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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145화 (145/257)

제145화

‘똑같은 짓을 한다고? 설마….’

스트라부스 왕국의 서부 지역은 레이라 여왕의 편지 몇 장에 그대로 영지를 들고 투항해 버렸다.

공화국에서는 바랄 수 없는 작위와 영지의 인정을 대가로 받고 순순히 넘어가 버린 것이다.

북풍보다는 태양이라고 힘으로 빼앗는 것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었고 또 빨랐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발랑스 왕국이 스트라부스 왕국의 남부 지역에 그대로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레이라 여왕은 슈하이머 총통의 불안감을 읽고 거기에 박차를 가했다.

“그게 다가 아니죠? 점령지를 안정화시키지도 않은 상황에서 무리한 전쟁을 이어간다면 과연 점령지의 백성과 지도층이 인정을 할까요? 아마 곳곳에서 산발적인 저항군이 일어나겠죠.”

“그걸 확신할 이유라도 있나?”

“국민성이죠. 원래 스트라부스 왕국민들은 공화정에 대한 거부감이 뚜렷한 자들입니다. 당신들이 더 잘 알 텐데요?”

‘거기다 내가 은근히 부추기고 지원도 할 거거든.’

레이라 여왕의 말이 계속될수록 슈하이머 총통은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허풍이다. 이건 그냥 가설일 뿐이야. 하지만….’

레이라 여왕의 말을 마냥 무시하기에는 위험성이 너무 컸다.

그녀가 하는 말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고, 또한 실제 일어났을 때 공화국군에 끼치는 피해는 어마어마할 것이 분명했다.

‘안 돼. 정신을 바짝 차리자.’

슈하이머 총통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홀린 것처럼 상대방의 의도에 휘둘리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

당초의 목적은 설사 무리한 전쟁으로 피해를 입는다고 해도 감수한다.

서부 지역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이것이 이 회담에 나오면서 정한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었다.

상대방의 변설에 휘둘려서 그걸 포기해서는 안 되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 서부 지역을 반환하지 않으면 전쟁이 있을 뿐. 이것은 결정 사항이오.”

슈하이머 총통이 쥐어짜듯이 내뱉은 말에 레이라 여왕은 속으로 생각했다.

‘애쓰는군.’

레이라 여왕은 이때 이미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상대는 소위 말하는 고집불통 타입의 독불장군이었다.

자기 목적을 확실하게 내세우고 그 목적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타입.

외교상에서 이런 타입들이 종종 성과를 거두는 경우는 있다.

하지만, 그건 상대에 따라 다르다.

레이라 여왕에게 있어서 외교라는 것은 철저한 준비를 갖추고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놓은 후에 진행하는 것이다.

외교 석상에서 승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전에 이미 승부를 8할 이상 결정지어 놓고 외교 석상에서 마무리를 짓는 것.

그런 레이라 여왕에게 있어서 슈하이머 총통 같은 독불장군은 가장 다루기 쉬운 봉일 뿐이었다.

이미 승리를 확신한 레이라 여왕은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말했다.

“좋아요. 타협이 안 된다면 전쟁을 계속하는 수밖에요.”

“얼마든지 받아 주겠소.”

“아! 참고로 전쟁을 하기 전에 제가 재미있는 소식 하나 알려 줄까요?”

“뭐가 재미있는 소식이란….”

“라이언 카텔 공작이 앤드루스 제국에 투신했다고 하네요?”

“…….”

순간 공화국 쪽 인사들의 안색이 모두 변했다.

스트라부스 왕국이 자랑하던 세 명의 마스터 중에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공화국에 투신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그게 바로 라이언 카텔 공작이었다.

그랬던 그가 앤드루스 제국에 투신을 했다.

이것은 엄청난 불안 요소였다.

“참고로, 카텔 공작은 제국에 투신하면서 어떤 조건을 달았다고 합니다. 뭐….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망국의 복수를 위해서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크윽….”

슈하이머 총통은 입술을 꽉 깨물었고 페인하임 총통은 명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신음을 흘렸다.

만약 라이언 카텔 공작이 제국에 투신하면서 그 대가로 공화국에 대한 복수를 요청했다면 그건 심각한 위험이다.

어차피 제국에서는 공화국을 견제해야 할 상대고 거기에 마스터 한 명까지 얻을 수 있다면 능히 군사를 일으킬 명분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중간에 발랑스 왕국이 끼어 있기는 하지만 발랑스 왕국이 제국에 협조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 여차하면 남부에서는 제국과 발랑스 왕국의 연합 병력이 밀고 들어올 수도 있었다.

“그 정보는… 어디서 얻은 것이오?”

슈하이머 총통이 씹어 뱉듯이 물어보자 레이라 여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제국쪽에도 나름 연줄이 있어서 말이죠. 친한 친구한테 들었다고 해 두죠.”

“…….”

슈하이머 총통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정보가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최악이다.’

아무리 독불장군이라고 해도 이 상황에서 전쟁을 계속 고집할 수는 없었다.

눈앞에 절벽이 뻔히 보이는데 똥배짱만 믿고 걸어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 상황을 지켜보던 지크프리트는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안 되겠군. 이쪽의 패가 너무 빈약해.’

지크프리트는 외교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의 특성 중에 교섭의 특성은 LV.8일 정도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알 수 있었다.

이 회담에서 공화국이 얻어갈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어떻게든 해 보겠다.

하지만, 이건 진짜 안 되는 상황이다.

그래서 두 총통을 전면에 내세우고 지크프리트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침묵만 지킨 것이다.

‘애당초 상황이 너무 불리했어. 실제로 이 전쟁은 여기까지다.’

지크프리트의 예상대로 레스터 왕국과 두 공화국은 정식으로 정전 협정을 맺었다.

양 국가는 앞으로 3년간 서로의 영토를 침공하지 않으며 무력적인 도발을 하지 않는다, 라는 조건으로 레스터 왕국은 스트라부스 왕국의 서부 지역을 손에 넣었다.

앞으로는 레스터 왕국의 동부 지역으로서 레이라 여왕의 통치를 받게 될 것이다.

또한 레스터 왕국은 힐데스 공화국의 영토의 대부분을 자국의 영토로 인정받았다.

물론 공화국에서 호락호락하게 허락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유리한 상황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레이라 여왕은 기어코 그 부분까지 인정받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이 전쟁은 왕국 연합군의 패배고 공화국군의 승리로 결정되었다.

스트라부스 왕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공화국은 강적이자 숙적인 스트라부스 왕국을 무너트리고 그 영향력을 대륙의 중부까지 밀어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에서 가장 큰 이득을 얻은 것은 레스터 왕국이었다.

영토가 세 배 넘게 커졌고, 특히 힐데스 공화국을 점령하고 얻어낸 북부 지역의 막대한 철 광맥은 커다란 수확이었다.

다만, 공화국 출신인 북부 지역을 온전하게 병합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고, 한동안은 숨을 돌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스트라부스 왕국이라는 거대한 땅덩어리를 집어삼킨 공화국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공화국은 서둘러서 발랑스 왕국과의 국경 지대에 군을 배치하고 방비를 단단히 하는 한편 점령지를 안정화시키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

일시적이긴 하지만 전화가 가라앉고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아니, 평화라기보다는 폭풍 전의 고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남부에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발랑스 왕국의 입장에서는 설마설마하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원군을 보내는 것에 비관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스트라부스 왕국이 쓰러질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입술이 없으면 잇몸이 시린 법.

이제는 발랑스 왕국이 공화국과 직접 국경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발랑스 왕국의 뒤편에 있는 앤드루스 제국 역시 이제는 공화국을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스트라부스 왕국이라는 방패가 사라졌다는 것은 중남부에 있는 모든 국가들에게 공화국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줄 일이었으니 말이다.

지금 당장은 사태를 지켜만 보고 있는 입장들이었지만, 어느 정도 견식이 있는 사람들은 예상하고 있었다.

이념 대립 전쟁, 이라고 이름이 붙은 이 전쟁은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말이다.

“할 만큼 했는데 결국은 일만 키운 것 같네요.”

전쟁이 끝나고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는 길에 밀턴은 마차 안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레이라 여왕이 앉아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당신 말대로 할 만큼은 했어요. 너무 아쉬워하지 말도록 해요. 이제 와서 아쉬워한다고 딱히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말이죠.”

밀턴은 못내 아쉬웠다.

솔직히 말해서 이번 전쟁에서 밀턴은 공화국을 반드시 끝장내 놓을 생각이었다.

왕권주의와 공화주의라는 사상의 대립에 놓여 있는 국가 관계는 어차피 한쪽이 끝장나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의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했지만 그 결과는 패전이었다.

물론 레스터 왕국은 오히려 엄청난 이득을 얻은 전쟁이었지만 그래도 패전이라는 결과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솔직히 귀국하는 밀턴은 발걸음이 무거웠다.

레이라 여왕은 그런 밀턴의 심정을 읽고 옆에서 다독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요. 결과적으로 이 전쟁으로 우리나라는 더 강해졌잖아요?”

이제 레스터 왕국은 북서부를 아우르는 넓은 영토를 갖추게 되었다.

과거 스트라부스 왕국처럼 공화국을 막아주는 방패막은 될 수 없지만 사실상 대륙의 북부에서 공화국을 유일하게 견제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확실히, 앞으로가 중요하죠. 할 일이 태산이네요. 특히 북쪽 지역의 주민들을 병합하는 것은 쉽지 않을 텐데….”

“그 부분은 저도 나름 생각이 있어요. 그보다 당신은 다른 걸 더 신경써줬으면 해요.”

“다른 것?”

“이 전쟁에 가기 전에 미뤘던 일이 하나 있지 않나요?”

“…아!”

밀턴은 순간 깨달았다.

너무 심각한 일들만 계속 이어지다 보니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 전쟁이 끝났으니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맞다. 나 결혼하지.’

그것도 두 명하고다.

“결혼…. 한다고요?”

“예. 모르셨습니까? 후작님은 레이라 여왕님과 결혼하신 후에 대공의 위에 오르시기로 얘기가 되어 있습니다.”

“그…. 몰랐어요.”

밀턴의 결혼에 관한 소식을 듣고 크게 당황한 인물은 플로렌스 공국의 바이올렛 공주였다.

그녀가 이끄는 플로렌스 공국의 병력은 이 전쟁이 끝나고 돌아가야 하지만 그 경로를 굳이 우회하여 레스터 왕국군과 동행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내내 그녀는 불안한 표정을 하고 밀턴의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밀턴에게 중요한 용건이 있기는 했는데 그 용건을 말하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레이라 여왕이 밀턴의 주변에 항상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둘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공식적으로 결혼이 예정되어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딱히 숨길 일은 아니었지만 일부러 소문을 낸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녀는 밀턴에게 약혼녀가 있는 것도 몰랐고, 심지어 그 대상이 둘이라는 거도 몰랐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까지는 말이다.

‘어쩌지?’

모종의 결심을 굳히고 있었던 바이올렛 공주로서는 지금의 상황이 무척 곤란했다.

‘어떻게 하면 되지? 하나도 모르겠어.’

사람은 누구나 잘하는 것이 있고 못하는 것이 있다.

바이올렛 공주의 경우 주특기 전반이 전쟁터에 특화되어 있었다.

산적 토벌하기라던가?

기사단 이끌고 돌격하기.

적장의 모가지 따기.

대강 이런 게 그녀가 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하고자 하는 목적에는 앞에서 설명한 특기들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남자를 유혹하는 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렇다.

그녀가 노리는 것은 적장의 모가지가 아니라 남자의 심장이었다.

그 대상은 당연히 밀턴이었고 말이다.

‘나에게는 그가 필요해.’

바이올렛 공주의 입장은 꽤 절실했다.

밀턴에게 첫눈에 반하고 그 사랑이 커져서 이성을 상실할 만큼 열정적으로 불타올라서….

같은 이유는 물론 아니다.

전쟁터에서 밀턴과 함께하면서 호감 정도는 생겼지만 이렇게 간절할 정도로 사랑을 느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 그녀에게는 밀턴이 필요했다.

이번 전쟁에서 그녀는 적지 않은 공적을 세웠고, 밀턴은 이를 레이라 여왕에게 정직하게 밝혔다.

당연히 레이라 여왕은 그녀에게 큰 포상을 약속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전쟁이 대외적으로는 패전이라는 것이다.

플로렌스 공국에서는 그녀가 아무리 큰 포상을 가지고 돌아간다고 해도 반드시 꼬투리를 잡을 것이다.

그녀의 형제자매들은 그녀를 끊임없이 견제하고 있었고, 패전이라는 얼룩은 그녀를 끌어내리기에 충분한 근거가 될 것이다.

그녀 혼자라면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벌을 받는다면 함께 원정에 참가한 부하들도 같은 벌을 받을 것이고, 더 심할 경우 그녀의 친모 역시 피해 가지 못할 것이다.

원래 왕족이 나락으로 떨어질 때는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깊은 곳으로 떨어지는 법이다.

그녀는 결코 정치적으로 식견이 깊은 건 아니었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인생 전반에 걸쳐서 끊임없이 받아온 것이 형제자매들의 질투와 시기, 그리고 견제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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