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포레스트 항구에 있는 커다란 저택.
화려하다기보다는 천박할 정도로 돈을 잔뜩 들인 그 저택의 방에는 한 명의 남자가 팔자 좋게 늘어져 있었다.
“하아아…. 좋다. 좋아.”
그는 비싼 와인과 비싼 안주를 곁에 두며 지금 이 순간을 즐겼다.
사실 맛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비싼 것을 소비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이 세상 모든 가치를 돈에 두는 남자.
바로 로빈이었다.
그런 로빈에게 부하가 찾아와서 말했다.
“로빈 선장님. 대공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뭐? 왜 또?!”
“저야 모르죠.”
“아! 싫어. 그 인간 또 뭔가 무리한 일을 시킬 것 같단 말이야. 안 해. 안 가! 나 아프다 그래.”
거의 땡깡 부리듯이 개기는 로빈이었다.
사실 예전에는 비앙카의 저주(?)로 인해서 무조건 적인 절대 복종을 했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세상에 그런 유치한 저주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혹시 어떻게 풀 수 있나 싶어서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기어코 알아낸 진실이었다.
다만, 이제는 저주와 별개로 밀턴을 떠날 수 없어졌기 때문에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 보니 개김성이 상당히 강해졌고, 밀턴이 뭔가 시켰을 때 반사적으로 하기 싫다는 생각부터 먼저 하는 인간이 로빈이었다.
물론 밀턴은 로빈이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대공 전하께서 전하시기를….”
“설마?”
“세 시간 안에 안 보이면 분 단위로 벌금 물린다고 하십니다.”
“치사한 놈.”
로빈을 이를 갈면서 벌떡 일어났다.
벌금만큼은 절대 사양이었다.
‘나보다 돈도 많은 놈이 내 돈을 빼앗다니. 그것도 따지고 보면 다 내가 벌어준 건데. 이 치사하고 더러운 놈. 반드시 돈의 천벌을 받으리라.’
로빈을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부지런히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알현 준비를 했다.
로빈.
그는 원래 해적이었다가 밀턴과 인연을 맺게 된 남자였다.
사실 밀턴의 휘하에 있는 인물 중에 드물게도 충성심이 낮은 인물이기도 했다.
70 언저리 정도의 충성심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걸 관리해주지 않고 방치해 두면 수시로 60 이하로 떨어지는 놈이었다.
솔직히 못 믿을 놈이긴 했지만 그래도 밀턴은 로빈을 꽤 중요하게 등용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능력은 확실하다는 것.
특성 중에 상재의 레벨이 8이었고 항해의 레벨이 7이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 확연하게 늘어난 이 능력치로 인해서 로빈은 항해 무역으로 엄청난 돈을 벌어다 줬다.
솔직히 말해서 경제력 방면으로는 밀턴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인재 중에 한 명이었다.
지금 당장 로빈이 없으면 해양 무역에 상당한 손실이 생길 것 같아서 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다룰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밀턴을 향한 로빈의 충성심은 몹시 낮았다.
하지만 돈을 향한 로빈의 충성심은 거의 신념, 아니 신앙의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전에 충성 수치가 50까지 떨어졌을 때 포상을 두둑하게 주니 순식간에 충성 수치가 80까지 올라간 적도 있었다.
돈 하나에 충성 수치가 30가까이 왔다 갔다 하는 놈인 것이다.
그래서 밀턴은 대외적으로 로빈의 존재를 크게 알리지 않았다.
다른 놈이 돈을 더 준다고 하면 99퍼센트 배신할 확률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밀턴은 로빈에게 주는 포상의 형태로 놈의 발목에 족쇄를 채웠다.
그동안 로빈에게 포상을 주면서 현금을 준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 대신 로빈에게 주는 포상의 형태는 대부분이 현물이었다.
토지와 건물, 상회의 지분, 무역의 성과금 등등….
로빈에게 주는 포상의 대부분은 밀턴의 휘하에 있음으로 인해서 누릴 수 있는 것으로 한정해 놓은 것이다.
로빈이 해양 무역으로 돈을 많이 벌어오면 올수록 밀턴은 충분한 포상을 주었다.
덕분에 로빈은 나날이 늘어가는 재산을 보면서도 결코 밀턴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결코 믿을 놈은 아니다.
하지만 이 믿지 못할 놈이 배신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주자.
라는 것이 밀턴이 로빈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레이라 여왕이 그 로빈에게 볼일이 있다고 하기에 일단 불러 주었다.
“레이라 폰 레스터 여왕 전하를 뵙습니다.”
로빈은 시종이 급하게 가르쳐준 왕실의 예법대로 인사를 올렸다.
“고개를 들라.”
“감사합니다.”
로빈은 레이라 여왕을 지척 거리에서 보고 우선 그 미모에 감탄했다.
‘이야…. 쩐다.’
그리고 두 번째로 든 생각은 이거였다.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까지 받을 수 있을까?’
기승전 골드.
레이라 여왕의 미모를 접하고 바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대단했다.
“그대가 우리나라의 해양 무역을 거의 다 주도하고 있다고 알고 있네. 맞는가?”
“아닙니다. 저는 그저 해로의 개척과 신규 상단과의 거래 개척을 담당하고 있을 뿐입니다.”
‘핵심 사안을 다 담당하고 있었군.’
레이라 역시 한때는 샤를롯트 상단이라는 대상단을 이끌어 봤던 여인이다.
겸양의 말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로빈이라는 남자의 능력에 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알기로 남쪽의 해양 무역은 이미 안정적이라고 알고 있네.”
“이 모든 것이 여왕 전하의 은덕이옵니다.”
“아부는 됐네. 그보다 내가 부탁하고 싶은 일은….”
“쿨럭…. 죄송합니다. 제가 지병으로 폐병이…. 쿨럭쿨럭….”
레이라 여왕이 뭔가 시키려고 직감한 순간 그는 갑자기 기침을 하며 아파했다.
“지병이 있었나?”
“예. 쿨럭…. 제가 선천적으로 몸이 허약해서….”
“그랬나?”
레이라 여왕이 담담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하고 다시 용건을 꺼냈다.
“어쨌든 자네한테 시킬 일이 있네. 그게 뭐냐 하면….”
‘이 독한 년.’
아프다고 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뭔가 시키려고 하는 레이라 여왕을 보고 로빈을 이를 악물었다.
얼굴은 예쁘게 생겼는데 피도 눈물도 없는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로빈은 결심을 굳히고 손으로 입을 가리고 더 격하게 기침을 했다.
“쿨럭 쿨럭…. 커억….”
기어코 로빈은 피를 토해 내기까지 했다.
대전의 붉은 카펫 위에 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로빈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쿨럭…. 죄….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몸이 너무…. 쿨럭·….”
안색도 약간 파래진 로빈의 모습은 혹시 지금 죽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위태로워 보였다.
그런데….
“별로 죄송할 건 없네.”
“…….”
“어쨌든, 본론으로 넘어가지.”
‘나 아프다니까 이 예쁘고 미친 년아.’
로빈이 속으로 절규했지만 레이라 여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나는 자네가 북부의 서쪽 해안 지대의 도시들을 부흥시켜 줬으면 하네. 할 수 있겠지?”
“그런 막중한 임무를 맡겨 주시는 것은 영광입니다. 하지만…. 쿨럭…. 보시다시피 제 몸이 불편하여…. 쿨럭…. 쿨럭….”
“몸이 좋지 않아서 힘들다?”
“예. 정말 송구하지만….”
“그렇다는데요? 밀턴.”
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레이라 여왕이 한마디를 했고 그러자 대전의 뒤편에서 밀턴이 미소를 머금고 나타났다.
“그래? 아프다고?”
밀턴을 본 순간 로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X발, X됐다.’
밀턴은 거침없이 다가가서 로빈의 품 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는….
“이거 뭐냐?”
연극하는 배우들이 소품으로 쓸 법한 피 주머니가 나왔다.
“아…. 저기 그….”
당황해하는 로빈을 보고 밀턴을 속으로 생각했다.
‘이 멍청한 새끼, 내 마누라를 물로 보고 왔구만.’
원래 로빈은 밀턴이 명령을 내릴 때마다 질색을 하고는 했다.
처음에 좋은 인연으로 시작한 것도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부지런하게 일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 와도 결국 수입의 99퍼센트는 나라에 빼앗기고(?) 자신은 1퍼센트 미만의 보수만 받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돈을 존경하다 못해 사랑하는 로빈에게 그건 너무 억울한 일이었다.
돈을 벌면 벌수록 빼앗기는 금액도 점점 커지다 보니 몹시 억울했다.
물론 밀턴이 챙겨주는 보수 자체는 해적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금액이다.
그래도 억울한 건 억울한 것이었다.
그래서 시키는 일은 최대한 하지 않고 어떻게든 편하게 최대한 많은 돈을 벌 궁리만 하고 있는 로빈이었다.
이 피 주머니는 예전에 밀턴에게 한 번 써먹었다가 우연히 통했고, 두 번째로 또 하다가 뒤지게 얻어터진 적이 있던 추억의 아이템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대가 밀턴이 아니고 레이라 여왕이다 보니 한 번은 통하지 않을까? 해서 이런 준비를 한 것이다.
“너는 어째 돈 버는 분야 말고는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냐?”
“아니 그…. 그게 아니고…. 후작님.”
“나 이제 대공이다.”
“위대하신 대공 전하. 그게 아니옵고….”
“너 혹시 몰랐냐?”
“무엇을 말씀이시옵니까?”
“국왕 앞에서 거짓을 말하면 사형인 것 몰랐냐고.”
밀턴의 말에 로빈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했다.
“거…. 거짓말. 전에 저주 어쩌고 했던 것처럼 또 거짓말하는 것 다 압니다.”
“진짜다. 인마.”
밀턴의 말에 로빈이 불안한 표정으로 레이라 여왕을 바라봤다.
그러자 레이라 여왕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왕실의 대전에서 국왕에게 거짓을 고했으니, 일국의 군주에 대한 기만으로 목이 날아가도 할 말이 없기는 하죠.”
그러자 로빈은 납작 엎드렸다.
“저어어어언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저 저는 전하께서 시키시는 일을 잘할 자신이 없어서 그래서 그저….”
‘이런 간사한 새끼….’
밀턴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돈 버는 건 엄청나게 유능한데 그 이외의 분야에서는 엄청나게 무능하다.
머리가 나쁜 건 아닌데 돈 욕심에 눈이 멀어서 미련한 행동을 한다고 해야 할까?
아무리 공짜로 착취(?) 당하는 것이 싫다고 해도 무슨 배짱으로 일국의 군주 앞에서 이런 발연기를 보여줬단 말인가?
레이라 여왕이야 애당초 이런 데 넘어갈 사람도 아니긴 했지만 간댕이가 퉁퉁 부었거나 돈 욕심에 눈이 까맣게 멀었다는 증거다.
“뭐, 걱정마라. 내가 너를 살려주마.”
밀턴이 선심을 쓰듯이 말하자 로빈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대공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래. 걱정하지 마라.”
“예.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무엄하게도 어전에서 아프다고 한 너의 거짓말을 진실로 만들어 주마.”
“예. 알겠…. 뭐라고요?”
“거짓말이 진실이 되면 거짓을 말한 게 아니니까 벌을 주지 않아도 되지. 안 그러냐?”
밀턴은 그렇게 말하며 주먹의 관절을 풀었다.
두둑 거리며 살벌하게 다가오는 밀턴의 모습을 보고 로빈이 말했다.
“그….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여기 있어.”
“용서해 준다면서요?”
“살려준다고 했지. 용서한다고는 말한 적 없다.”
“크윽…. 이건 횡포입니다.”
“그래? 그럼 선택권을 줄까?”
“무슨 선택권을….”
“벌금 낼래? 맞을래?”
“…·혹시나 싶어서 물어 보는데 그 벌금은 치료비보다 더 많게 책정된 겁니까?”
“이 와중에 그게 궁금하냐 싶지만…. 그래. 훨씬 많지.”
“그렇다면 맞겠습…. 크웩!”
“그래. 넌 그럴 줄 알았다.”
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작된 밀턴의 주먹이 로빈의 턱을 돌렸고, 그렇게 살벌한 구타로써 밀턴은 로빈의 죄를 사하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