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화
결국,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배경이었다.
플로렌스 공국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자기 사람들을 지킬 수 있을 정도의 배경.
그래서 그녀는 밀턴의 여자가 되어야 한다고 결심했었다.
어차피 왕실에서 지원도 없는 그녀다 보니 마땅한 혼처가 정해질 리가 없다.
결혼이라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고, 그 결혼의 대상이 밀턴 포레스트라면 좋겠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다만, 태어나서 한 번도 남자를 유혹해 본 적이 없는 그녀다 보니 어떻게 남자를 유혹해야 할지를 몰랐다.
속으로 끙끙 앓고만 있고 감도 오지 않았다.
사실 그녀의 고민은 쓸모없는 것이다.
그냥 생글생글 웃고 있으면 나머지는 그녀의 미모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말이다.
속은 어떻든 간에 겉으로 보기에 그녀는 미모의 여인이었고 또 공주라는 신분도 가지고 있었다.
그녀 정도면 특별하게 유혹하지 않아도 어지간한 남자는 길에서 돌멩이 줍듯이 주워 담을 수 있다.
다만, 인생을 살아오면서 한 번도 연애 쪽으로는 인연이 닿아본 적이 없다 보니 스스로의 미모에 자각이 없었다.
이건 마치 거미가 거미줄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르겠어요, 라고 고민에 빠진 것 같은 상황인 것이다.
거기다 밀턴에게 이미 결혼을 약속한 여인이 있다는 사실까지 알고 나니 한층 더 눈앞이 깜깜해졌다.
‘정말 어쩌면 좋지?’
이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점점 지나고 있었고, 바이올렛 공주의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그때.
“바이올렛 공주님.”
시종 한 명이 그녀에게 찾아와서 말했다.
“무슨 일이죠?”
“레이라 여왕님께서 은밀하게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여왕전하께서? 어째서죠?”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말을 전할 뿐입니다.”
시종의 사무적인 태도에 바이올렛 공주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예. 만날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안내하겠습니다.”
그리고 바이올렛 공주는 레이라 여왕이 타고 있는 마차로 안내되었다.
“어서 와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레이라 여왕은 그 안에서 티 테이블을 준비해 두고 바이올렛 공주를 맞이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이올렛 공주는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마차에 들어가며 생각했다.
‘포레스트 후작은 없구나.’
그런 그녀를 보고 레이라 여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이는 잠시 보냈어요. 군의 대열을 살피고 온다고 했으니 한참 걸릴 거예요.”
“예?”
바이올렛 공주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내 생각을 읽은 건가?’
그런 그녀에게 레이라 여왕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생각을 읽은 건 아니에요.”
“예…. 예에….”
당황해서 식은땀을 흘리며 바이올렛 공주는 생각했다.
‘이 여자 무서워.’
“너무 무서워하지도 말고요.”
“…….”
이제는 그냥 도망가고 싶을 정도였다.
자기 앞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바이올렛 공주를 보며 레이라 여왕이 한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순진하네.’
얼굴에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서 슬쩍 찍어 봤는데 그게 다 먹힌 모양이다.
원래 그런 걸 숨 쉬듯이 당연하게 잘하는 레이라 여왕이긴 했지만 바이올렛 공주의 경우 사람이 순진해서인지 표정을 읽는 게 더 쉬웠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밀턴의 주변을 배회하고 있는지도 진작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레이라 여왕은 그녀를 불렀다.
왜 불렀을까?
내 남자한테서 꺼져, 이 도둑고양이 같은 년아!
같은 진부한 대사를 하려고?
레이라 여왕은 그렇게 판에 박힌 여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쁘지 않아.’
레이라 여왕은 화사한 미소를 유지한 상태로 바이올렛 공주에게 말했다.
“우선 고마워요. 이번 전쟁에서 그이의 목숨을 구해줬다죠?”
“아…. 예.”
리트인크 공성전에서 밀턴이 탈출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이올렛 공주였다.
거기에 대한 감사로 대화를 시작한 레이라 여왕은 바이올렛 공주를 살살 구슬렸다.
“플로렌스 공국에 이 정도의 인재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직접 기사들을 이끌고 전쟁터를 누비다니? 왕족의 공주들이라면 한 번쯤 꿈속에서 생각했을 일이죠.”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빈말이 아니에요. 여성의 몸으로 익스퍼트에 도달한 것 자체도 대단하지만 왕족으로서 태어나서 편안함을 거부하고 거기까지 스스로를 단련시킨 것은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레이라 여왕의 말에 바이올렛 공주는 얼굴이 빨개졌다.
“여왕님이야말로 대단하세요. 저하고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벌써 일국의 군주로서…. 그, 잘하시고 계시잖아요?”
칭찬을 하려고 해도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잘 모르면 자세하게 하기 힘들다.
바이올렛 공주는 스스로 서툰 말솜씨가 창피했는지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레이라 여왕은 조금도 불쾌하지 않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알아줘서 고마워요.”
‘다행이다. 착한 분 같아.’
큰 오해(?)였지만 덕분에 바이올렛 공주는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리고 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가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마침내 바이올렛 공주의 기분이 좀 풀린 그 시점을 놓치지 않고 레이라 여왕이 기습을 해왔다.
“그런데 바이올렛 공주, 혹시 배우자가 내정되어 있나요?”
“아…. 아니요. 그런 건….”
“흐음, 꽤 드문 일이군요. 원래 왕족은 어려서부터 약혼자를 두는 경우가 많은데 말이죠.”
“…….”
레이라 여왕의 말에 바이올렛 공주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름만 공주이지 왕실 입장에서 보면 그녀는 애물단지 취급이었다.
그리고 기사로서 경지에 오른 이후에는 끊임없이 형제자매들의 견제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약혼을 청하는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혼약으로 맺어지는 순간 상대편의 가문도 정치적으로 매장당할 판이었으니 말이다.
“약혼자가 없다라…. 그래도 공주의 나이를 생각하면 이제 슬슬 배우자를 물색해야 하지 않나요?”
레이라 여왕의 말에 바이올렛 공주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저는 잘…. 아마 귀국하시면 아바마마께서 잘 찾아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안 그럴 것이라는 것은 그녀도 알았다.
아니, 어쩌면 정말 찾아줄지도 모르긴 하다.
아마 가문이 다 기울어서 이름만 남은 백작 가문이나 혹은 그보다 못한 시골 가문의 자작이나 남작 정도?
만약 왕실에서 그녀의 혼사를 추진한다면 그녀의 남편감 후보에 오를 인물은 대부분 그런 이들이었다.
그녀가 결혼을 계기로 정치적인 발언권이 나아지는 것을 바라는 이는 플로렌스 공국에 한 명도 없었다.
바이올렛 공주의 씁쓸한 표정을 보고 레이라 여왕이 말했다.
“만약 약혼의 대상이 없다면, 제가 좋은 인물을 한 명 소개해도 될까요?”
“예? 그…. 그건 레스터 왕국의 귀족 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예. 아! 혹시 타향살이는 싫으신가요? 그럼 좀 곤란할 텐데?”
“아니요. 그런 건 없습니다. 다만….”
바이올렛 공주는 말을 흐렸다.
지금 내가 노리고 있는 것은 여왕님의 약혼자입니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억지로 삼켰다.
아무리 그녀가 정치적으로 맹탕이라고 해도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정도로 개념이 없지는 않았다.
다만….
“우리 그이는 어때요?”
레이라 여왕은 개념이 없었나 보다.
아니, 보통 사람의 개념을 초월했다고 해야 할까?
“…예?”
바이올렛 공주가 레이라 여왕의 말을 이해한 것은 대략 10초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지금 뭐라고 말 한 거지?’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어떤 여자가 곧 결혼을 앞두고 있는 자기 남자를 다른 여자에게 소개하겠는가?
거기다 아까부터 다정하게 ‘그이’라는 호칭까지 써 가면서 어필하고 있는데 말이다.
“죄송합니다. 여왕님. 제가 뭔가 좀 잘못 들은 듯한….”
“그렇지 않아요. 제대로 들었어요.”
“…….”
“어때요? 우리 그이 정도면 눈에 차지 않나요?”
“아니, 그…. 그게 그…. 그러니까…. 저기….”
바이올렛 공주는 식은땀으로 등줄기가 축축해진 느낌이 들었다
‘뭐야? 이거…. 어떻게 해?’
레이라 여왕이 왜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혹시 뭔가의 함정인 걸까?
여기서 대답을 잘못하면 자신을 죽이고 플로렌스 공국에 정식 항의를 하려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대부분 부정적인 결론으로 도달했다.
결국….
“흑…. 흑흑….”
바이올렛 공주는 울음이 터져 버렸다.
전쟁터에서는 그렇게 용맹-지나칠 정도로-한 그녀였지만 이렇게 회담의 테이블 앞에서 레이라 여왕을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연약했다.
“바이올렛 공주?”
“흑…. 흐윽….”
“왜 우는 거죠?”
“흐윽…. 죄… 죄송해요. 제가 잘못…. 흐윽….”
“아니요. 저는 잘못을 따지는 게 아니라… 으음.”
레이라 여왕은 오히려 당황했다.
살짝 의중을 떠보기 위해서 대화를 이끌어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상대가 울어 버리는 것이다.
같은 여자, 같은 왕족이었지만 두 여자의 성향은 극과 극이었다.
레이라 여왕이 1,000년에 한 번 날까 말까 한 요물이라면 바이올렛 공주는 1,000년에 한 번 날까 말까 한 순둥이인 것이다.
적어도 전쟁터의 상황만 제외하면 그렇다.
그렇다 보니 레이라 여왕이 살짝 견제를 하듯이 몇 번 툭툭 건드렸을 뿐인데 바이올렛 공주의 멘탈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흐윽…. 잘못…. 제가 잘못했어요. 흐윽…. 죄송해요. 그러니…. 흑….”
‘아니, 당신이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쯤 되면 오히려 레이라 여왕이 미안해질 정도였다.
소피아도 순진한 편이었기는 하지만 그래도 바이올렛 공주는 한층 더했다.
레이라 여왕으로서는 실로 오랜만에 상대에게 당황을 했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이 순진한 아가씨를 상대로 완곡하게 돌려 말하는 건 그만둬야겠어.’
그리고 레이라 여왕은 자리를 옮겨서 바이올렛 공주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직접 손수건을 꺼내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진정해요. 바이올렛.”
다정하게 말하는 그녀의 말에는 공주라는 단어가 빠졌다.
좀 친근하게 말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흐윽…. 흑흑….”
효과가 있었는지 바이올렛 공주는 조금씩이지만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레이라 여왕은 그런 바이올렛 공주를 다정하게 위로하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니까요.”
레이라 여왕의 말에 바이올렛 공주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레이라 여왕에게 말했다.
“…흐윽…. 정말…요?”
“…….”
순간 레이라 여왕은 생각했다.
‘귀여워. 뭐 이렇게 귀여운 여자가 다 있지?’
무방비함과 천진함이 극에 달한 바이올렛 공주의 모습에 레이라 여왕은 순간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이렇게 여린 아가씨가 전쟁터에서는 어떻게 싸운다는 걸까? 혹시 거짓 보고?’
밀턴이 자신에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전쟁터에서 바이올렛 공주가 어떻게 싸우는지는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어쨌든 레이라 여왕은 바이올렛 공주를 어루만지며 계속 말했다.
“당신에게 한 말은 이상한 의도가 없는 진심. 전부 진짜로 한 말이에요.”
“정말… 저를 포레스트 후작님과 이어주려는 건가요?”
“예. 맞아요.”
바이올렛 공주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왜 그러시는 거죠? 그분을 사랑하지 않나요?”
“그건….”
왜 하나같이 하는 말이 모두 돌직구인 걸까?
요물의 약점은 오히려 순진함인 것일까?
대놓고 사랑하지 않느냐는 바이올렛 공주의 말에 레이라 여왕은 조금 망설였다.
그리고는….
“사랑…. 해요. 물론 사랑하죠. 사랑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이건 고백인 걸까? 아니면 자기 세뇌인 걸까?
‘어쨌든 호감 있는 건 사실이니까.’
레이라 여왕은 그렇게 자신을 납득 시키며 바이올렛 공주에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왕족이고 이 나라를 위해서는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정치적인 판단이 떨어지는 바이올렛 공주의 모습에 레이라 여왕은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우리 그이한테 다른 여자가 한 명 더 있다는 것은 아나요?”
“예. 알아요.”
레이라 여왕과 더불어서 소피아 역시 밀턴의 약혼녀다.
그건 들어서 알고 있었다.
레이라 여왕은 바이올렛 공주가 납득할 수 있도록 말했다.
“저는 왕가의 여자예요. 그리고 당신도 마찬가지죠. 그러니 알고 있죠? 왕족의 결혼은 반드시 사랑만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요.”
“예. 알아요.”
바이올렛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