 모이는 곳에 사람이 모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반드시 부지런하고 정직한 사람들만 모이는 것은 아니다.
돈이 모이는 곳에 제대로 된 질서가 잡히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폭력으로 이권을 차지하려는 자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지금의 북부 지역은 공화국의 잔재가 남아서 왕국에서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하고 반쯤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다.
국경의 방비 이외에는 거의 노마크인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거기다 돈까지 모이고 있다.
도적이나 용병들이 자리를 잡기에는 최적의 상황인 것이다.
그들은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한 상단에 접선해서 보호를 명목으로 돈을 뜯어내기 시작했고, 자신들끼리 파벌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폭력으로 사람들 위에서 유린하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뒷골목에서 시체가 발견되고 폭력으로 정직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자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문제가 이렇게 되자 항구 도시의 주민들은 질서가 필요함을 인식했다.
폭력 조직이 대놓고 활개를 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국가에서 질서를 바로잡는 것.
그게 바로 치안(治安)이라는 것이다.
레이라 여왕은 항구의 상인들이 보내는 상신서를 보고 미소 지었다.
“간신히 여기까지 왔군요.”
“그들이 먼저 손을 내밀었나요?”
밀턴의 말에 레이라 여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왕국이던, 공화국이던, 인간이 어울려 살기 위해서는 국가라는 틀이 필요해요. 이제야 그들도 현실을 납득한 거죠.”
“그럼 계획을 다음 단계로 진행시킬 수 있겠군요.”
“그렇죠. 준비는 됐나요?”
“물론이죠.”
그렇게 두 부부는 미소를 지었고 다음날 바로 로빈은 함선에 막대한 병사를 실고 북부로 떠났다.
검은 거미단.
최근 항구 마을에서 패권을 잡은 폭력 조직의 이름이다.
사실 폭력 조직이라고 해도 원래는 전쟁터에서 활동하는 용병단이었다.
그 규모는 500이 넘었고 일반 뒷골목의 건달들보다는 훨씬 더 강했다.
이 검은 거미단의 두목인 그라인드는 자신의 부하들을 앞세워서 빠르게 이 도시를 접수해 버렸다.
자신들과 비슷한 용병단 몇 개와 충돌을 하기는 했지만 그놈들을 모두 처리하고 나니 그때부터는 하루하루가 무지갯빛 같았다.
총 조직원이 500명을 넘긴 검은 거미단은 이 항구 도시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조직이 되었다.
사실, 원래 같으면 이런 조직을 단속할 국가 권력은 사실상 개입을 꺼리고 있었다.
덕분이 그라인드는 마음껏 활개를 칠 수 있었다.
하루하루 쌓여 가는 돈과 무슨 짓을 해도 제동할 사람이 없는 절대 권력.
“크크큭…. 마침내 내 인생에도 황금기가 찾아왔구만.”
그는 화려한 방에서 비싼 술을 마시며 자신이 귀족, 아니 왕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만끽했다.
“어디 계집이라도 불러서 즐겨볼까?”
그라인드가 그렇게 말한 그 순간.
쾅쾅!
“두목, 큰일 났습니다.”
부하가 갑자기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뭐야? 무슨 일이냐?”
“습격입니다. 아래층에 난리가 났습니다.”
“뭐라고? 아직 이 도시에 우리한테 맞서는 조직이 있다는 말이냐?!”
그라인드의 말에 부하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말했다.
“조…. 조직이 아닙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기사. 기사가 왔습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콰직!
그때 부하의 뒤편에서 문이 부서지며 한 명의 남자가 기세등등하게 들어왔다.
“네놈이 그라인드라는 개 쓰레기 새끼냐?”
“뭐…. 뭐냐? 네놈은?”
“나? 내 이름은 릭 스토리라고 하지. 일단 자작의 작위도 가지고 있다.”
“귀족? 그…. 그래봤자 여기는 치외법권 지역이다.”
그라인드의 말에 릭은 팔을 빙빙 돌리며 말했다.
“치외법권 지역? 누가 그런 말을 해?”
“그건….”
당연히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주민들이 비협조적이고 레이라 여왕이 거기에 무력을 동원하지 않고 있어서 그런 식으로 인식될 뿐.
세상에 누가 국가 안에 치외법권 지역 같은 골 때리는 걸 만든다는 말인가?
릭은 품 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서 그라인드의 앞에서 읽기 시작했다.
“검은 거미단 두목 그라인드. 네놈을, 살인, 납치, 폭력, 협박, 감금, 상습 갈취, 불법 조직 형성, 불법 밀거래, 방화 그리고…. 뭐 이렇게 많아? 어쨌든 졸라 나쁜 놈이니 체포한다.”
“웃…. 웃기지 마라!”
그라인드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벽에 걸려 있는 자신의 검을 빼들고 덤볐다.
그리고 릭은 그런 그라인드를 보며 잔인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
“좋아. 그렇게 나와야 악당답지.”
결과적으로 말하면 그라인드는 릭한테 딱 죽지 않을 정도로 얻어터졌다.
제법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용병단의 단장이라고 해도 릭은 무려 익스퍼트였다.
그것도 페일런 공작이 직접 가르친 익스퍼트.
릭은 무기도 뽑지 않고 맨주먹으로 그라인드를 두들겨 팼다.
무기를 쓰지 않은 것은 맨주먹으로 패는 게 더 오래 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손맛도 그게 더 좋았고 말이다.
그 결과….
“설마 죽인 건 아니겠지?”
숨만 간신히 붙어서 끌려 내려온 그라인드를 보고 토미가 말했다.
“에이 설마. 죽이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잖아?”
“그걸 아는데 그 꼴을 만들었냐?”
“이 새끼가 워낙 나쁜 놈이라서 말이지. 패고 싶은 욕구가 막 샘솟더라고.”
“…됐다. 어쨌든 안 죽였으니.”
토미는 한숨을 내쉬며 병사들을 시켜서 그라인드를 구속했다.
그리고 검은 거미단을 전부 구속한 후에 병사들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시민들에게 알려라. 이 사건은 공개적으로 재판을 한다고.”
“옛. 알겠습니다.”
검은 거미단의 심판은 공개 재판으로 진행 되었다.
사실 공개 재판이라고 해도 약식으로 진행된 재판이었지만 괜찮았다.
원래 귀족은 합당한 이유만 있다면 평민의 죄를 심판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악용하는 귀족들이 워낙 많아서 좋은 정책이라는 이미지는 없었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활용되었다.
“저놈들이 빚 대신에 제 전재산을 몰수해 갔습니다.”
“저도 당했습니다. 세금을 내라고 했고 거부하니 제 가게를 다 부쉈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놈들이 제 남편에게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고 죽였습니다. 꼭 벌을 내려 주십시오!”
검은 거미단에 당한 피해자들은 이 도시에 차고 넘쳤다.
토미가 단상에 서서 이 죄인들의 죄목을 고발할 자들은 나와서 말하라, 라는 말을 하자마자 수십, 이윽고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나와서 울분을 토해냈다.
울분이 분노를 불렀고, 분노는 이윽고 증오가 되었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그동안 폭력으로 사람들을 지배했던 검은 거미단의 악당들은 두려움에 몸을 덜덜 떨었다.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외치는 목소리에는 광기가 실려 있었던 것이다.
만약 여기서 토미가 안 죽이겠다고 하면 반란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물론 토미는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판결한다. 검은 거미단의 두목 그라인드와 그 부하들은 이 도시의 시민들에게 씻지 못할 정도로 중한 죄를 지었다. 이에 본인 토미 크로이 자작은 레이라 폰 레스터 전하에게 받은 적법한 권한으로 이들의 죄를 심판. 전원 사형을 선고한다.”
판결이 내려진 그 순간….
“와아아아아아!!”
“만세!!!”
사방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폭발 직전까지 자극받았던 증오가 다행이도 보답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민중들 사이에서 몇몇이 묘한 주동을 일으켰다.
“토미 크로이 자작 만세!!”
“여왕 전하 만세!!”
“포레스트 대공 전하 만세!”
그들은 바람잡이였다.
이 분위기에 은근히 편승해서 시민들의 마음을 왕실 쪽으로 돌리려고 미리 준비해둔 것이다.
악을 응징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이 시점을 노리고 레이라 여왕이 투입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선동은….
“여왕 전하 만세!”
“대공 전하 만세!”
훌륭하게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서부 지역의 민심을 장악한 레이라 여왕은 서둘러 손을 썼다.
우선 치안의 유지를 위해서 행정청을 건설하고 빠르게 관리들을 파견했다.
그리고 해당 지역의 인물들 사이에서 관청에서 일할 수 있는 현장 관리를 대거 모집하게 했다.
상업이 막 발달하기 시작한 항구 도시이기에 해야 할 일은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있었다.
주거지와 상업지구의 계획적인 설계부터 시작해서 정확한 조세를 위한 수입 신고 등등.
레이라 여왕의 지시를 받은 관리들은 특히 신경 써서 항구 도시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치안을 바로잡고 일자리를 늘리고 빈민층이 생길 여지를 최대한 억눌렀다.
그렇게 북부의 항구 도시는 점점 발전을 거듭해 갔다.
“모두 계획대로네.”
레이라 여왕은 밝은 햇살 아래의 티 테이블에서 보고서를 읽으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사랑하는 남편과 한 식구가 된 소피아가 함께 있었다.
“북부 쪽이 계획대로 잘 돌아가는 모양이죠?”
밀턴의 물음에 레이라 여왕은 자신의 앞에 있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예. 그럭저럭 순조롭네요.”
북부 지역의 항구 지역을 집중 개발함으로 인해서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그리고 그들이 북부 대륙에서 자체적으로 상행위를 주도함으로 인해서 서서히 북부 지역에서 생산되는 철광석과 무기류의 거래가 활성화되고 있었다.
북부의 내륙에 사는 자들은 아직도 왕국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지만 서쪽의 해안 지역에서는 오히려 과거의 공화국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공화국 시절에는 가난에 허덕이며 괴로워했던 지역이 왕국의 지원을 받고 눈부시게 발전했으니 말이다.
내륙 지방에서는 항구 도시의 발전을 보고 배신자라고 매도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물론 항구 도시의 사람들은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 공화국이 우리한테 무엇을 해 줬느냐?
라는 식으로 당당하게 주장했다.
수적으로는 내륙의 여론이 더 많았지만 항구 도시의 주민들은 경제력이 더 강했다.
북부에서 이 두 개의 여론은 은연중에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이로써 레이라 여왕이 생각하던 최악의 사태.
그러니까 북부 지역이 왕국에 반발해서 통째로 들고 일어나는 사태는 피한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 처음에 북부 민심을 조사했을 때는 정말 폭동이나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밀턴이 일찍 충고를 해 주지 않았으면 그녀가 미처 손을 쓸 겨를도 없이 일이 터졌을지도 모른다.
문제 해결을 고민하던 와중에 밀턴의 조언에서 영감을 얻어 북부 지역에 일부이긴 하지만 우호적인 여론을 만들어내는 것에 성공했다.
앞으로는 그 우호적인 여론을 조금씩 키워 가면 된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이지.’
지금 당장은 한숨 돌린 느낌이 드는 레이라 여왕이었다.
그때, 레이라 여왕은 한 장의 서류를 살피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그녀의 표정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 밀턴이 바로 이유를 물었다.
“왜 그래요?”
“…….”
“레이라? 왜 그래요?”
밀턴이 다시 물어보자 레이라 여왕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밀턴, 잠시 어디 좀 갔다 와야겠어요.”
“예? 왜요?”
지금 한창 행복한 신혼 생활을 하고 있는 밀턴은 눈살부터 찌푸렸다.
“어쩔 수 없어요. 이건 꼭 당신이 가야 처리할 수 있는 일이에요?”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설마 또 전쟁이라도 벌어지는 것일까?
불안해하는 밀턴에게 레이라 여왕이 말했다.
“바이올렛 공주에게 일이 생겼어요. 지금 당장 플로렌스 공국으로 가줘요.”
“예? 그녀한테 무슨 문제가 있나요?”
밀턴의 말에 레이라 여왕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결혼할지도 모르겠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